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231)
귀마존의 이마로 파고들어 간 붉은 광채는 항문을 가르며 빠져나왔다.
쩌억!
두 조각으로 잘린 귀마존의 동체가 아래로 추락했다.
떨어지면서 등에 돋아났던 날개가 사라졌다.
퍽! 퍽!
둔탁한 소성이 울려 퍼졌다.
바닥으로 떨어진 귀마존의 동체는 커다란 뭔가로 내리친 것처럼 엉망으로 변했다.
척!
무혼은 귀마존의 시체 옆으로 내려섰다.
그리고 귀마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파앗! 파앗!
귀마존의 몸에서 불그스름한 광채가 흘러나왔다.
머리 부분에서 시작한 광채는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잠시 후 귀마존의 시체가 있던 자리엔 재만 남았다.
“네가 없앤 건 몇 명이냐?”
무혼은 허공으로 시선을 주며 물었다.
“빙마존과 풍마존이라고 하였습니다.”
“시체는 어디 있지?”
“조금 전 귀마존처럼 재만 남았습니다.”
“악마수로 없앤 거냐?”
“그들을 없앤 건 이겁니다.”
금장생은 혈사아를 쥔 손만 은신술을 풀었다, 그러자 붉은색 검이 나타났다.
“신족을 재로 만들 수 있는 건 전란의 시대 때 만들어진 신기밖에 없다는 걸 아느냐?”
“이것도 보물이란 말입니까?”
“그런 모양이다.”
“제가 가진 것 중에 보물 아닌 건 없군요.”
혈사아에 이어 얼굴을 드러낸 금장생이 히죽 웃었다.
“하지만 네 꿈은 장사꾼이지.”
“제 꿈이 마음에 들지 않나 봅니다.”
“전사의 피를 타고난 자가 아니면 절대 악마수의 선택을 받을 수 없다. 넌 위대한 전사가 될 운명이다.”
“사업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거 아닙니까?”
“무인으로 성공하는 것보다 사업이 더 어렵단 말이냐?”
“더 어렵다는 게 아니고, 사업도 쉽지 않다는 겁니다. 무인들이 성공하기 위해 싸우는 횟수만큼 장사꾼도 싸워야 한다는 겁니다. 특히 상단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운까지 따라 줘야 하는데 그 운은…….”
“됐어, 인마. 그보다 언제까지 숨어 있을 거냐?”
“나가지 못할 사정이 있습니다.”
“무슨 사정?”
“빙마존과 풍마존이 너무 강해서 옷을 벗어야 했습니다.”
“완벽한 은신술을 펼치기 위해 옷을 벗었다는 말이구나.”
“그렇습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는 누구냐?”
두 사람 옆에서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혼과 금장생은 고개를 돌렸다. 이 장 떨어진 곳에 서서 이편을 바라보는 자는 막거성이었다.
“그런 당신은?”
무혼은 되물었다.
“나는 낭인성 성주 막거성이다.”
“나는 해왕 철무혼이다.”
“당신이?”
막거성의 눈이 커졌다.
“그렇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하더니…….”
막거성은 무혼과 거리를 벌렸다.
“나는 오늘 당신을 처음 본다. 원수라는 건 무슨 소리냐?”
“내 아들을 죽이지 않았다고 할 참이냐?”
막거성은 버럭 소리쳤다.
“당신 아들이면 혹시 객잔으로 찾아왔던 그 막사웅을 말하는 거냐?”
무혼은 물었다.
“그렇다.”
“그럼 잘못 짚었다.”
“너희가 아니라는 거냐?”
“너는 남의 집에 갈 때 방문첩을 보내고 나서 그 집안사람을 살해하느냐?”
“그건…….”
막거성은 말끝을 흐렸다.
무혼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방문하겠다고 통고까지 한 자가, 상대방 가주의 지인이나 혈육을 없앤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막사웅 그 녀석에게 약간의 훈계를 한 건 맞지만 죽이진 않았다.”
“그럼…….”
“이건 내 생각인데, 막사웅의 사인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천사를 몇 놈 생포해서…….”
무혼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살아 있는 천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천사들을 없앤 이는 금장생의 호위인 불여하였다.
불여하는 궁을 든 채 머리만 드러낸 금장생 아래쪽에 서 있었다.
