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219)
더욱 황당한 사실은 사내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서 이편을 바라볼 뿐이라는 것이었다.
경악한 자는 무혼뿐만이 아니었다.
‘저놈!’
타루 일행이나 무혼만큼은 아니지만 바타르 또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칠천오백 년을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인간에게 경외감을 느끼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그 확신이 일거에 무너져 버렸다.
가만히 서 있는 인간에게서, 아무리 날갯짓을 해도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산을 본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그는 자기 자신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건 아냐. 이건 아니라고.’
그는 계속해서 고개를 저었다.
“집주인에게 누구냐고 물으면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 건가?”
묵직하고 차분한 목소리가 중년 사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 그게 무슨…….”
무혼은 멍한 얼굴로 중년 사내를 보았다.
* * *
“다시 한 번 살펴라!”
구덩이 위쪽 가장자리에 선 막천후는 아래를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구덩이를 중심으로 반경 오십 장을 샅샅이 훑었는데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자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수색을 하는 중이었다.
“시체는 찾지 못해도 좋다. 신발 한 짝, 살점 하나라도 찾아내라!”
막천후는 다시 소리쳤다.
“억!”
나직한 비명과 함께 구덩이 측면을 살피던 자가 모습을 감췄다.
“어?”
함께 수색을 하던 동료는 깜짝 놀랐다.
“왜 그러느냐?”
막천후가 소리쳤다.
“연길이 갑자기 땅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사내가 대답했다.
“연길이 사라져?”
흠칫 놀란 막천후가 문도가 서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어디로 사라졌다는 거냐?”
문도 앞에 도착한 막천후가 물었다.
“저, 저깁니다.”
문도는 왼편 벽을 가리켰다.
막천후는 문도가 가리킨 곳을 보았다.
그곳은 커다란 나무뿌리가 타원형 형태를 이루며 벽에 박혀 있었다.
막천후는 나무뿌리 위를 보았다.
오래전에 죽은 나무인 듯, 나무둥치는 보이지 않았다. 뿌리 또한 원 모양으로 서 있는 것 말고는 특이할 게 없었다.
“저 안으로 들어갔단 말이냐?”
그는 물었다.
“들어간 게 아니고 빠졌습니다.”
“아무튼!”
“네. 저기로 발을 디뎠는데 쑥 꺼져 버렸습니다.”
“확인해 봐라!”
“알겠습니다.”
문도는 동료가 꺼진 곳으로 갔다. 그리고 나무뿌리로 둘러싸인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손은 쑥 들어갔다.
“어?”
사내는 깜짝 놀란 얼굴로 막천후를 보았다.
“저건?”
막천후의 눈이 커졌다.
그는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둘째 막전만을 보았다.
“‘전사의 성’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막전만은 흥분한 얼굴로 소리쳤다.
‘전사의 성’은 낭인성의 전신이다.
천마, 잠마, 수라를 길러 냈다는 전설을 간직한 ‘전사의 성’은 어느 날 갑자기 꺼지듯 사라졌지만 누구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수백 년 동안 ‘전사의 성’을 찾아 헤맸다. 하지만 흔적조차 찾지 못했다.
그런데 지하로 들어가는 입구를 발견한 것이다.
“들어가 봐야 알겠지만 이곳 죽림에 있을 거라고는 ‘전사의 성’뿐인 건 확실하다.”
막천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할까요?”
막전만은 좌우를 살피며 물었다.
구덩이 안에서 수색 작업을 벌이는 자들은 대부분 낭인성 소속 무인들이고, 낭인들은 구덩이 위쪽에서 이편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들까지 모두 데리고 들어갈 건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시체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했더냐?”
위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막천후와 막전만은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
“오셨군요.”
두 사람의 얼굴에 활짝 미소가 어렸다.
낭인성 성주 막거성이 호위들과 함께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궁금해서 와 봤더니 엄청난 걸 발견했구나.”
두 아들처럼 막거성의 얼굴도 잔뜩 상기돼 있었다.
