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207)
“상단주 오셨습니다.”
나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드르륵!
그러자 맨 앞에 있던 문이 좌우로 열렸다.
문 좌우측에는 무복을 입은 사내 두 명이 무릎을 꿇은 채 앉아 있었다. 사내들 허리춤에는 장도와 단도가 나란히 꽂혀 있었는데, 그것은 동영인들의 무기인 왜도였다.
사십 대 중반 정도 되는 사내가 문 앞에 섰다.
사내의 눈빛은 깊고, 꽉 다문 입술은 고집스럽게 보였다. 키는 상당히 커 육 척을 상회했다.
역불개.
상인보다 무인에 더 어울릴 법한 체구를 가진 이자는 혈가에서 운영하는 태양상인의 상단주였다. 별호는 무상武商이었다.
역불개는 방금 열린 문을 지나 걸어갔다. 곧 문 앞에 도착했다.
그는 옷맵시를 가다듬고 우측에 앉은 사내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이!”
사내는 나직한 대답과 함께 허리를 숙였다.
사내가 양손을 앞으로 뻗는 동시에 반대편 사내도 손을 뻗었고, 문이 열렸다.
그게 신호탄이었다.
두 번째 문이 완전히 열리기 전에 그 안쪽 문이 열렸고 그 안쪽 문이 완전하게 열리기 전에 그 안쪽 문이 열렸다.
그렇게 열두 개의 문이 열렸다.
맨 마지막 문 안쪽에는 보료가 놓였고 그 앞에는 전형적인 동영 무사 복장을 한 자가 앉아 있었다.
사내는 눈이 작고 코와 입은 컸다.
작은 체구 때문인 듯 머리가 유난히 커 보였다.
사내에게서 가장 특이하게 보이는 건 눈빛이었다. 작은 눈에서는 감히 마주 쳐다보기 힘들 정도로 강한 광채가 흘러나왔다.
눈빛 하나만으로도 상대방을 주눅 들게 하는 이자는 전 혈왕 오다아이를 몰아내고 혈가를 장악한 다이라토미平臣로, 중원 이름은 평신이었다.
“혈왕을 뵙습니다.”
역불개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불개 넌 중원인이냐 동영인이냐?”
다이라토미는 대뜸 물었다.
“제 아버지는 동영인입니다. 따라서 그의 아들인 저도 동영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진심이냐?”
“그렇습니다, 혈왕.”
“내가 왜 전대 혈왕을 몰아내고 혈왕이 됐는지 아느냐?”
“그건…….”
“모른단 말이냐?”
“짐작은 하고 있지만 말하기가…….”
“설사 내게 모욕적인 말이라고 해도 죄를 묻지 않을 테니 말해 봐라.”
“정확한 내막은 모르지만, 혈왕의 이름을 가지고 추론을 해 보았습니다.”
“호! 궁금하구나.”
다이라토미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얹혔다.
“현재 동영의 주인이신 도요토미 히데요시 님께서 과거 다이라平 성을 사용하신 걸로 압니다. 따라서 다이라토미平臣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님의 신하라는 말이 됩니다.”
“하하하! 정확하다, 불개. 역시 넌 상단주 자격이 있다. 그런데…….”
다이라토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셨다. 전혀 종잡을 수 없는 급격한 변화였다.
“죄송합니다, 혈왕.”
역불개는 머리를 바닥에 찧었다.
감숙성 상권을 잃은 데에 대한 질책이었다.
“상황은 파악했느냐?”
“도박사 한 명과 양조장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도박사와 양조장?”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잠깐만 기다려라. 이쪽으로 오너라!”
다이라토미는 오른편으로 손짓을 했다. 그러자 여자 한 명이 걸어 나왔다.
그녀는 전에 금장생을 추격할 때 혈가의 대표였던 사화死花 소라였다.
“이 아이는 내 딸 소라다.”
다이라토미는 소라를 소개했다.
“처음 뵙습니다, 대공녀. 저는 태양상인 상단주 역불갭니다.”
역불개는 고개를 숙였다.
“반가워요, 단주. 잘 지내도록 해요.”
소라는 싱긋 웃었다.
“이제 이야기해라.”
“네, 혈왕. 사건의 발단은 도박사와 양조장 주인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역불개는 일금과 천주장에서 일어난 일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가 한 이야기 중에는 양철상의 아들 양군우가 불법적으로 천주장을 빼앗기 위해 살인을 저지른 내용까지 다 들어 있었다.
“양조장 주인은 그곳 사람인가요?”
이야기를 듣고 난 소라가 물었다.
“아닙니다. 양조장을 운영하던 자의 동업자였습니다. 사업체를 확장하고 나서 확인하기 위해 온 거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감숙성 상황은 어떠냐?”