“무 형 말이 맞습니다, 성주님. 우린 막사웅 그 친구를 해칠 이유가 없습니다. 성주님도 생각해 보시면 알겠지만,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잖습니까.”
“으음!”
막거성은 신음을 흘렸다.
“굳이 천사들이 아니더라도 조사를 해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겁니다.”
“알았다. 당신들을 믿겠다. 그런데…….”
막거성은 무혼을 보았다.
“말해라.”
“내가 아는 해왕은 백리장광 대협이다. 그런데…….”
“그는 내 부하가 되었다.”
“해왕을 굴복시킨 거냐?”
“굴복시킨 게 아니라 부하를 자처했다.”
“쿡!”
막거성은 피식 웃었다.
“웃는 이유는?”
“해왕이 부하를 자처했다는 게 우스워서 그런다. 그는 해왕에 오른 후 팔왕이 되기 위해 모든 걸 쏟아부었다. 그런 자가 부하를 자처했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말이 된다.”
“그게…….”
“왠지 아느냐?”
“모른다.”
“절대적인 강함 앞에서 자존심이란 발톱에 낀 때보다 못한 법이라서 그런 거다.”
“백리장광 대협이 모든 꿈을 접을 정도로 네가 강자라는 거냐?”
“그렇게 생각해도 된다. 그보다, 날 계속 이곳에 세워 둘 참이냐?”
“아니다. 하지만 그 전에 확인할 게 있다.”
“여긴 고대에 전사의 성이라고 불렸던 곳이 맞다. 천마, 잠마, 수라가 여기서 무공을 배운 것도 맞고. 하지만 아무것도 없다. 이곳에서 무공을 익힌 세 사람은 각자의 길로 떠났다. 이 안에 남아 있는 거라고는 너희도 겪은 마물들뿐이다.”
“그렇구나.”
막거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해도 수색을 계속하고 싶다면 말리지 않겠다.”
“낭인들이 이곳을 뒤지는 걸 막을 권한이 내게는 없다.”
“그건 알아서 해라!”
척! 척척척! 척척!
그때 일단의 무리가 광장 쪽으로 걸어왔다.
그들은 화탄이 폭발할 때 전사의 성 안으로 튕겨 들어왔던 팔장군 중 불여하를 제외한 일곱 명이었다.
마물들과 격전을 치른 듯, 일곱 명의 옷은 넝마처럼 찢겨 있었다.
무혼과 금장생은 바로 알아보았지만 막거성과 낭인성 문도들은 달랐다. 그들은 팔장군을 적으로 간주하고 곧바로 공격을 시작했다.
“내 호위들입니다.”
낭인성 문도들이 무기를 휘두르려는 순간 들려온 금장생의 목소리에 그들의 동작이 우뚝 멈췄다.
“어?”
낭인성 무인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허공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그들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마치 누군가에게 제압을 당한 것처럼 팔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적이 아니니까 공격할 필요 없습니다.”
다시 방금 목소리가 들려오자 미지의 속박에서 풀려났다.
낭인성 문도들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면서 물러났다.
“이쪽으로 오세요.”
금장생은 적사월 일행을 보며 말했다.
칠장군은 불여하 옆으로 와 섰다.
“가자.”
막거성은 앞장섰다.
아무것도 없다는데 캄캄한 지하를 수색하겠다는 것도 모양새가 이상했다. 수색은 아들들에게 맡겨도 충분하다.
“먼저 가십시오. 나는 찾아볼 게 있어서요.”
금장생은 무혼을 보며 말했다.
“잃어버린 거라도 있어?”
무혼이 물었다.
“옷을 찾아 입으려고요.”
“알았다.”
무혼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막거성을 따라나섰다.
무혼이 떠나자 금장생은 시체들 사이를 헤집고 다녔다.
그가 싸움터에 남은 건 무혼에게 말한 것처럼 옷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 처리하지 못한 이호를 찾아서 끝장을 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아무리 뒤져 봐도 이호는 보이지 않았다.
금장생은 이호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렸다.
빙마존이 심장으로 빙검을 찔러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대하는 절망적인 표정을 짓지 않았다. 그건 곧 진짜 죽음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끄응!”
금장생은 얼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가짜를 세워서 놈의 감시를 벗어나는 수밖에 없겠네.”
