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224)
자객대전
‘그럼 저들은?’
전 같았으면 믿지 않았을 테지만, 무혼과 친구가 된 지금은 이호가 살아난 게 이상하지 않았다.
금장생이 궁금한 건 따로 있었다.
죽었던 자를 다시 살려 낸 삼신회가 어떤 단체냐 하는 것이었다.
“또 만났구나, 일호.”
“전부터 자꾸 일호라고 하시는데, 나는 일호가 누군지 모릅니다.”
금장생은 정중하게 말했다.
“네놈은 삼호를 구하러 왔다. 그게 곧 네놈이 일호라는 증거다.”
“내가 거기 간 건 나 때문에 여자가 다치는 게 싫어서였습니다.”
“거짓말 마라, 놈!”
이호는 버럭 소리쳤다.
“내가 당신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한 가지라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금장생은 이호를 가만히 바라보며 물었다.
“넌…….”
“말하는 걸 보면 일호는 당신보다 무공이 더 높은 것 같은데, 만일 당신이 일호라면 자기보다 무공이 낮은 자를 피해 도망치겠습니까, 아니면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못하도록 목을 잘라 버리겠습니까? 만일 제가 일호였다면 후자를 택할 것 같습니다.”
“클클클! 고놈 입이 참으로 매끄럽구나.”
듣고 있던 귀마존이 끼어들었다.
“입이 매끄러운 게 아니라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강신술사라고 하였더냐?”
“전엔 그랬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지금은 아니라는 건 무슨 뜻이냐?”
“귀찮은 일이 계속 생겨서 장의사를 팔아 버렸습니다.”
“네가 일호가 아니라는 증거가 있느냐?”
“제 친구가 있었으면 증언을 해 주었을 텐데 안타깝습니다.”
“네 친구의 증언을 우리가 믿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제 친구들이 일반 양민이라면 믿지 않겠지만 고위 관직에 있는 이들이라면 믿을 거 아닙니까.”
“친구들이 관리더냐?”
“한 명은 금의위 제일천호 자운영이고 다른 친구는 동창 제일첩형 권말남입니다.”
“금의위 천호와 동창 첩형이 친구라고?”
귀마존의 눈이 커졌다.
그가 아는 한 천객 일호와 금의위 무인이나 동창 무인은 절대 친구가 될 수 없다.
왜냐면 금의위나 동창에서 병부상서 육구남, 좌군도독 이벌계, 동창 제삼첩형 윤구 등 많은 관리들을 암살한 범인으로 지목하고 쫓고 있는 자가 천객 일호이자 무림십패의 일인인 사상死商 암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앞에 있는 자에게서는 자객의 기운이 전혀 감지되지 않았다.
“그들은 지금 감숙성 임조부에 있습니다. 거기로 간다면 당장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럼 네가 이곳으로 들어온 이유는 뭐냐?”
“제 친구 때문입니다.”
“무혼 그놈 때문이란 말이냐?”
“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타깝게 됐구나.”
귀마존은 금장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왜……?”
“네놈이 일호가 맞건 틀리건 여기서 죽어야 할 운명이라서 그런다.”
“내가 죽어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까?”
“조금 전에 무혼 그놈이 친구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러니까 제가 죽는다면 무혼 그 친구 때문이군요.”
“그렇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뭐냐?”
“제가 알기론 무혼 그 친구는 강호무림에 처음 나와서 누군가와 원한을 맺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를 죽이려고 하는지가 궁금하다는 거냐?”
“그렇습니다.”
“그놈은 나를 죽였다.”
“네?”
“여기 있는 우리를 죽인 놈이 그놈이란 말이다.”
“……!”
금장생은 말없이 귀마존 일행을 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짚이는 게 있어 입을 열었다.
“혹시 이름이…….”
“나는 귀마존이고 이 친구는 태양마존, 저 친구는 빙마존 그리고 저 친구는 풍마존이다.”
금장생은 비어져 나오려는 신음을 꿀꺽 삼켰다.
설마 역천영면마진 안에서 보았던 자들의 이름을 이곳에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런데…….’