천마, 잠마, 수라의 유전을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이 친구가 발견한 겁니다.”
막전만은 입구를 발견하고 소리친 자를 가리켰다.
“큰 상을 내려야겠구나.”
“제 부합니다, 아버지.”
“그래, 장하다.”
“감사합니다.”
막전만은 싱긋 웃었다.
‘저 자식이!’
막천후는 막전만을 쏘아보았다.
굳이 누구 부하인지 말할 이유는 없다. 그런데 자신의 부하라는 사실을 강조하여 말한 것이다.
―그런다고 차기 성주 자리가 네게로 갈 거라고 생각하는 건 오산이다. 차기 성주 자리는 내 거다.
막천후는 동생 막전만에게 전음을 보냈다.
―아버지가 셋째라는 사실을 잊으셨습니까? 장남이라고 해서 꼭 성주가 되란 법은 없습니다, 형님.
막전만은 막천후를 흘끔 바라보며 전음을 보냈다.
―내 자리를 넘보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다, 전만. 명심해라.
―차기 성주를 결정하는 건 아버지지 형님이 아닙니다.
“아버지, 어떻게 할까요?”
전음을 보낸 막전만은 막거성을 향해 고개를 약간 숙이면서 물었다.
“놈들의 시체를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고 했느냐?”
“이곳은 물론이고 죽림을 샅샅이 뒤졌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저 안으로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겠구나.”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아버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놈들은 생각보다 강자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만 들어가면 낭인들의 불만이 많을 겁니다.”
“낭인들도 함께 들이잔 말이냐?”
“네.”
막전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천후 네 생각은 어떠냐?”
막거성은 큰아들 막천후를 돌아보며 물었다.
“만일 낭인들이 천마나, 잠마, 수라의 유전을 발견하면 그때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니까 넌 우리 낭인성 문도들만 들어가잔 말이구나.”
“절대삼마의 유전은 천하를 들썩이게 할 보물입니다. 그런 보물을 누군지도 모르는 자들이 가져갈 수 있도록 방치한다는 건…….”
“저 안에 절대삼마의 유전이 있을 거라고 확신하느냐?”
막거성이 물었다.
“그건…….”
막천후는 할 말이 없었다.
절대삼마가 전사의 성에서 무공을 익혔다는 전설만 내려올 뿐 확정적인 증거는 하나도 없다.
따라서 절대삼마의 유전이 있을 거라는 건 후인들의 기대가 반영된 전설일 가능성이 더 높았다.
“한 조직의 수장은 의사 결정을 할 때,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실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막연한 추측을 바탕으로 내린 의사 결정은 불공평할 뿐 아니라 문도들이나 부하들의 불평불만을 초래하게 된다.”
“명심하겠습니다, 아버지.”
막천후는 고개를 숙였다.
“입구를 개방하고, 원하는 자는 모두 들어갈 수 있게 해라.”
막거성은 막전만을 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아버지!”
막전만은 활달하게 소리쳤다. 그리고 문도들에게 나무뿌리 주위를 파라고 지시를 내렸다.
수십 명이 달려들어 장력을 난사했다.
나무뿌리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에 커다란 구덩이가 생겨났다. 잠시 후 지하로 들어가는 입구가 나타났다.
“원하는 사람은 모두 들어가도 좋소. 단, 질서를 지키시오!”
막전만은 크게 소리쳤다.
“와아!”
“우와아!”
주변에 몰려 있던 낭인들은 무기를 들어 올리며 함성을 내질렀다.
“만일 안에서 뭔가를 발견하면 어떻게 합니까?”
낭인들 중 한 명이 물었다.
“그건 발견한 사람이 주인이네.”
막거성이 대답했다.
“와아!”
“우와아아!”
또다시 낭인들은 함성을 내질렀다.
“성주께서 먼저 들어가십시오!”
함성이 잦아들자 낭인들이 소리쳤다.
“알았네.”
막거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는 사내를 보았다.
거친 기운을 풍기는 이 사내는 전왕 직할대인 낭객(狼客)의 대주 혈랑血狼 고야였다.
