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218)
“더 오면 죽어!”
무혼은 본 와이번들을 보며 소리쳤다.
하지만 본 와이번들은 무혼의 말을 듣지 않았다. 더 흉포한 기세를 흘리며 달려들었다.
“아무튼 머리 나쁜 것들은…….”
무혼은 그레이훼일을 뽑아 들었다.
“타하!”
무혼의 신형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와이번 머리 높이까지 솟구친 그는 그레이훼일을 도끼질하듯 휘둘렀다.
슈캉! 캉캉캉! 카카카! 카카카!
본 와이번의 정수리로 파고든 그레이훼일은 목과 몸통을 수직으로 자르며 아래로 내려왔다.
쩌억!
거대한 본 와이번이 정확하게 이등분되었다.
쿠웅!
잘려 나간 몸통이 좌우로 쓰러졌다.
“타하!”
무혼의 신형이 이번엔 왼편으로 이동했다.
곧 허공에 붉은 광채가 피어나고, 본 와이번 머리 두 개가 둥실 떠올랐다.
“차앗!”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지기도 전에 무혼은 반대편으로 이동하여 그레이훼일을 휘둘렀다. 공격이 끝나자 모두 세 마리가 쓰러졌다.
무혼의 신형이 다시 이동했다. 그리고 잠시 후 남은 네 마리도 모두 쓰러졌다.
“생각보다 약하네.”
무혼과 본 와이번이 싸우는 걸 지켜보던 타루가 말했다.
“네가 한번 싸워 볼 테냐?”
바타르가 웃으며 말했다.
“다 죽었는데 제가 어떻게…….”
파앗!
바로 그때 본 와이번의 몸통에서 푸른 광채가 솟구쳤다.
푸른 광채가 쏟아져 나온 곳은 무혼의 그레이훼일에 잘려 나간 단면이었다. 광채는 점점 짙어지더니 이내 하나로 합쳐졌다.
스윽!
“헉!”
“나무 관세음보살!”
“맙소사!”
타루 일행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완전히 죽은 줄 알았던 뼈가 푸른색 광채를 뿜어내면서 서로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 거였다.
“사, 살아나는 겁니까?”
타루는 바타르를 보며 물었다.
“마법적인 힘이 실린 검으로 잘라 내서 저 정도지, 너희 무기로 잘랐으면 바로 살아났을 거다.”
바타르가 말했다.
“세상에, 귀신도 아니고 저건…….”
타루는 여전히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너희가 본 와이번을 막아야 할 것 같은데?”
“왜……?”
타루는 바타르를 보았다.
“저 녀석에게 시간을 벌어 줘야 할 것 아니냐.”
바타르는 단 앞으로 가는 무혼을 가리켰다.
“알았습니다.”
세 사람은 본 와이번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사이 무혼은 단 위로 올라갔다.
자세히 보니 단에 꽂힌 건 검劍이 아니라 도刀였다. 하지만 도 폭은 상당히 넓었다.
도 면은 붉은색이었는데, 크로스 가드 바로 위에 검은색으로 ‘혼천’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무혼은 도 손잡이를 잡았다. 손잡이는 오랫동안 잡은 것처럼 손에 착 감겼다.
천천히 그러쥔 무혼은 내공을 주입하면서 잡아당겼다.
“얼레?”
곧 무혼의 눈이 커졌다.
내공을 오 성 정도 주입했는데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번엔 좀 더 내공을 올렸다. 하지만 여전히 뽑히지 않았다.
‘해보자 이거지.’
무혼은 혼천에 전 내공을 주입했다.
그렇게 반 각 정도 흘렀을까?
우웅!
갑자기 혼천에서 도명과 함께 붉은 광채가 폭사되었다.
스르릉!
그리고 천천히 뽑혀 나왔다.
“그레이훼일과 같은 크기네.”
무혼은 싱긋 웃었다.
혼천의 길이는 여섯 자로, 그레이훼일과 길이가 같았다. 180센티미터면 어지간한 사내보다 더 크고 부담스러운 무기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끌렸다.
“이러다가 그레이훼일을 쓰지 않게 될지도 모르겠네.”
철컥!
바로 그때 단에서 나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무혼은 고개를 숙였다.
단 아래쪽에 직사각형 모양으로 선이 생겨나 있었다. 마치 서랍 같았다.
그는 선 안쪽에 손바닥을 대고 허공섭물을 펼치면서 잡아당겼다.
예상대로 그것은 서랍이었다. 서랍 안에는 양피지 책 두 권과 검은 상자 하나가 들어 있었다.
