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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가-213화 (213/524)

황금가 (213)

족히 천여 명이 함께 식사를 해도 될 정도로 대전은 컸다.

이렇게 큰 대전이면, 넓은 공간이 주는 황량함을 덜기 위해 가구를 놓거나 장식 등을 벽에 걸기 마련인데 이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거무튀튀한 벽에 걸려 있는 건 횃불이 전부고, 가구라고 할 수 있는 건 대전 한가운데 있는 단이 전부였다.

단은 가로와 세로가 각각 일 장으로 정방형이었다. 그 단 위에는 뭔가가 천에 덮인 채 놓여 있었다.

그 앞에는 작달막한 키에 돌처럼 단단해 보이는 몸을 가진 중년 사내가 서 있었다.

사내 얼굴에서 가장 멋지게 보이는 건 귀밑머리와 턱수염을 이어 주는 구레나룻이었다. 콧수염도 길렀는데, 거뭇한 표시만 날 정도로 짧았다.

주먹을 움켜쥔 채 단을 바라보며 장승처럼 서 있는 이 사내는 낭인성의 성주이자 전가의 수장인 전왕戰王 막거성이었다.

한참을 서 있던 막거성은 천을 걷었다.

천 아래쪽에는 시체 네 구가 있었다.

네 구 중 한 구는 바로 막거성의 넷째 아들 막사웅이었다.

그리고 막사웅 옆에 있는 세 명은 객잔에 함께 나타났던 자들이었다.

“아들아!”

막거성은 막사웅의 볼을 쓰다듬었다.

아직 다섯째 시후를 살해한 자도 찾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넷째 아들 사웅이 죽임을 당한 것이다.

“아버지!”

“아버지.”

세 명이 막거성을 부르며 안으로 뛰어들어 왔다.

삼십 대 중초반으로 보이는 이들은 막거성의 세 아들이었다.

막거성을 빼박은 것처럼 닮았지만 키가 가장 작은 사내는 첫째 투랑객鬪狼客 막천후고, 산적을 연상케 할 정도로 우락부락하게 생긴 사내는 둘째 철랑객鐵狼客 막전만, 그리고 키가 제일 크고 아버지와는 다르게 유약하게 생긴 사내는 셋째 풍랑혈객風狼血客 막철군이었다.

세 형제는 바로 단 앞으로 왔다.

그리고 막거성을 안아 일으켰다.

“나는 괜찮다.”

막거성은 큰아들의 손을 뿌리쳤다.

막천후는 한편으로 물러났다.

막거성은 몸을 돌려 세 아들을 보았다.

그의 시선이 셋째 막철군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물었다.

“놈들은 지금 어디 있느냐?”

“낭인벌에 있습니다.”

막철군이 대답했다.

“대낭인살진大浪人殺陣은?”

“낭인령을 발동하자 바로 모든 낭인들이 출병하였고, 대낭인살진 구축이 마무리됐습니다.”

“낭인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지는 않았겠지?”

“현상금을 백만 냥으로 올렸습니다.”

“낭인들이 잘해 줄 거라 생각하느냐?”

“대낭인살진의 가장 큰 특징은 공격하지 않으면 자신들이 당한다는 겁니다. 그들은 공격할 수밖에 없습니다.”

막철군은 자신 있게 말했다.

“얼마나 걸릴 걸로 보느냐?”

“아무리 적게 잡아도 이틀은 걸릴 겁니다.”

“반드시 놈들의 머리를 가져와야 한다.”

“그런데…….”

“왜 그러느냐?”

“삼패가 그자들에게 붙었습니다.”

“삼패가 왜?”

막거성의 눈이 커졌다.

“그건 모르겠습니다. 무혼이란 자와 이야기를 나누더니 곧 함께 행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는 사이 같더냐?”

“제가 보기엔 오늘 처음 만난 사이였습니다.”

“그런데도 놈을 따라갔단 말이냐?”

“네. 어떻게 할까요?”

“아깝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무혼 그놈과 함께 처리해라.”

“알겠습니다, 아버지.”

“시후를 살해한 놈은 어떻게 됐느냐?”

막거성은 아들의 시체로 시선을 주며 물었다.

“그동안 계속 알아본 결과. 신강 흑지 무인들은 월아천 근처로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하면?”

“막내를 살해할 수 있었던 자는 함께 작전을 펼쳤던 동료들과, 그들이 쫓고 있던 강신술사와 태월령뿐입니다. 그들 중에서 동료를 제외하면 강신술사와 태월령이 남습니다.”

“강신술사는 어떤 자인지 알아보았느냐?”

“평범한 자였습니다.”

“그런 자가 팔왕가 유망주들의 추격을 뿌리치고 강시 운반에 성공했다는 거냐?”

“그자 옆에는 태월령과 신강 흑지 무인이 있었습니다.”