문득 전에 오호로부터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오호는 자신의 조부를 야수마존이 아니라 야수마라고 하였다. 아울러 귀마존이나 태양마존, 빙마존, 풍마존 등은 없고 귀마, 태양마, 빙마, 풍마는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저들은 삼백 년 전 사용했던 별호를 들먹였다.
금장생은 귀마존 뒤편으로 시선을 주었다.
곧 찾고자 하는 자를 찾아냈다. 야수마의 손자라고 하였던 오호였다.
―삼호는 파문됐소.
곧 오호의 전음이 들려왔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일호를 구한 사람이 삼호라고 이호가 상부에 보고를 했소. 곧 취조가 있었는데, 삼호는 부정하지 않았소.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배신자로 낙인찍혔소.
―배, 배신자로 낙인을 찍었다고요?
금장생의 몸에서 서늘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서늘한 기운은 곧 살기가 돼 주위로 퍼져 나갔다.
‘응?’
귀마존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금장생의 몸에서는 어떤 기운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살을 엘 것 같은 살기를 흘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소. 배신자의 낙인이 찍힌 삼호는 모든 걸 잃고 타락관으로 갔소.
―지금 타락관이라고 했습니까?
금장생은 주먹을 천천히 그러쥐었다.
타락관.
그곳은 창기들이 머무는 장소다.
칠 할 이상이 사내들로 구성된 삼신회는 휴가를 내보내 젊은이들의 혈기를 다스렸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강간 사건이 수시로 발생하자 상부에서는 젊은이들의 혈기를 풀어 줄 공간을 만들게 되는데, 그곳이 바로 타락관이었다.
하지만 타락관의 창기들은 철저하게 외부에서 들여왔다.
그런데 그곳으로 삼호를 집어넣었다고 하였다.
―여기 있는 천객들은 대부분 타락관으로 가서 삼호를 취했소. 가장 먼저 가서 삼호를 취한 자가 바로 이호요.
―…….
금장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억!’
귀마존은 깜짝 놀랐다. 금장생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진득한 살기가 꺼지듯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는 내기를 끌어 올려 금장생을 확인했다.
하지만 조금 전 살을 엘 정도로 강하게 뿜어 나오던 살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 흔적도 없었다.
‘이게…….’
그는 눈을 껌뻑이며 금장생을 보았다.
‘이건 무정지도無情之道?’
“일호가 맞구나.”
귀마존이 말했다.
무심지도 혹은 무정지도라 부르는 경지는 오직 자객만이 극한까지 터득할 수 있고, 그 경지의 완성은 살기의 유무로 판단한다.
처음엔 살을 엘 것 같은 살기를 뿜어내다가 마침내 그마저도 삼켜 버리고 마는 최고의 경지.
살기가 사라졌다고 해서 살기로 상대를 죽이는 의형살인강까지 없어진 건 아니었다.
귀마존이 아는 한 천객 중 그런 경지에 이른 자는 천객 일호, 즉 사상 암야뿐이었다.
하지만 금장생은 귀마존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삼호의 조부가 철마鐵魔 나극이라고 들었습니다.
질문을 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더 이상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았다.
철마는 구천각의 각주 신분이었다.
삼호가 아무리 죄를 지었다고 해도 구천각의 각주가 손녀딸을 구하지 못했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철마 어르신 역시 모든 직위를 박탈당하고 옥에 수감됐소.
―그랬군요. 그런데 나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왜 그런 겁니까?
이호는 여전히 확신을 갖지 못한 상태였다.
만일 오호가 말을 했더라면 저렇게 나오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일호를 걱정해서 그런 건 절대 아니오. 일호와 엮이는 순간 나도 삼호처럼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고, 입을 다무는 게 신상에 좋다는 결론을 내렸소.
“일호가 맞느냐고 물었다.”
귀마존의 말투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누군가가 말하길 귀마존이 아니고 지금은 귀마라고 부른다고 하던데…….”
금장생은 귀마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놈들은 우리 부하일 뿐이다.”