그는 책과 상자를 꺼내 품속으로 집어넣었다.
“주, 주공!”
바로 그때 뒤편에서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무혼은 고개를 돌렸다.
타루 일행이 본 와이번을 막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었다.
“그까짓 와이번 하나 없애지 못하면 내 부하 될 자격이 없어.”
무혼은 피식 웃고는 단에 기대앉았다.
그리고 조금 전 집어넣었던 ,양피지로 만들어진 책 한 권을 꺼냈다.
십만마도법十萬魔刀法
책 표지에 적힌 글이었다. 굳이 안쪽을 보지 않아도 무공 비급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무혼은 다음 장을 넘겼다.
그의 예상대로 혼천이란 이름의 도刀로 펼치는 무공이었다. 깨알 같은 글씨로 도법에 대한 설명이 적혀 있었다.
무혼은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초식은 풍風, 우雨, 화火, 빙氷, 폭暴, 강强, 패覇, 뇌雷, 만滿, 허虛, 우宇, 무無의 열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대단하네.”
감탄사가 절로 흘러나왔다.
자신이 익힌 무공도 약한 무공은 아니었다. 특히 수라도법은 아직 적수를 만나지 못할 정도로 강했다.
그런데 십만마도법은 수라도법보다 한 단계 위라는 느낌을 받았다.
이해할 수 있는 건 일곱 번째 초식인 패覇까지였다. 여덟 번째 초식인 뇌雷부터는 너무 어려워 어떻게 펼쳐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무공이 있을 수 있는지, 그저 놀라웠다.
“하늘 밖에 하늘이라더니. 그동안 난 우물 안 개구리였네.”
무혼은 씁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는 천천히 책장을 넘겼다.
무공에 대한 건 총 열두 장이었다.
초식 하나를 설명하는 데 한 장을 할애하였고, 글자 수는 일천 자가 넘었다.
지금 당장은 모두 읽는 것도 힘들었다.
천천히 익히기로 하고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이건…….”
무혼의 눈이 커졌다.
마지막 두 장에는 십만마도법을 남긴 자가 쓴 글이 적혀 있었다.
방문자들과의 전쟁이 시작된 지 어느덧 삼백 년이 지났다.
수만 명이 죽었다. 대를 이어 가며 하는 이 전쟁이 언제 끝날지는 알 수가 없다.
어느 진영도 승기를 잡지 못한 상황이 이어졌다.
전쟁에 지친 어떤 이들은 휴전을 하는 게 어떻겠냐고 말하지만, 나는 절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휴전은 우리를 다시 노예로 만들 뿐이다.
내 자식을 노예로 만들 생각은 절대 없다. 놈들을 그들의 나라로 쫓아낼 때까지 전쟁은 계속돼야 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패했을 때를 대비하여 훗날을 도모하는 나 자신이 슬프기도 하다.
이제 나는 내 무공을 정리한 후 이곳을 떠날 것이다.
내가 후대에 남길 무공은 십만마도법이다.
십만마도법이 창안된 건 삼백 년 전이다.
십만마도법의 원래 이름은 파라구천도법이었다.
삼백 년 전 파라구천도법을 창안한 내 선조는 그것을 각 가문으로 보냈다. 더 강한 무공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예상대로 파라구천도법은 각 가문을 돌면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였다.
여섯 개였던 초식은 열두 개로 늘었고, 세상의 이치가 초식 안에 남겼다.
파라구천도법이 우리 가문으로 돌아온 건 백 년 후였다.
우리는 그 도법을 전쟁터로 들고 나가 다시 정리했다. 초식 위주의 도법을 실전 무공으로 바꾸기 위해서였다.
적을 많이 죽일수록 도법은 더욱 잔인하고 강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적 십만 명의 목을 잘랐다.
그때부터 우린 가문은 이 파라구천도법을 십만마도법이라 명명했다.
나는 감히 장담한다.
실전도법으로 십만마도법보다 더 뛰어난 도법은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나오지 않을 거라는 걸.
십만마도법을 펼치는 데 가장 중요한 건 혼천이다.
원래 혼천은 그들이 만들었다. 그들은 악마수를 비롯하여 총 열 가지 무기를 만들었고, 혼천은 그 무기들 중 하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 노예들에게 쥐여 주었던 무기를 회수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끝내 악마수, 적부, 혼천은 회수하지 못했다.
내가 싸우러 가면서 혼천을 놓고 가는 건 이번 싸움이 마지막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패하면 누군가가 다시 이곳으로 와서 십만마도법을 익히고 적과 싸우게 될 것이다.
후예여, 그대는 알 것이다.