다이라토미가 물었다.
“양상태가가 사라진 자리를 황금가라는 신생 업체가 빠르게 잠식하고 있습니다.”
“황금가?”
다이라토미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황금가라는 말을 듣는 순간 한 가문이 떠올랐다. 그건 바로 상천금가와 협의하여 없앤 황금전가였다.
“이리저리 알아보았지만 실체가 없습니다.”
“유령 상단이란 말이냐?”
“현재까진 그렇습니다. 하지만 사업체를 흡수하는 걸로 봐서는 자금력은 상당한 걸로 파악되었습니다.”
“재미있네요.”
듣고 있던 소라가 끼어들었다.
“뭐가 재미있단 말이냐?”
다이라토미가 물었다.
“그 일을 순서대로 나열하면 천주장 주인 중 한 명인 어성연이 죽고, 동업자가 오고, 도박사가 나타나 일천만 냥을 따 가고, 황금가라는 자금력이 풍부한 상단이 생겨났잖아요.”
“그러니까 네 말은, 이 모든 게 그 동업자 한 놈이 저지른 일이라는 거냐?”
다이라토미는 소라를 보았다.
“조사를 더 해 봐야 하겠지만 냄새가 나는 건 확실하잖아요.”
“감숙성이 우리 태양상인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어느 정도냐?”
“삼 할입니다.”
“타격이 크구나.”
“특히 일금을 잃은 건 큰 손햅니다.”
“일금을 다시 찾을 수는 없는 거냐?”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건물도 새 단장을 했고, 이름도 천금루로 바뀌었고요. 허가 또한 새로 냈다고 합니다.”
“소유권을 주장하기 힘들게 됐구나.”
“그렇습니다.”
“바로 옆에 일금을 다시 세우는 건 어떠냐?”
“허가를 내는 과정이 쉽지 않습니다. 도수를 구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고요.”
“그렇다고 해도 삼 할은 너무 크다. 우리 감숙성을 예전으로 되돌려 놓도록 해라. 이번 일은 내 딸 소라와 함께 해라.”
“알겠습니다, 혈왕.”
역불개는 고개를 숙였다.
“당장 감숙성으로 가라.”
“네.”
역불개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왔던 길을 되돌아 나갔다.
그가 나가자 열렸던 문이 다시 하나씩 닫혔다.
“총사 있느냐?”
혼자 남은 다이라토미는 안쪽을 향해 소리쳤다.
“네, 혈왕.”
대답과 함께 문사 복장을 한 자가 나왔다.
삼십 대 초반의 사내로 깊이 있는 눈동자를 가진 이자는, 혈가의 머리라 할 수 있는 총수사의 사주 묘한이었다.
“조사하는 일은 어떻게 됐느냐?”
“잃어버린 은 오십만 냥은 찾지 못했습니다.”
“단서도 없느냐?”
“현재까진 그렇습니다.”
“한두 푼도 아니고 오십만 냥, 아니 중원 가치로 따지면 백만 냥이다. 그 은이 어디로 갔는지 찾지 못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
다이라토미는 언성을 높였다.
“죄송합니다, 혈왕. 전 혈왕 때 있었던 일이라 자료가 많지 않아서 조사하는 데 어려움이 많습니다.”
“전에 조사하던 자료가 없다는 거냐?”
“전 혈왕 패거리가 중요 자료를 파기해 버렸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건 반드시 찾아야 한다.”
“알겠습니다, 혈왕.”
묘한은 고개를 숙였다.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군.’
묘한은 방바닥을 바라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태양상인에 말하면 한 달 안에 만들 수 있는 돈이 일백만 냥이다. 그 돈 때문이라면 이렇게 집착할 이유가 없다.
“사인루 건은 어떻게 됐느냐?”
“사인루를 공격한 건 마왕이었습니다.”
“사실이냐?”
“그렇습니다.”
“마왕이 왜 사인루를 공격했다는 거냐?”
“마가에서 반란이 일어난 건 아십니까?”
“적지영 일행이 적천영을 몰아내려다가 죽임을 당했다고 하더구나.”
“적지영 삼 형제의 반란 모의는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게 아니고 몇 년 전부터 있었습니다. 적천영의 실종도 그들의 짓이었다는 게 중론이고요.”
“그런데 적천영은 돌아왔지.”
“그렇습니다. 그러자 적지영 일행은 이번에 청부를 하게 되는데, 청부업체가 바로 사인루였습니다. 사인루 인사들에 의해 죽을 뻔했던 마왕은 마가 무인인 백팔무영비를 동원해서 사인루를 기습했습니다.”
“백팔무영비 정도가 사인루를 없앨 수 있다고 보는 거냐?”
