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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가-221화 (221/524)

황금가 (221)

“지, 지금 집주인이라고 했소?”

무혼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얼마 동안 여기서 살았는지 모르지만 깨어난 후로 줄곧 이곳에만 있었으니까 내 집이 맞네.”

중년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 본 와이번은…….”

무혼은 본 와이번을 가리켰다.

“하도 시끄럽게 해서 묶어 둔 거네. 전사의 성 보물도 지킬 겸해서 말이네.”

사내는 단 위로 시선을 주었다.

그곳에 꽂혀 있던 혼천이 보이지 않았다.

“……실례지만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시오?”

“이곳에서 밤낮이 의미가 있을 거라고 보는가?”

깨어나서 십여 년 정도를 이곳에서 생활했다.

그러다가 지치기도 하고 세상이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해,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하룻밤 자고 난 것 같은데 천이백 년 이상이 지나 있었다.

그 사실을 확인하고 얼마나 절망했는지 모른다.

정신을 차리고는 살 궁리를 했다.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살아 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하지만 쉽지가 않았다. 마음을 줄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는 몇 년 동안 대화조차 나누지 못했다.

사람들 틈바구니 속에서 살며 느낀 고독감은 이곳에 혼자 살 때보다 더 지독했다.

그러다가 견디지 못하고 이곳으로 돌아왔다.

“여기서 아주 오래 살았다는 뜻인 것 같은데, 나이는 모르더라도 이름은 기억하지 않소?”

“혁지광이네.”

“그렇군요.”

무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혁지광이란 이름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하지만 타루 일행은 달랐다.

‘혁지광?’

그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중년 사내의 이름이 귀에 익었다.

―들어 본 적 있는 것 같지 않은가?

타루는 주괴에게 전음을 보냈다.

―분명히 들어 봤는데…….

주괴는 여전히 고개를 갸웃했다.

―천마의 이름이 혁지광이네.

주육승이 말했다.

“맞다, 천마 혁지광!”

타루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중년 사내는 타루를 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날 아는가?”

“맙소사!”

“세상에.”

“마, 말도 안 돼.”

세 사람은 저마다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날 아는가?’라는 말은 본인이 천마 혁지광이란 뜻이다.

세 사람은 멍한 얼굴로 혁지광을 보았다. 너무 충격이 커 말문이 막혀 버린 탓이었다.

“정말 천마가 맞는가?”

일행의 마음을 대변해 준 사람은 무혼이었다.

중원 무인인 타루 일행에게 천마는 엄청난 사람이지만 평생을 샤이칸드리아 대륙에서 보낸 무혼이나 드래곤인 바타르에게는 그리 대단한 자가 아니었다.

천마 혁지광은 무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반공대로 변한 말투 때문이었다.

무혼을 바라보는 혁지광의 눈이 점점 커졌다.

“놀랍군. 그게 어떻게 가능한가?”

그는 대번에 무혼의 영혼이 육체의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보았다.

“정말 천마인 모양이군.”

무혼은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부정하지 않는 건 천마가 맞기 때문일 것이다.

“궁금하네.”

천마는 다시 말했다.

“뭐가 궁금하단 말인가?”

“빙의가 궁금하다는 거네.”

“으음!”

무혼은 신음을 내뱉었다.

크로노마스나 바타르 말고 그가 타인의 육체에 살고 있다는 걸 아는 자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런데 천마는 그 사실을 대번에 알아차렸다.

그건 곧 천마의 능력이 크로노마스나 바타르와 비슷하다는 걸 뜻했다.

무혼은 주먹을 불끈 그러쥐었다.

천마가 크로노마스나 바타르와 비슷한 실력의 소유자란 생각이 들자 투기가 일었다.

그 투기는 곧 폭풍이 돼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응?”

무혼의 몸에서 살기가 폭풍처럼 일어나자 천마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무혼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내 이름은 무혼이다!”

무혼은 버럭 소리치며 오른팔에 힘을 주었다.

차르르!

일 장 길이에 달하는 수라가 풀려나왔다.

“그건 수라修羅?”

천마는 깜짝 놀랐다.

수라는 자신과 함께 무공을 배웠던 수라 남천기의 무기였다.

“수라는 아직 살아 있는가?”

