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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가-232화 (232/524)

황금가 (232)

“얻고 싶은 게 있으면 일단 먹여라!”

아버지로부터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던 말이다.

그 말을 하면서 아버지는 덧붙이셨다.

이 세상에 공짜로 일해 주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심지어는 부처님께 소원을 빌 때도 시주를 해야 한다.

물론 시주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소원을 들어주지 않지는 않겠지만, 이왕이면 다홍치마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하지 않는 것보다는 하는 게 더 낫다.

더하여 시주를 하고 나면 스스로 몰염치한 자라는 자괴감에서 벗어나 부처님 앞에 좀 더 당당해질 수가 있다.

“너는 선물이지만 받는 사람은 뇌물이라고 생각하게 해야 한다. 그런 다음 자연스럽게 원하는 바를 이야기해라. 절대 급하게 해서는 안 된다.”

“어이구, 추워라!”

금장생은 팔로 몸을 빠르게 문질렀다.

“이런, 내 정신 좀 보게, 알몸으로 서 있는 분을. 저를 따라오십시오, 대협.”

악투루는 서둘러 걸었다.

‘성공이네.’

금장생의 얼굴에 싱긋 미소가 어렸다.

악투루가 들고 있던 비급은 어느새 주머니 안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낭인성 성주 막거성의 처소는 낭인성 한가운데 위치한 가장 크고 높은 건물이었다.

“일 층은 손님이 성주님을 기다리는 장소와 회의실, 식당 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층은 성주님 집무실과 저를 비롯한 하인들 처소가 있고요.”

금장생이 묻지도 않았는데 악투루는 낭인성에 대해 세세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잠시 후 금장생과 팔장군은 악투루를 따라 들어갔다.

그곳은 차를 마시는 응접실과 내실이 분리된, 일반 가정집과 비슷한 공간이었다.

탁자와 의자, 서랍장이 놓여 있었는데 가구는 최고급이었다. 오른편 벽에는 간단하게 차를 끓일 수 있는 간이 주방도 면해 있었다.

“여긴 귀한 손님이 왔을 때 모시는 방입니다.”

“깔끔하군요.”

“잠시만 앉아 계십시오.”

안으로 들어올 때 지시를 내려 둔 듯 하인들은 탁자와 의자를 가지고 안으로 들어왔다. 탁자 두 개와 의자 여덟 개였다.

“앉으세요.”

탁자와 의자가 제자리에 놓이자 금장생은 팔장군에게 말했다. 팔장군들은 각자 자리에 앉았다.

“육헌은 어디 있느냐?”

악투루는 밖을 향해 소리쳤다.

“네.”

대답과 함께 사십 대 중반 사내가 안으로 들어왔다.

“이분들 몸에 맞는 옷을 가져와라.”

“알겠습니다.”

육헌은 줄자를 가지고 혈노왕 신무 앞으로 갔다.

“치수를 재겠습니다.”

육헌은 줄자를 길게 펴며 말했다.

그러자 신무가 벌떡 일어났다.

‘응?’

금장생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육헌이란 자는 분명 ‘일어서 주십시오.’가 아니라 ‘치수를 재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혈노왕이 벌떡 일어난 것이다.

그건 곧 말속에 숨은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는 걸 뜻했다.

완벽한 생시가 된 게 분명했다.

육헌은 팔장군들의 몸 치수를 모두 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얼굴만 내밀고 있는 금장생 앞으로 왔다.

“난 팔八을 입습니다.”

금장생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육헌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를 떴다.

그가 다시 들어온 건 한 식경 후였다. 육헌을 따라온 하인들의 손에는 총 아홉 벌의 옷이 들려 있었다.

육헌은 옷 치수를 확인하고는 팔장군 일행에게 나눠 주었다.

“사노왕은 저 안으로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고 오세요.”

금장생은 안쪽으로 이어진 문을 가리켰다.

불여하는 금장생이 가리킨 곳으로 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여러분도 갈아입으세요.”

금장생은 팔장군에게 말하고 자신도 옷을 입었다.

팔장군들은 먼저 무기를 풀고 옷을 갈아입었다.

육헌이 가져온 건 무복과 장포였다. 무복을 입고 장포를 걸친 후 각자 무기를 찼다.

그들을 바라보던 금장생은 투구를 벗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팔장군들은 일제히 투구를 벗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잠시 후 안으로 들어갔던 불여하가 나왔다.