“따르겠습니다, 전왕.”
시선이 마주치자 고야는 고개를 숙였다.
“가자.”
막거성은 세 아들과 함께 통로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이어 낭객의 대주 고야와 대원들이 들어갔다.
“들어가자!”
막거성 일행이 어둠 속으로 잠기자 다른 자들이 통로 안으로 몸을 날렸다.
“가자!”
“들어가자!”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낭인 수백 명이 통로 안으로 몸을 날렸다.
구덩이 주위에 몰려 있던 자들이 통로 안으로 사라진 건 순식간이었다. 안으로 몸을 날리는 그들의 얼굴은 기연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구덩이 근처에 있던 낭인 모두가 안으로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일부 낭인들은 통로 입구에서 서성이고 있었는데, 그들은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도 모르는 곳을 무작정 들어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신중한 성격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래도 한번 들어가 볼까?”
낭인 중 한 명이 옆에 있던 동료에게 말했다.
“저 안은 살육이 난무하는 전쟁터가 될 텐데 살아 나올 자신 있어?”
“그러게 말이야. 우리 같은 약자는 그냥 여기서 구경이나 하는 게…….”
문득 서늘한 느낌에 사내는 고개를 돌렸다.
“누, 누구요?”
사내의 눈이 커졌다.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구덩이 위에 수백 명이 서서 이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갔더라면 조금은 더 살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깝구나.”
선두에 있던 자가 오른편으로 시선을 주었다.
파앗!
그러자 수십 명이 구덩이 아래로 몸을 날렸다.
창! 창창창! 창창창!
몸을 날려 가는 자들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 들었다.
“적이다!”
낭인들은 질겁하여 각자의 무기를 빼 들었다.
창! 창창창! 창창!
스악! 삭! 스악!
“으악!”
“아악!”
“크아악!”
구덩이 곳곳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구덩이 아래로 몸을 날리는 자들의 무공은 엄청났다. 실전으로 단련된 낭인들이 손도 써 보지 못하고 당하고 말았다.
오십여 명 정도 남아 있는 낭인들은 금세 죽임을 당했다.
척! 척척! 척!
낭인들을 모두 처리한 자들은 지하로 들어가는 입구 앞으로 늘어섰다.
휙! 휙휙!
구덩이 위에 있던 자들이 일제히 몸을 날렸다.
가장 먼저 구덩이 앞으로 온 자는 귀마존을 비롯한 삼신회 소속 무인들이었다.
“저게 뭐라고 생각하는가?”
귀마존은 둥근 모양을 유지하고 있는 나무뿌리를 가리켰다.
그건 낭인성 무인 중 한 명이 빠졌던 그 나무뿌리였다. 원래 자리에서 들어낸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나무뿌리 안쪽에는 흙이 차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디?”
태양마존은 나무뿌리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안쪽의 흙이 있는 부분을 향해 손을 집어넣었다.
그의 손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쑥 들어갔다.
“진식은 아닌 것 같고…….”
태양마존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환영 마법이네.
귀마존은 전음을 보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가?
태양마존 역시 전음으로 물었다.
―마법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네.
―그럼 저긴…….
태양마존은 어둠에 휩싸인 통로로 시선을 주었다.
―‘전란의 시대’때 만들어졌다고 하는 ‘전사의 성’일 거네.
“저…….”
귀마존은 고개를 돌렸다. 부활전사단 단장인 이호가 바로 옆에 서 있었다.
“할 말이라도 있느냐?”
“일호를 봤습니다.”
“일호?”
“천객의 수장이었다가 삼황을 배신하고 떠난 그 일호를 말합니다.”
“정말 그놈을 봤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이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서 봤느냐?”
“무혼 그자와 일행이었습니다.”
“그럼 그 강신술사가?”
“네.”
이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혼 그놈을 잡으러 왔다가 뜻밖의 횡재를 했구나.”
귀마존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진득한 살기가 온 얼굴에 퍼져 있는 죽음의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