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212)
“수라가 어디서 났느냐고 물었다.”
이번엔 타루가 물었다.
“이거 아버지 유품이야.”
“네 아버지는 누구냐?”
타루는 다시 물었다.
“철무황이라고 들었다.”
“처, 철무황이라고?”
세 사람의 눈이 커졌다.
그들이 아는 철무황은 삼백 년 전 사람이다. 그리고 그의 무기가 바로 수라다.
그런데 새파랗게 젊은 녀석이, 아버지가 철무황이라고 한다.
“응.”
“삼백 년 전에도 철무황이란 이름을 쓰신 분이 있었다는 걸 아느냐?”
이번엔 괴승 주괴가 물었다.
“마존이라고 불렸던 그분이 내 아버지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왜 말이 안 된다는 거냐?”
“그분은 삼백 년 전 분이다. 그런데 너는…….”
“이 세상은 너희가 아는 게 전부가 아니다. 그분이 사생아였던 내게 남긴 건 수라뿐이고, 삼백 년이 지났지만 나는 귀마존, 빙마존, 태양마존에게 협공을 당해 죽었던 철무혼이 맞다. 그 당시 내가 놈들을 모두 없앨 수 있었던 이유는 마령단 열 개를 모두 복용했을 뿐 아니라 야수혈마의 혈랑도법과 빙마존의 빙극천월강, 태양마존의 이화태양강 그리고 풍마존의 선풍마강을 그들의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높은 경지까지 익혔기 때문이다. 물론 그 자리에서 나도 죽었다. 하지만 영혼은 저승으로 가지 않았다.”
“헐!”
“어?”
“그건…….”
타루 일행의 입이 동시에 쩍 벌어졌다.
마존 철무황의 사생아인 철무혼이 귀마존, 빙마존, 태양마존에게 당한 건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신들 또한 정황만 알 뿐 실제 내용은 모른다.
그런데 철무황의 아들이란 자는 삼백 년 전 내막을 바로 옆에서 본 사람처럼 상세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증거는, 수라도법을 찾아내서 완벽하게 익혔다는 거다. 자, 이제 내가 묻겠다. 내 아버지 철무황을 알고 있는 너희는 누구냐?”
무혼은 세 사람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우, 우리 선조가 마맹의 수뇌였습니다.”
타루는 존대를 했다.
“수뇌면 어떤 직위를 말하는 거냐?”
무혼은 물었다.
“당시 마맹은 가장 위에 마존과 구마가 있었고 그 아래로 천인이라 부르는 조직이 있었습니다.”
“천인?”
무혼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습니다. 제 선조는 마천인의 수장이었고, 주괴의 선조는 상천인, 주육승의 선조는 중천인의 수장이었습니다.”
―야!
무혼은 바타르에게 전음을 보냈다.
―냄새가 난다는 거냐?
바타르가 물었다.
―마천인, 상천인, 중천인은 아무나 아는 그런 명칭이 아냐. 넘어온 놈이 아니면 절대 쓸 수 없어.
―마맹을 세운 자들이 방문자의 후예라고 생각하는 거냐?
―그럴 가능성이 아주 커.
―그 역시 삼백 년이 지났다.
―만일 그들이 벽에 똥칠할 때까지 오래 사는 종족이라면 삼백 년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그럴 수도 있겠네.
바타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기를 거둔 이유가 삼백 년 전 인연 때문이야?”
“우리 선조는 마존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구마에게 암살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마맹을 떠났습니다. 그러다 마존께서 혈육을 남기셨다는 사실을 알았고, 백방으로 찾으러 다녔습니다.”
“곤리에도 갔어?”
“그랬다고 들었습니다.”
타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얼굴엔 놀람의 빛이 가득했다.
사실 그는 무혼에게 존댓말을 쓰고는 있지만 마존 철무황의 사생아라는 걸 믿지 않았다.
마존의 아들이라면 삼백 살이 훨씬 넘어야 하는데 앞에 있는 자는 아무리 좋게 봐준다고 해도 서른 살 내외다. 게다가 인간이 삼백 살 넘게 산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진짜 마존 철무황의 아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확실한 증거가 바로 곤리다.
마존의 사생아가 귀마존 일행에게 죽었다는 건 알고 있는 이들이 있을 수 있지만, 무혼의 고향이 곤리라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은 자신들 셋 말고는 아무도 없다.
그런데 마존의 친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젊은 청년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상세한 것까지 알고 있었다.
“그럼 내가 거기서 고래를 잡았다는 것도 들었겠네?”
“들었습니다.”