“아!”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철마 나극이 손녀딸을 구하지 못한 이유를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죽을 준비가 됐느냐?”
급기야 귀마존의 몸에서 진득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나는 말입니다, 그녀를 좋아하진 않습니다. 어쩌다가 함께 일을 하게 됐고, 안면을 익힌 사이일 뿐이죠. 물론 이건 내 감정이 그렇다는 겁니다. 그녀가 예쁘지 않거나 착하지 않아서 그런 건 절대 아닙니다. 그녀는 아주 예쁘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할 정도로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암살이 주된 업무인 천객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금장생의 신형이 서서히 희미해졌다.
“노, 놈이 사라지기 전에 잡아야 합니다!”
금장생이 은신술을 펼친다는 걸 알아차린 이호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죽여라!”
귀마존이 공격 명령을 내렸다.
파앗! 파앗!
그러자 귀마존 뒤편에 있던 자들이 일제히 몸을 날렸다.
“나는 애초에 무림에 관심이 전혀 없었습니다. 천객 일호가 돼 삼신회를 위해 일했던 것도, 무공으로 성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대 천객 일호에게 입은 은혜를 갚기 위해서였습니다. 삼신회를 그렇게 그만둔 이유 또한,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린아이도 살해하는 그들에게 염증을 느낀 것 때문이기도 했지만…….”
금장생의 신형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사이 불여하 또한 모습을 감췄다. 금장생이 아공간 틈바구니로 보내 버린 것이다.
금장생은 사라졌지만 목소리는 계속 흘러나왔다.
“그 정도면 은혜를 충분히 갚았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차하!”
“타하!”
가장 먼저 금장생이 있는 곳으로 온 두 명이 기합과 함께 무기를 휘둘렀다.
두 사람의 무기는 검이었다.
진득한 살기와 함께 휘둘린 검이 잘라 낸 건 허공이었다.
‘응?’
‘어?’
두 사람은 어리둥절했다.
분명 검을 휘두를 때까지만 해도 그 자리에 금장생이 있었다. 그런데 검이 허공을 가르기 시작한 순간 사라져 버린 것이다.
두 사내는 좌우를 살폈다.
스윽!
사라졌던 금장생이 모습을 드러낸 곳은 오른편 사내의 뒤였다.
모습이 드러난 순간 금장생의 두 손은 사내의 머리를 그러쥐고 있었다.
왼손으로는 사내의 턱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왼편 관자놀이를 잡았다.
“어쩌면 앞으로 무림에 관심을 가지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직하게 중얼거리면서 양팔을 와락 잡아당겼다.
우두둑!
“커억!”
“외, 왼편이다!”
오른편 사내의 비명과 이호의 외침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왼편 사내는 왼발을 축으로 몸을 회전하면서 검을 횡으로 쓸었다.
만일 금장생이 움직이지 않고 서 있으면 왼편 사내의 검이 향할 곳은 허리였다.
그러나 금장생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그는 구렁이가 담을 넘듯 죽은 사내의 몸을 타고 돌아 왼편 사내의 등 뒤로 갔다.
그 후 동작은 오른편 사내를 없앨 때와 같았다. 턱과 관자놀이를 잡더니 사정없이 당겼다.
뼈가 부러지는 섬뜩한 소리가 흘러나오고 사내의 숨이 끊어졌다.
스윽!
순식간에 두 명을 없앤 금장생의 신형이 허공으로 녹아들어 갔다.
파앗! 파앗! 파앗!
이번에는 삼신회 소속 무인 네 명이 금장생이 숨어 있는 공간으로 몸을 날렸다.
금장생은 이미 사라졌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통로가 너무 좁아 숨을 곳이 거의 없다고 생각한 탓이었다.
조금 전 금장생이 있던 곳에 내려선 네 명은 그물을 던지듯 검을 휘둘렀다.
카카카카! 카카캉!
네 사람이 만들어 낸 검기가 천장과 좌우 벽면을 할퀴었다.
척! 척척! 척!
네 사람은 바닥으로 내려섰다.
슥!
순간 검은 그림자 하나가 네 사람 뒤편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