“그들 덕분에 성공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파악한 바로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건 태월령 그 계집을 잡아 오는 거구나.”

“그렇긴 한데, 신중해야 합니다.”

“그 계집이 태천야의 딸이란 말이냐?”

“그렇습니다.”

“태천야는 신강에 있다고 하더냐?”

“아닙니다. 그자도 신강을 떠나 중원으로 들어와 있습니다.”

“중원으로 들어온 이유는?”

“흑지의 지존신물을 도둑맞았다고 합니다.”

“그걸 찾기 위해 중원으로 들어왔다고 하더냐?”

“현재까진 그렇습니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상관없다. 흑지 지존 아니라 그보다 더한 자라고 해도 내 아들의 원수를 갚는 걸 막지 못한다. 그 계집을 찾아서 잡아 와라.”

“알겠습니다, 아버지.”

“혼자 있고 싶구나.”

“물러가겠습니다, 아버지.”

세 형제는 고개를 숙이고 대전에서 나갔다.

“사웅아!”

막거성은 다시 막사웅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 * *

“낭인들이 이곳으로 모여들 수밖에 없었던 전설이 뭔데?”

무혼은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비단 무혼뿐만이 아니었다. 금장생 역시 궁금증이 가득한 얼굴로 타루를 보았다.

“그건 바로 천마, 수라, 잠마에 관한 전설입니다.”

“절대삼마?”

금장생이 나직하게 소리쳤다.

강호무림은 마의 조종이라고 부르는 천마天魔와, 천마와 동시대를 살았던 수라修羅와 잠마潛魔 세 사람을 합쳐 절대삼마라고 불렀다.

“네, 그들에 대한 전설입니다.”

타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이곳 출신이야?”

무혼이 물었다.

“네.”

타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 다 낭인성 출신은 아닐 테고, 셋 중 누가 낭인성 출신이지?”

“낭인성 출신이 아니라, 세 사람이 모두 이곳에서 무공을 배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동문이란 말이지?”

“네.”

“허!”

무혼의 입이 벌어졌다.

중원무림에 수많은 강자가 나타났지만 모든 무인이 다 알고 있는 자는 손가락으로 꼽는다. 하지만 천마, 잠마, 수라는 무공을 모르는 일반인도 안다.

즉, 정사마를 떠나 중원무림에 나타난 무인들 중 가장 위대한 무인이란 뜻이다.

그런 자들이 같은 곳에서 무공을 배웠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들을 누가 가르친 거지?”

무혼은 물었다.

“스승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습니다. 다만 여덟 명이 돌아가면서 가르쳤고, 세 사람은 여덟 명의 무공을 솜처럼 빨아들여 결국엔 스승들을 넘어섰다고 합니다.”

“그럼 낭인들이 이곳으로 모여든 건 절대삼마가 남겼을지도 모르는 뭔가를 얻기 위해선가?”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다른 게 더 있어?”

“셋 중 천마는 이곳으로 다시 돌아왔다고 합니다.”

“돌아왔다는 건, 여기에 천마의 무덤이 있다는 뜻이야?”

“네.”

타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

무혼은 멍한 얼굴로 타루를 보았다.

무림에 대해 알기도 전에 죽임을 당해 샤이칸드리아 대륙으로 넘어갔지만 천마가 어떤 사람인지는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천마는 그만큼 대단한 자였다.

“하지만 누군가 퍼뜨린 잘못된 전설일 뿐이라는 게 밝혀졌습니다.”

“아무도 천마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는 거냐?”

무혼은 물었다.

“네. 하지만 절대삼마에 대한 전설은 여전히 많은 무인들을 이곳으로 끌어들이는 강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 아무튼 죽림을 통과해야 본성으로 갈 수 있다는 거지?”

“네.”

“들어가자.”

일행은 죽림 안으로 들어갔다.

죽림 안쪽에는 마차 한 대가 지나갈 정도로 넓은 길이 나 있었다. 길은 대나무 잎으로 덮여 푹신푹신했다.

“크네.”

금장생은 고개를 들었다.

대나무의 두께는 어른 종아리만 하고 키는 십 장이 넘었다. 사방으로 뻗은 가지로 인해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지형 때문인 듯, 길은 구불구불 나 있었다.

일각 정도 걷자 널따란 공터가 나왔다.

슉! 슉슉슉! 슉슉슉! 슉슉슉!

일행이 공터 한가운데까지 갔을 때 사방에서 화살이 날아왔다.

“차앗!”

“타하!”

“하아!”

일행이 팔을 휘둘렀다.

화살을 쳐 낸 타루와 주괴, 주육승은 삼각형 진형을 구축했다.

“응?”

타루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왜?”

무혼은 타루를 보았다.

“심상치 않습니다.”

타루가 대답했다.