“이것과 비슷한 도를 사용했는데, 봤어?”
무혼은 등에 걸고 있던 그레이훼일을 뽑았다.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와 곤리에서 살았던 이야기를 해 주었다.
“정말 그분이군요.”
“나는 그런 걸로 거짓말 안 해. 그리고 내게 무슨 이익이 있다고 거짓말을 하겠냐?”
“하지만 삼백 살이 넘었다는 건…….”
“그건 차차 알게 될 거야. 그만 가자.”
“네?”
타루 일행의 눈이 커졌다.
“앞장서란 말 못 들었어?”
“우리는…….”
“계속 그렇게 살다 죽고 싶어?”
“네?”
“불러 주는 사람도 없고 알아봐 주는 사람도 없는 이런 거지 같은 곳에서 세월을 보내다가 병든 개처럼 죽고 싶은 거냐고.”
“그건 절대 아닙니다.”
“아닙니다.”
“저흰 아직 팔팔합니다.”
세 사람은 고개를 강하게 저었다.
“그럼 따라와. 너희에게 부귀공명은 주지 못해도, 적어도 혼자 죽진 않게 해 줄 수 있어. 죽을 때가 다 된 노인들에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있을 거라고 생각해?”
“아, 아닙니다. 주공 말이 맞습니다. 우리가 셋이 모여 살고 있는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죽을 때 옆에 있어 주려고요.”
괴승 주괴가 말했다.
“그러다가 한 사람이 먼저 죽고 두 번째 친구가 죽을 땐 함께 죽으면 된다고 생각했겠지?”
무혼은 주괴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아무튼 니들 셋의 무덤 자리는 내가 만들어 줄 테니까 앞장서.”
“알겠습니다.”
타루와 주육승, 주괴는 앞으로 나갔다.
‘저 친구……?’
금장생은 놀란 얼굴로 무혼을 보았다.
그는 단지 몇 마디 말로 실전십패의 세 명을 부하로 만들어 버렸다.
더욱 황당한 건 무혼의 언변이 누군가를 설득할 정도로 뛰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반발하기 딱 좋은 말투였다.
그런데 세 사람은 부하를 자처하기까지 했다.
“그게 바로 영혼의 언어라는 거다.”
금장생의 내심을 짐작한 바타르가 설명을 덧붙였다.
“영혼의 언어요?”
“머릿속이 아니라 가슴으로 이해하는 말이라는 뜻이다.”
“저는 이해가 안 됩니다.”
“네가 그런 것까지 알려면 더 많은 세월이 필요하다. 아마 무혼이 저들에게 장밋빛 미래를 약속했다면 저들은 절대 따르지 않았을 거다.”
“그럼 무덤 자리 때문에?”
“맞다.”
“누군가 한 말이 떠오르네요.”
“어떤 말 말이냐?”
“젊어서는 어떻게 살 건지에 대해 골몰하지만 늙어서는 어떻게 죽을 건지를 걱정한다고요.”
“명언이구나.”
“하지만 위대한 종족에게는 해당 사항 없는 거 아닌가요?”
“위대한 종족?”
“일만 년 이상을 살면서도 자살하지 않는 것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위대한 종족이라 부르기로 했습니다.”
“만일 네게 일만 년의 수명이 주어진다면 자살해 버릴 것 같은 모양이구나.”
“희망도, 소원도, 꿈도 없는 건 삶이 아니잖아요. 삶이 아닌 걸 굳이 살아야 할 이유가 없고요.”
“클!”
바타르는 피식 웃었다.
문득 이곳 인간에게 많이 배운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요?”
“내가 자살하면 모두 네 탓인 줄 알아라.”
“자살을 왜 합니까?”
“자살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금방 네가 말하지 않았느냐?”
“그거야 혼자 늙어 갈 때 이야기고, 위대한 존재 옆에는 친구가 있잖습니까. 좋은 동반자가 있는 이상 절대 자살 같은 건 하지 않을 겁니다.”
“나는 저 녀석이 싫다.”
바타르는 무혼을 가리켰다.
“왜요?”
“너 같으면 사천오백 살이나 어린 인간 자식이 말을 트는데 좋아할 수 있겠느냐?”
“말이 안 되지요. 그런 자는 잡아다가 다시는 그런 생각을 못 하도록 주리를 틀어야 합니다.”
“클클클!”
바타르는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우릴 공격하는 이유가 뭐냐?”
바로 그때 무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금장생과 바타르는 대화를 끊고 타루 일행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들 역시 이유가 궁금했다.
“방이 나붙었습니다.”