이호는 낙양의 망루를 알고 있는 사람 중의 한 명이다. 이호를 완벽하게 속이기 위해서는 가짜를 회장으로 세워 망루를 운영하는 수밖에 없을 듯했다
“그나저나 오호는…….”
그는 씁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은신술을 펼치고 있던 천객들과 싸울 때 오호의 목도 함께 날려 버렸다.
“적에게 줄 수 있는 건 죽음뿐이다, 삼호.”
금장생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는 옷을 벗어 두었던 곳으로 갔다. 하지만 그의 옷은 입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옷은 내버려 두고 적운신갑만 챙겼다.
“가죠.”
그리고 팔장군에게 말했다.
얼굴만 내놓은 금장생이 걸음을 옮기자 불여하를 비롯한 팔장군도 금장생을 따라 이동했다.
잠시 후 일행은 밖으로 나왔다.
“장생 대협이십니까?”
출입문 앞에 서 있던 사내가 얼굴만 드러나 있는 금장생을 보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는 오십 대 후반으로, 중원인이 아니었다. 회색 머리에 회색 눈썹을 가진 전형적인 색목인의 체형이었다.
이국적으로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건 검은 눈동자 때문인 듯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사내는 몸을 돌려 앞장섰다.
낭인성은 죽림을 통과하자 나왔다.
높은 담 같은 건 없었다. 광활한 공터에 거무튀튀한 건물 수백 채가 서 있었는데, 분위기는 상당히 을씨년스러웠다.
“너무 황량한 거 아닌가요?”
금장생은 안내하는 사람에게 물었다.
“저렇게 보여도 용담호혈입니다.”
“뭔가 있다는 건가요?”
“네.”
“혹시 진식이 구축돼 있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참, 나는 장생입니다. 직업은 장사꾼이고요.”
“무인이 아니란 말씀이십니까?”
사내는 깜짝 놀란 눈으로 금장생을 보았다.
“잔재주를 조금 익히긴 했지만 무인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부모님도 제가 안전한 일을 하기를 원하시고요.”
“그렇군요.”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성함이…….”
“아! 나는 악투루라고 합니다. 직책은 총관입니다.”
“총관이면 낭인성의 대소사를 관리하는 분이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대단한 분이신데…….”
금장생은 얼른 은신술을 풀었다.
“억!”
알몸 상태인 금장생을 보자 악투루는 자기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이런, 실례했습니다. 인사를 하려는 욕심에 알몸이란 사실을 깜빡했습니다. 결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금장생은 당황한 얼굴로 하체를 가렸다.
“결례라니 무슨 말씀을. 오히려 제가 부담을 준 것 같습니다. 어서 은신술을 펼치십시오.”
악투루는 다급하게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금장생은 다시 은신술을 펼쳤다.
잠시 후 그의 신형이 허공으로 녹아들어 가고 얼굴만 남았다.
‘엄청나네.’
금장생을 바라보던 악투루는 혀를 내둘렀다.
바로 앞에 얼굴이 드러나 있는데도 기척이 전혀 감지되지 않았다. 만일 저 얼굴이 사라진다면 바로 옆에 있다는 것도 알 수 없을 게 분명했다.
“그런 엄청난 실력을 지녔다면 무인으로 승부를 걸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악투루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가 성주보다 강할 것 같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그럼 성주와 함께 간 무혼 그 친구보다 강할 것 같습니까?”
“그것 역시…….”
“제가 은신술에 강점을 보이긴 하지만 강호는 그것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검날을 밟고 살아가는 삶보다 물건을 팔아먹는 장사가 훨씬 좋습니다. 제 체질에도 맞고요.”
“그렇군요.”
악투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이 무림이 싫다는데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참! 이런 거 줘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금장생은 책 한 권을 꺼내 악투루 앞으로 내밀었다.
“이건?”
악투루는 의아한 얼굴로 금장생을 보았다.
“우연히 얻은 건데 제게는 별로 쓸모가 없어서요.”
금장생이 악투루에게 준 건 풍마존의 품속에 있던 비급이었다.
제목을 슬쩍 보았는데 선풍마강이란 글이 적혀 있었다. 제목이 전서체인 걸 보면 천 년 전에 창안된 게 분명했다.
최고의 뇌물이 될 것 같았다.
“서, 선풍마강은 전설의 구마 중 한 명인 풍마존의 무공인데…….”
악투루는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