그대의 싸움이 마지막인지 아닌지를, 그대는 알고 있을 것이다.
마지막이라면 혼천을 들고 가라. 하지만 마지막이 아니라면 혼천을 이곳에 두고 가라.
그리고 역천마왕패력을 함께 남긴다.
검은 상자 안에 있는 블랙 드래곤 하트를 복용하고 역천마왕패력을 익히면 후예는 혼천오대천력의 하나인 역천패력逆天覇力을 얻게 될 것이다.
블랙 드래곤 하트 역시 마지막 싸움 전에 복용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노예 상태를 벗어날 수가 있다.
후예여.
제자를 길러라.
방문자보다 더 뛰어난 자들을 찾아 우리가 배웠던 모든 걸 전해라.
아니, 우리가 가진 모든 걸 세상에 뿌려 중원인 모두를 전사로 만들어라.
그렇게 하면 설사 우리가 실패한다고 해도 기꺼이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다.
팔왕지존 묵광
“아이러니네.”
무혼은 피식 웃었다.
어떻게 보면 샤이칸드리아 대륙에서 건너온 자신은 방문자들의 후예나 다름없다. 그런 자신에게 방문자들과 전쟁을 치렀던 이들의 비전이 이어진 것이다.
묘한 인연이란 생각이 들었다.
“완벽하게 익혀서 당신의 뜻을 잇도록 하겠소.”
무혼은 단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커억!”
막 몸을 일으키려는데 주괴가 비명을 내지르며 무혼 앞으로 굴러왔다.
“못 이겨?”
무혼은 주괴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저것들은 죽여도 죽여도 다시 살아납니다. 지금까지 목을 자른 것만 해도 열 번이 넘습니다.”
주괴는 한숨을 폭 내쉬며 말했다.
“여기서 좀 쉬어.”
“저놈들이 오지 못하게 하려면 준비를 해야…….”
“저놈들은 못 와.”
무혼은 주괴의 말을 잘랐다.
“네?”
“저 녀석들은 여기까지 올 수 없다고.”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저희가 지금까지 저 녀석들과 싸운 건 주공을 방해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는데요?”
“날 위해서 싸웠다는 말?”
“바타르 님께서 주공이 검을 뽑을 시간을 벌어 주라고 하셔서…….”
“본래 드래곤은 거짓말을 못 하는데 저 자식만 예외야.”
무혼은 바타르를 가리켰다.
“예외라는 건?”
“천장에 박힌 쇠사슬의 길이가 여기까지 미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거짓말을 했다는 거지 뭐겠냐?”
“끙!”
주괴는 천장을 보았다.
무혼의 말처럼 쇠사슬 끝은 천장에 박혀 있고 본 와이번들은 단이 있는 곳까지 오지 못했다.
“그래도 좋은 경험 했잖아.”
무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긴 합니다만. 그런데 저것들은 누가 여기에 묶어 놓은 겁니까?”
주괴는 본 와이번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건 나도 몰라.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단에 혼천을 꽂아 놓은 사람은 절대 아니라는 거야.”
“그 사람이 누군데요?”
“자기 입으로 팔왕지존 묵광이라고 하던데, 들어 본 적 있어?”
“아닙니다. 처음 듣습니다.”
주괴는 고개를 저었다.
“혹시 당신은 알아?”
무혼은 왼편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의 시선 끝에는 오십 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사내가 서 있었다.
사내가 입고 있는 옷은 고대 전포였다.
‘응?’
주괴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그는 계속 무혼 옆에 서 있었다. 그리고 맹세컨대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마치 유령처럼 중년인이 서 있는 거였다.
중년 사내와 주괴의 시선이 마주쳤다.
“헉!”
주괴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중년 사내와 시선이 부딪친 순간 바닥이 보이지 않는 구덩이로 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건 마, 말도 안 돼.’
그는 부정하듯 고개를 힘껏 저었다.
그런데 고개를 젓는 사람은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주괴보다 먼저 중년인과 시선이 마주쳤던 무혼 역시 믿기지 않는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어떻게…….’
그는 멍한 얼굴로 중년인을 보았다.
드래곤 앞에서도 이렇게 위축된 적이 없었다. 그런데 평범해 보이는 중원인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것 같은 기분을 맛본 것이다.
마치 엄청난 높이의 절벽 바로 앞에 홀로 서 있는 것 같았다.
“누, 누구요?”
제국의 황제를 지냈고 삼천 년 만에 부활한 무혼이 자신도 모르게 존댓말을 했다.
그만큼 사내가 주는 위화감은 엄청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