주괴가 대답했다.
“어떤 방인데?”
“세 분의 머리를 가져오면 천 냥과, 이틀 동안 전비고戰秘庫를 둘러볼 수 있는 권한을 준다고 하였습니다.”
“전비고가 뭔데?”
“낭인성의 비급 창고 이름입니다.”
“어떤 자가 방을 붙인 거지?”
“붙인 자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전비고로 들어가게 해 주겠다고 하는 걸 보면…….”
“낭인성 최고 수뇌 중 한 명일 가능성이 높겠구나. 이를테면 막사웅 같은 녀석 말이다.”
“막사웅을 아십니까?”
“어제 내게 한 대 맞고 도망쳤다.”
“그래서 그런 거였군요.”
“천 냥을 세 사람으로 나누면 내 머리에 오백 냥, 너희 둘은 각각 이백오십 냥씩이겠구나.”
바타르가 이죽댔다.
“네 머리에 이백오십 냥이 더 걸려서 기분 좋냐?”
무혼은 바타르를 빤히 쳐다보았다.
“너보다 두 배나 많이 걸렸으니까.”
“새대가리 새끼.”
무혼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앞서가는 타루에게 말했다.
“실전십패 중 세 명을 방패로 세웠으니까 더 이상 싸울 일은 없겠지?”
“이곳에 있는 자들은 우리가 실전십패에 속한 무인이라는 걸 모릅니다.”
“장생 저 녀석도 널 알아보던데 다른 녀석들이 못 알아본다는 게 말이 돼?”
“저희가 강호 활동을 접은 게 십 년이 넘었습니다. 요즘 애들이 우리를 안다는 게 말이 안 되지요. 주공 친구분이 우리를 아는 건 아마도 공부를 했기 때문일 겁니다.”
“공부?”
“무인들에 대한 공부를 말하는 겁니다. 외모적인 특징이나 무기만 보고 별호를 알아내는 건 많은 공부를 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맞아?”
무혼은 금장생을 돌아보았다.
“한때 무림에 대해 관심을 가진 적이 있거든요. 그러고 나는 아무리 두꺼운 책이라도 두어 번 보면 내용을 전부 암송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천재라는 거지?”
“어릴 때 그런 소리 많이 들었습니다.”
“아이 때 천재 소리 한번 안 들은 사람이 어디 있냐, 자식아.”
“나는 좀 특별했다니까요.”
“아무튼 처음 보는 놈도 척 보면 정체를 안다 이 말이지?”
“내가 특징을 기억하는 사람은 적어도 무림 서열 백 위 안에는 든 사람입니다. 그 뒤거나, 낭인성의 성주처럼 강호 활동을 전혀 하지 않으면 알 길이 없습니다.”
“전직이 뭐였는데?”
무혼은 흥미로운 얼굴로 물었다.
“전직이라고 해 봐야 특별한 건 없습니다. 동영과 조선에서 조금씩 살았다는 것 말고는 내세울 게 없네요.”
“말하지 못하겠다 이거지?”
“말할 게 없다니까 그러네요.”
“알았어, 자식아. 그나저나 여긴…….”
무혼은 피식 웃고는 전방을 보았다.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푸름을 자랑하는 숲이 일행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 올라간 것들은 대나무였다.
“여긴 어디지?”
무혼은 타루를 보았다.
“죽림으로, 본성과 외성을 구분하는 경곕니다.”
“그럼 우리가 지금까지 있던 곳은 외성이었어?”
“네.”
타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넓네.”
“낭인성에 처음 온 사람은 다들 그렇게 말합니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성 정도로 생각하고 왔다가 어마어마한 규모에 깜짝 놀라곤 하죠.”
“죽림의 크기는 얼마나 되는데?”
“전방으로 육백 장이고 좌우측은 오백 장가량 됩니다.”
“육백 장이나 된다고?”
무혼의 입이 쩍 벌어졌다.
육백 장이면 무려 1천8백 미터나 된다. 그 정도면 죽림 안쪽에 성을 지어도 될 것 같았다.
“네. 내려오는 말로는 낭인성의 원성이 죽림 안쪽에 있었다고 합니다.”
“원성이 뭔데?”
“전설에 의하면 고대의 낭인성은 죽림 안에 있었는데 천 년 전에 지금 자리로 옮겼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저 안에 진짜 낭인성이 있었다는 거지?”
무혼은 죽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네! 그리고 고대의 낭인성에는 엄청난 전설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낭인들이 이곳으로 모여들 수밖에 없었던 전설이 말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타루의 얼굴이 약간 상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