“뭐가 심상치 않다는 거지?”

“세 분의 머리에 걸린 건 돈 일천 냥과 전비고 입실입니다. 물론 천 냥이 작은 돈이 아니고 전비고로 들어가는 게 낭인들의 오랜 바람이라고 하지만, 수백 명이 나설 정도로 큰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곳 죽림에는 수백 명이 은신해 있습니다.”

“수백 명이 아니다, 타루.”

무혼이 말했다.

“그럼?”

“수천 명이다.”

“정말입니까?”

타루가 물었다.

“그렇다.”

“그럼…… 맙소사, 대낭인살진?”

타루는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대낭인살진이 뭐지?”

무혼은 다시 물었다.

“낭인성에 있는 낭인 대부분이 참여하는 살인진입니다.”

타루가 대답했다.

“수천 명의 낭인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서 진식을 구축한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무혼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샤이칸드리아 대륙의 용병이나 이곳의 낭인은 같은 족속들이다.

그들의 주된 특징은 규정이나 규율을 싫어하고, 돈이 아니면 부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특성 때문에 절대적인 복종이 요구되는 작전에서는 용병을 거의 쓰지 않는다. 물론 용병대 대장이 있고 그가 부하들을 완벽하게 장악한 경우는 다르다.

따라서 용병을 가장 효율적으로 써먹을 수 있는 경우는 난전뿐이다.

그런데 용병과 다를 바 없는 낭인들을 이용해서 진식을 구축했단다.

그가 아는 한 진식은 철저하게 명령받은 대로 해야만 하는, 절제가 필요한 공격 방법이다.

그런 공격을 낭인들을 시켜 한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대낭인살진은 가능합니다.”

“왜?”

“공격 진식이면서 방어 진식이기 때문입니다.”

“낭인성을 보호하기 위한 진식이란 말?”

“낭인성이 아니라 용병들 자신입니다.”

“낭인성이 없어지면 자신들의 터전도 없어지기 때문에 낭인들도 참여할 수밖에 없다는 거냐?”

“네.”

“낭인성을 방어하기 위한 진식이라면 이곳의 존립을 위태롭게 할 적이 침공한 경우에나 펼쳐야 하는데, 우리가 그런 적이라고 생각해?”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저도 의아하긴 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낭인성 수뇌, 즉 성주가 대낭인살진을 펼치려고 결심하면 가능하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네 말을 종합하면 성주가 낭인들을 조종할 수 있다는 건데, 어떻게 하는 거지?”

“낭인들은 겉보기에 혼자 움직이는 것 같지만 크고 작은 소모임에 가입돼 있습니다. 그런 모임에는 주도하는 자들이 한 명씩 있는데, 그들은 대부분 낭인성 소속 무인들입니다.”

“낭인성 성주가 부하들을 낭인들 틈바구니 속에 집어넣었다는 거네?”

“수백 년 전부터 그렇게 해서 낭인들을 조종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린 낭인성에서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성주의 아들과 시비가 있기는 했지만 녀석들은 곧바로 물러갔다. 단지 자기 아들과 투덕투덕했다고 낭인성 전부를 동원해서 없애려 한다는 건 너무 심한 거 아냐?”

막사웅이 죽었다는 걸 꿈에도 모르는 무혼으로서는 당연한 생각이었다.

“전왕께 연락도 하지 않고 방문한 건가요?”

듣고 있던 금장생이 물었다.

“나 그렇게 몰상식한 사람 아냐.”

“그런데 막사웅 그 사람이 왜 우리에게 시비를 건 거죠?”

“젊은 혈기지 뭐겠냐?”

“혈기라고요?”

“막사웅 그 녀석은 전왕에게 내가 온다는 말을 들었을 거야.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을 테고, 이제 서른도 안 된 녀석이 해왕이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겠지.”

“질투를 한 거군요.”

“맞아. 배가 아팠던 거야. 그래서 우리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객잔으로 들어오자 의도적으로 시비를 걸었어.”

“도대체 얼마나 강한 자이기에 해왕이 됐는지 확인하고 싶었다는 건가요?”

“그랬겠지.”

무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전왕은 자기 아들이 해왕에게 무례하게 굴 거라는 걸 몰랐을까요?”

“알았을 거야.”

“그런데 왜…….”

“왜 가만뒀냐고?”

“네.”

“첫째는 그도 내 실력이 궁금했던 거고, 둘째는 정말로 해왕의 자격이 있다면 자기 아들은 하늘 높은 줄 알게 될 테니까.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지.”

“현상금 천 냥과 전비고 입실 권리를 건 자는 막사웅이겠군요.”

“그럴 거야.”

“그렇다면 지금 이 진식은…….”

“그건 전왕에게 직접 물어봐야 할 것 같다.”

무혼은 전면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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