“정확하진 않지만 배신자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배신자?”
“시체를 발굴했는데 사백 구가 부족했습니다.”
“최소한 사백 명은 살아서 사인루를 떠났다는 거구나.”
“그렇습니다.”
“그들의 수장은 오다아이고?”
“네?”
묘한의 눈이 커졌다.
그는 지금까지 전 혈왕인 오다아이가 죽은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다이라토미가 오다아이를 언급한 것이다.
“사토 그놈은 오다아이를 죽이지 않았다.”
“분명 죽었다고 보고를 받았습니다.”
“사토 그놈은 보고만 그렇게 하고 오다아이를 살려 두었다.”
“그녀가 살아 있다는 증거를 찾으셨군요.”
“용린갑龍鱗鉀과 해상海霜, 녹사綠蛇가 없어졌다.”
“맙소사.”
묘한의 입이 쩍 벌어졌다.
용린갑은 전 혈왕의 갑옷이고, 해상과 녹사는 장도와 왜도의 이름이다. 아울러 그 세 가지 물건의 주인은 전대 혈왕인 오다아이다.
그 세 가지가 있던 곳은 혈가의 가장 깊숙한 곳이라 도둑이 들 수 없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한 가지. 오다아이 본인이 왔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곳으로 가려면 혈왕의 침실을 지나야 하는데…… 아.’
묘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러느냐?”
“만일 그 세 가지를 가져간 사람이 정말로 오다아이라면 혈왕께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그걸 가져가기 위해서는 혈왕의 침실을 지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리를 되찾길 원했다면 그때 날 암살했을 거란 말이구나.”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묘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긴 하다만 나는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 더구나 사라진 사백 명이 오다아이를 따라갔다면 작지만 강한 세력이 될 수 있다. 제 방을 제집처럼 드나들 수 있는 적을 등 뒤에 두고 살 수는 없지 않으냐?”
“그렇게 하면 전력이 너무 분산돼 천왕지회에 집중하기 힘들어집니다.”
천왕지회 핑계를 대긴 했지만 묘한이 걱정하는 건 그게 아니었다.
전 혈왕인 오다아이는 오다 노부나가의 수양딸이라는 신분을 떠나 혈가의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그런 그녀를 치기 위해 병력을 동원하는 건 역효과가 날 게 분명하다. 어쩌면 그녀가 있는 곳으로 도망치는 자가 생겨날지도 모른다.
그러다 보면 그쪽은 더욱 강해질 테고, 혈가는 두 세력으로 분열되고 만다.
묘한이 걱정하는 건 바로 그 점이었다.
“혈가가 분열될까 봐 걱정하는 거냐?”
다이라토미는 묘한의 내심을 꿰뚫어 보았다.
“만일 그녀가 살아 있고 세력을 이루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가장 먼서 신풍사가 혈가에서 이탈할 겁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건 막아야 합니다.”
신풍사는 혈왕 직할대로, 전 혈왕에 대한 충성심이 가장 강했던 집단이다.
“그래서 더더욱 그 계집을 없애야 한다는 거다, 묘한. 그 계집이 살아 있는 이상 우리 혈가는 언제든지 둘로 쪼개질 수 있다. 그걸 막기 위해서는 계집의 머리를 혈가 정문에 걸 수밖에 없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천왕지회 전에 그 계집을 찾아내야 한다. 그리고 마왕의 행적을 낱낱이 살펴서 보고하도록 해라.”
“마왕도 칠 생각이십니까?”
“사인루가 우리 혈가에서 운영하는 단체라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즉, 팔왕가 모두가 알고 있단 말이다. 그들은 흥미로운 눈으로 우리가 어떻게 나오나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마가가 강하니까 찍소리 못 한다고 손가락질할 겁니다.”
“맞다, 묘한. 그들은 우리를 마음껏 비웃을 것이다. 자그마한 체구의 왜구라면서 말이다. 그들의 얼굴에서 웃음기를 없애려면 우리 혈가는 절대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걸 보여 줘야 한다. 굳이 마왕을 없앨 필요는 없다. 놈을 호위하고 있는 백팔무영대만 없애면 된다. 가장 초라한 수장이 어떤 자인지 아느냐? 전장에서 싸우다 죽는 것보다, 부하를 전부 잃고 혼자 살아남은 자다. 놈을 그렇게 만들어 줘라.”
“알겠습니다, 혈왕.”
묘한은 두 손을 바닥에 대고 상체를 납작 숙였다.
“물러가라!”
다이라토미는 손을 휘저었다.
“물러가겠습니다, 혈왕.”
묘한은 무릎걸음으로 물러나 안쪽으로 모습을 감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