천마는 무혼이 꺼낸 수라를 가만히 바라보며 물었다.

“모른다.”

무혼은 수라를 가슴 앞으로 모았다.

검은색 수라에서 가공할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진득한 살기를 머금은 검붉은 색 광채는 마치 불꽃 같았다.

두 사람을 바라보던 바타르는 마나를 끌어 올렸다.

그러자 그의 양팔 주변으로 칠색 마나가 모여들었다.

곧 그의 입에서 마법 주문이 흘러나왔다.

“나 세상을 조율하는 중간자의 이름으로 명하나니.”

그는 양팔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양팔로 모여들던 칠색 마나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세상을 구성하는 마나여, 나 바타르 크레아스 이골드의 의지를 구현하라. 매직 스페이스.”

스아악!

사방으로 퍼져 나간 마나에서 강한 광채가 흘러나왔다.

“어?”

“여긴”

타루 일행은 깜짝 놀랐다.

자신들이 서 있던 지하 공간이 사라지고 새로운 장소가 나타난 것이다.

하늘에는 태양이 없었지만 어둡진 않았다.

타루는 바타르를 보았다.

“저놈들이 싸우면 그곳은 무너지고 만다.”

“어딘 어떤 곳입니까?”

“내가 만들어 낸 장소다.”

“고, 공간을 만들었단 말씀이십니까?”

타루는 말을 더듬었다.

“나는 드래곤이다, 인간. 우리 드래곤에게 이런 걸 만들어 내는 건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더 쉽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바타르의 전신은 땀으로 흥건하게 젖었다. 새로운 공간 창조 마법이 그만큼 힘들기 때문이었다.

자칫 잘못했으면 역마법에 걸려 소멸될 수도 있었던 위험한 상황이었다.

중원의 마나가 샤이칸드리아 대륙보다 옅고, 본체가 아닌 상태에서 펼친 탓이었다.

그래서 여간해서는 사용하지 않는 용언 마법까지 펼쳤는데 그마저도 쉽지가 않았다.

‘그래도 성공했으니까.’

바타르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어렸다.

사실 공간 창조 마법을 펼친 건 자신의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서였다.

중원으로 와서 일상적인 마법은 무리 없이 펼쳤지만 어디까지가 한계인지를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

사실 마법사가 자신의 한계를 파악하는 건 아주 중요하다.

자신의 능력 이상으로 마법을 펼치다가 역마법에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공간 창조 마법으로 인해 한계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꼭 싸워야 되겠는가?”

무혼을 바라보는 천마의 얼굴엔 곤혹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싸우기 싫은가?”

무혼은 물었다.

“내키지 않네.”

천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을 하고 있군.”

“나는 거짓말할 나이는 지났네. 그리고 거짓말을 해서 얻을 것도 없고.”

“자네 머리는 싸우기 싫어할지 몰라도 몸은 간절히 원하고 있네.”

“나는…….”

“싸우기 싫다면서 내기는 왜 끌어 올리는 건가?”

“내가 내기를…… 헉!”

천마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무혼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머리만 싸움을 거부하고 있을 뿐, 몸은 이미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것도 완벽하게.

심장은 미친 듯이 뛰어 피를 전신으로 쏟아 내고, 단전은 활짝 열려 있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몸은 어느새 바닥에서 반 자가량 떠올라 있었다.

“그래도 부정할 텐가?”

“그렇군.”

천마는 빙긋 웃었다.

비로소 자신의 상태를 알 것 같았다.

그동안 이곳에 처박혀 있었던 건 살아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도 있지만 상대가 없어서였다. 그런데 무혼이란 자를 만나자 몸이 저절로 반응하고 있다.

“내가 먼저 시작하겠네. 타하!”

무혼은 곧바로 공격을 시작했다.

그는 일 초부터 수라도법을 펼쳤다. 수라가 쏟아 낸 붉은 광채가 춤추듯 천마를 향해 밀려갔다.

수라도법의 일 초인 수라멸우修羅滅雨였다.

“호! 수라가 펼치는 것보다 더 강한 수라멸우군.”

천마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그는 과거 수라와 수천 번도 더 싸워 수라도법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무혼이 펼친 수라도법은 수라가 펼치는 것보다 더 강했다.