불여하는 연한 녹색 장포를 입고 있었다. 장포 안쪽에 입은 옷은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무복이었다.

“내 장포 주세요. 투구도 벗고요.”

금장생은 불여하에게 손을 내밀었다.

불여하는 금장생에게 장포를 건네주고 투구를 벗어 다른 이들처럼 탁자 위에 놓았다.

‘헐!’

불여하를 바라보던 악투루는 내심 신음을 내뱉었다

투구 안에 숨어 있던 불여하의 미모는 엄청났다. 특히 갈색 피부와 벽안 눈동자의 조합은 신비로운 느낌을 자아냈다.

일반적으로 미인이라 부르는 여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미인이 바로 불여하였다.

“모두 내 앞으로 오세요.”

금장생이 말하자 팔장군들은 금장생 앞으로 늘어섰다.

금장생은 이제는 소지품 창고로 변한 마법 주머니 안에서 부적을 꺼내 팔장군 이마에 붙였다.

접착제를 붙여 놓은 것처럼 부적들은 철썩철썩 달라붙었다.

그러고는 팔장군들이 벗어 놓은 투구를 마법 주머니 안으로 집어넣었다.

“가, 강시였습니까?”

악투루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는 여덟 명이 강시일 거라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장례 사업은 제가 벌여 놓은 사업 중 하납니다.”

“그럼 저들은 누군가에게 데려다주는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그럼?”

“장례업종의 사장은 주로 강시 운반을 맡는데, 늘 위험과 함께하는 일이라서요.”

“강시 호위란 말이군요.”

“장점이 많아서 데리고 다닙니다.”

“어떤 장점이 있습니까?”

“일단 아무것도 먹지 않으니까 식대를 지불할 필요가 없고, 일반인과 자는 게 불가능하니까 객잔 비용을 줄일 수 있습니다. 반면에 몸은 금강불괴지신에 가까워 아주 강하고요. 그 정도면 최고의 호위잖습니까.”

“아!”

악투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로 가 앉으세요.”

금장생의 지시를 받은 팔장군들은 자리에 앉았다.

“차 한잔하시겠습니까?”

악투루가 물었다.

“주시면 고맙지요.”

“알겠습니다.”

악투루는 얼른 차를 준비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찻잔을 앞에 두고 앉았다.

“장례업 말고는 또 어떤 사업을 하고 있습니까?”

“이것저것 벌여 놓은 건 많은데 내놓을 만한 건 아직 없습니다.”

“자리를 잡는 중이란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그럼 우리 낭인성과 몇 가지 계약을 해 보시겠습니까?”

“낭인성은 이미 거래하는 거래처가…….”

“지금까지는 양상태가와 거래를 했는데 얼마 전에 그곳이 망했습니다. 상단주 양철상은 시체로 발견됐고요.”

“그랬군요.”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래를 하시겠습니까?”

악투루가 물었다.

“물론입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가장 먼저 들여와야 할 건 생필품입니다.”

“필요한 품목과 양을 말씀해 주시면 바로 공급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 전에 계약서를 작성해야겠지요.”

“물론이지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악투루는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지필묵을 가지고 들어왔다.

“이건 우리 낭인성 계약서 양식입니다. 이 계약서에 수결하면 계약은 성사됩니다. 계약 기간은 이 년입니다. 괜찮겠습니까?”

“산지 물가나 혹은 천재지변 등으로 인해 현지 가격이 상승하면 공급가도 올라간다는 조항을 집어넣었으면 좋겠는데 가능하겠습니까?”

“역시.”

악투루는 빙그레 웃었다.

낭인성 계약서에는 가격 변동에 대한 걸 집어넣지 않았다. 공급자가 모르고 넘어가면 물건을 싸게 살 수가 있는데 굳이 집어넣을 이유가 없었다.

공급자가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언급하면 별첨 계약서로 처리해 왔다.

그런데 금장생은 낭인성 계약서에 빠진 게 있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 정말로 장사꾼이란 소리였다.

“우리 낭인성에서는 가격 변동에 대한 건은 별첨 계약서를 작성합니다.”

“좋은 방법이네요.”

금장생은 싱긋 웃었다.

“그런데 성주님의 허락이 없어도 되는 겁니까?”

문득 든 생각이었다.

일만 오천 명이 생활하는 데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는 계약이다. 성주의 허락 없이 총관 독단으로 가능한지 의문이었다.