“얼마가 강해졌는지 한번 볼까?”

천마는 오른손을 펴서 가슴 앞에 댔다.

그리고 두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리고 기마 자세를 취했다.

그 순간 무혼이 펼친 수라멸우의 기운은 이미 바로 앞에까지 도달해 있었다.

“하압!”

그는 기합과 함께 오른손을 천천히 찔러 넣었다.

스아아아아!

그의 손이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수라멸우의 기운이 좌우로 밀려났다.

“저건?”

무혼의 눈이 커졌다.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건 천마의 오른손이 아니었다. 검도 아니고 도도 아닌 어떤 무기가 사위를 완벽하게 장악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만일 펴진 손이 오므라진다면 몸이 터져 버릴 게 분명했다.

“크아!”

무혼의 입에서 광포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차앙!

수라가 하늘을 향해 일직선으로 솟구쳤다.

무혼은 그 상태에서 강하게 내리그었다.

공간을 자르는 그것은 수라도법의 이 초인 수라폭우修羅暴雨였다.

단순히 내리긋는 동작이었지만 결과는 엄청났다. 붉은 유성 수백 개가 천마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차하!”

천마는 앞으로 내밀었던 오른팔을 거둬들이고는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듯 양팔을 위로 밀어 올렸다.

이번에도 역시 밀어 올리는 속도는 느렸다.

픽! 픽픽픽! 픽픽픽!

양팔 주변으로 형성된 역장으로 인해 붉은 유성들이 터져 나갔다.

하지만 붉은 유성의 수는 엄청나게 많았다.

“크아아아!”

우렁찬 기합과 함께 천마의 양팔이 쭉 펴졌다.

콰앙! 콰콰콰쾅! 쾅쾅!

수백 개의 화탄이 동시에 폭발한 것 같은 엄청난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스아아악! 휘이이익!

두 거력이 부딪친 충격파는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크으!”

“으윽!”

“윽!”

타루 일행은 전 내공을 끌어 올려 몸을 보호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주우욱! 주우욱! 주우욱!

세 사람은 기마 자세를 한 채로 뒤로 밀렸다.

세 사람이 밀려난 곳에는 깊은 고랑이 생겨났다.

“컥!”

“큭!”

“윽!”

이십여 장이나 밀려난 세 사람은 한쪽 무릎을 꿇고 피를 토했다.

“맙소사, 우리가…….”

타루는 경악했다.

자신들은 실전십패라 불리는 절대 고수들 중 세 명이다. 그런데 직접 부딪쳐 싸운 것도 아니고 두 사람의 무공이 충돌하면서 생겨난 반발력에 의해 내상을 입고 만 것이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저들은…….”

타루는 얼른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에 무혼과 천마 사이의 거리는 삼 장이었는데 지금은 이십 장 이상 멀어져 있었다.

무혼 앞에는 밭고랑처럼 깊은 자국이 나 있었다.

무혼은 무릎은 꿇지 않았지만 거의 엎드린 상태나 다름없었다. 왼팔로는 땅을 짚고 수라를 쥔 오른팔은 하늘을 향해 쫙 펴져 있었다.

천마를 바라보는 무혼의 입가로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런 그의 입 옆에는 수라가 힘을 잃고 늘어져 있었다.

타루의 시선이 이번에는 천마에게로 향했다.

천마는 양팔로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것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무혼처럼 물러나진 않았지만, 그의 몸은 허리까지 파고들어 가 있었다.

무혼보다는 덜했지만 그의 입가에서도 피가 흘러내렸다.

“하하하!”

천마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입가로 흐르는 피 냄새를 맡자, 딱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에 휩싸이면서 저절로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이거였어. 바로 이거였어.’

천마의 얼굴에 어린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죽음이 바로 옆에 있어야 비로소 삶의 소중함이 깨달을 수 있다. 아니, 산다는 건 죽음과 함께해야 더 큰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그동안 무기력했던 거였다.

그는 시선을 들어 무혼을 보았다.

“쿡!”

무혼의 입가에 피식 미소가 지어졌다.

단 이 초 만에 자신이 피를 보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는 내기를 끌어 올렸다.

차앙!

곧, 늘어져 있던 수라가 일직선으로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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