“낭인성 생필품 구입에 대한 건 전적으로 제가 결정합니다. 성주님께는 사후 보고하면 됩니다.”

“그렇군요.”

“물건은 닷새 후부터 공급해 주십시오. 결제는 물건이 들어올 때마다 바로바로 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천만에요. 양상태가가 망하는 바람에 여러 가지로 고민이 많았는데 장 대협 덕분에 모두 해결되었으니 제가 오히려 고맙지요. 그런데 상단 이름은 있습니까?”

“황금가라고 지었습니다.”

“아! 황금가.”

“아십니까?”

“요새 감숙성에서 신흥 상단으로 주목받고 있지 않습니까.”

“이번 낭인성과의 계약으로 인해 우리 황금가는 날개를 얻은 셈이 됐습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금장생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이러다가 하루 종일 인사만 받게 생겼습니다. 친구분이 계신 곳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악투루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럴까요.”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 일어났다.

무혼과 막거성은 같은 건물 사 층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악투루가 안으로 들어가 알리고, 잠시 후 금장생도 자리에 끼었다. 혈노왕 일행은 아래층에 둔 상태였다.

“내 친구 장생이네.”

무혼은 막거성에게 금장생을 소개시켰다.

“처음 뵙습니다, 성주님. 장생입니다. 직업은 장사꾼입니다.”

“무인이 아니란 말이오?”

막거성의 눈이 커졌다. 무혼의 친구면 당연히 무인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버지도 형님도 모두 장사꾼이라서요.”

“무공이 상당히 강한 것 같던데…….”

“무공은 어쩌다가 익힌 거고, 그걸로 성공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구먼.”

막거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이 싫다는데 자신이 나서서 뭐라고 할 사안이 아니었다.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거냐?”

금장생의 얼굴이 유난히 밝아 보이자 무혼이 물었다.

“한 건 올렸습니다.”

“한 건?”

“계약을 맺었습니다.”

“규모는 어느 정돈데?”

“일만 오천 명이 기거하는 성입니다.”

“일만 오천 명이면 이곳 낭인성?”

“네.”

금장생은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총관과 우리 낭인성에 물건을 공급해 주는 계약을 맺었단 말인가?”

듣고 있던 막거성이 물었다.

“그건 총관께서 직접 보고한다고 하였는데 제가 공연히 설레발친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금장생은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하하하! 그건 걱정할 필요 없네. 낭인성 예산 집행권은 총관에게 일임했으니까.”

“그분에게 피해 가는 일은 없단 말씀이십니까?”

“그러네. 그런데 상단 이름이 뭔가?”

“황금갑니다.”

“아! 그렇구먼.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게. 다른 건 몰라도 무력적인 건 내가 도와줄 수 있으니까.”

“감사합니다, 성주님.”

금장생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천만에.”

막거성은 빙긋 웃고는 다시 무혼을 보았다. 그리고 금장생이 들어오기 전에 하던 이야기를 다시 했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날 부하로 부리고 싶으면 천왕지회에서 날 이겨야 한다. 그 방법 말고는 없다.”

“내게 패하면 날 따르겠다는 거냐?”

“공개적인 자리에서 패해야 부하들을 설득할 수 있다.”

“듣도 보도 못 한 자를 주공으로 모시라고 할 수는 없다는 말이군.”

무혼은 고개를 끄덕였다.

막거성의 말이 맞다. 조직이나 단체의 수장은 누군가에게 머리를 조아릴 때도 신중하게 처신해야 한다.

만일 자신이 고개를 숙인 사실을 부하들이 용납하지 않으면 가장 먼저 조직이나 단체가 와해되고 만다. 비밀로 할 사안이 아니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약속해 줄 게 있다.”

“어떤 약속을 말이냐?”

“너도 내게 패하면 내 부하가 된다는 약속이다.”

“공평하게 승자가 모든 걸 갖자는 거구나.”

“그렇다.”

“좋다.”

무혼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평해지 않은 건 내기가 아니다. 누군가가 가진 모든 걸 얻으려면 내가 가진 모든 것도 내놓을 준비가 돼야 한다.

특히 갖고 싶은 게 누군가가 평생에 걸쳐 일군 거라면 더더욱 그렇다.

“현재의 나뿐만이 아니라 미래의 나까지 천왕지회에 걸겠다.”

무혼은 확고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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