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198)
“이게 뭔지 알아?”
무혼은 칼을 이치익 눈앞으로 가져가 보여 주며 물었다.
“모르오.”
고개를 젓는 이치익의 눈동자에 두려운 기색이 어렸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칼의 용도를 알 것 같았다.
“궁금한 게 있는데 대답해 주겠지?”
“내,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모두 말하겠소.”
―거기 있는 사람, 마나부?
무혼은 뒤편 허공에 숨어 있는 자를 향해 전음을 보냈다.
―그렇습니다.
그러자 대답이 돌아왔다.
―양산태가에 대해 알아?
―생긴 지는 일 년 반 정도 됐고, 감숙성에서 중간 정도 하는 상단입니다.
감숙성 시장조사를 하다가 알아낸 사실이었다.
―그자들이 천주장을 노리는 이유는?
―그자들도 큰 양조장을 가지고 있고, 우리가 술을 빚기 전에는 감숙성 대부분의 주루와 객잔에 술을 넣고 있었습니다.
―그럼 내 친구의 양조장 때문에 크게 타격을 입었다는 거냐?
―저희가 오기 전만 해도 여긴 하루에 오백 병 정도만 생산했습니다. 그마저도 다른 지역으로 많이 팔려 나가는 바람에 감숙성 시장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오고 나서 하루에 삼천 병에서 사천 병까지 생산하고 있습니다.
―양산태가의 상권을 천주가 잠식한 거구나.
―그런 것 같습니다.
―양산태가에 대해 샅샅이 조사해 와. 기간은 내일 저녁까지야.
―알겠습니다.
―그리고 양산태가에 배후가 있는지도 알아보고.
―네.
먼 곳에서 마나부의 전음이 들려왔다.
‘저렇게 강한 자들을 어떻게 부하로 만들었는지 모르겠네.’
무혼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다시 이치익을 보았다.
“어디부터 손을 봐 줄까. 손톱 밑과 발톱 밑, 눈동자, 성기, 네 곳 중 한 곳을 먼저 선택해.”
무혼은 싱긋 웃으며 가느다란 칼을 들어 올렸다.
“나, 나는 말단입니다. 말단은 아는 게 없습니다.”
이치익은 겁먹은 얼굴로 말했다.
“다 말할 필요 없어. 네가 아는 것만 말해. 손이 좋겠다.”
무혼은 활짝 웃으며 이치익의 오른손을 잡아서 들어 올렸다.
“말하겠습니다. 제가 아는 건 모두 말하겠…… 아악!”
이치익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말하겠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무혼이 손톱 밑으로 칼을 찔러 넣은 것이다.
이치익은 비명을 내질렀지만, 그의 비명은 폐가 벽을 넘지 못했다. 바타르가 아무 소리도 새어 나가지 못하도록 마법을 펼친 거였다.
“계속해.”
무혼은 다른 손가락 밑으로 칼끝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
“양산태가는…….”
급해진 이치익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머릿속에 있는 걸 죄다 꺼내 놓기 바빴다.
그가 말을 멈춘 건 손가락과 발가락에서 하나도 빠짐없이 피가 흘러내리고 난 후였다.
“눈은 건졌네.”
무혼은 이치익의 볼을 가볍게 치며 빙긋 웃었다.
“아무튼 다녀와서 보자고.”
무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바타르와 함께 천주장을 나섰다.
밖은 어느새 어두워져 있었다.
“도박 좋아해?”
걸음을 옮기던 무혼이 바타르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거다.”
“잘됐네.”
“지금 도박장으로 가는 거냐?”
바타르가 물었다.
“응.”
“도박장에 뭐가 있는데?”
“단서.”
“무슨 단서가 있다는 거냐?”
“내 친구의 동업자를 몰락시킨 결정적인 단서가 거기 있을 거야.”
“일을 너무 복잡하게 처리하는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느냐?”
“복잡해?”
“내 경험에 의하면 인간은 시험적으로 몇 놈 죽이면 금세 정리된다.”
“그래서 시험적으로 두어 놈 죽이라고?”
“많이 죽일수록 효과가 크다.”
“나도 그런 방법을 선호하긴 하는데, 이번 경우엔 내 친구 말도 설득력이 있어 보여.”
“전쟁과 장사는 다르다는 거냐?”
“응.”
무혼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부지런히 걸었다.
천주장이 있는 곳에서 한 시진 정도 걸어가자 화려한 불빛으로 가득한 도심이 나타났다.
“한적한 시골인 줄 알았는데 있을 건 다 있네.”
무혼은 피식 웃었다.
커다란 길을 사이에 두고 술집과 주루가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이곳에서 낭인성까지는 세 시간 거리 아니냐. 놀다 가기엔 딱 좋은 곳이지.”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다는 뜻?”
“그 정도가 딱 좋은 거리다.”
“그렇지.”
무혼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가까우면 상관을 자주 만날 수가 있어 좋지 않고 너무 멀면 오기기 힘들다.
걸어서는 세 시간이지만 경공을 펼치면 줄어든다. 잠시 놀다 가기엔 최적의 거리였다.
“아무튼 알아서 해라.”
두 사람은 번화가 안으로 들어섰다.
이미 많은 이들이 술자리를 시작한 듯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자들을 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저기네.”
도박장은 금세 찾았다. 일확천금一攫千金이란 현판이 불빛 아래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무혼과 바타르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턱!
막 도박장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가로막았다.
“저 안으로 들어가는 데 자격이 있어야 해?”
무혼은 턱으로 안쪽을 가리켰다.
“최하 백 냥은 있어야 하오.”
“이거면 될까?”
무혼은 금덩어리 두 개를 내밀었다.
그가 내민 금덩어리는 거의 만 냥 가치가 있었다.
“물론입니다.”
“돈으로 바꿔서 가져다줘. 열 냥은 팁, 아니 수고비로 너 갖고.”
“알겠습니다.”
덩치 사내는 고개를 숙였다.
무혼과 바타르는 안으로 들어갔다. 도박장은 반지하에 위치해 있었다.
“와아!”
계단을 내려가는 순간 안쪽 왼편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무혼은 시선을 돌렸다.
커다란 탁자 앞에 십여 명이 모여 있었다.
두 사람이 도박을 하고 있었는데, 둘 중 한 명은 도박장 도수고 한 명은 손님이었다. 그런데 손님 앞에는 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손님의 돈은 총 사십만 냥입니다. 이번에도 다 거시겠습니까?”
도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많이 잃었군.”
도수의 목소리는 자신감이 결여돼 있을 뿐 아니라 약간 떨리기까지 했다.
―그놈이다.
바타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놈? 누구?
―장생 그놈 말이다.
―그는…….
“소小!”
그때 금장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맞네.”
무혼은 빙그레 웃었다.
대단한 녀석이란 생각이 들었다. 분명 잡혀갔고, 지금 옥에 갇혀 있어야 할 녀석이 이곳에서 도박을 하고 있었다.
“소, 소다!”
놀람에 찬 외침이 금장생 주변에서 흘러나왔다.
주사위 두 개의 합은 육六이었다.
“어떤 도박이냐?”
바타르가 물었다.
“두 주사위 숫자 합이 칠七을 기준으로 낮으면 소小, 높으면 고高가 되는 단순한 게임이야.”
“칠七이 나오면?”
“무조건 도수가 이겨.”
“도수에게 유리하게 돼 있군.”
“그렇지.”
무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금장생을 바라보던 바타르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도수 옆에 뭔가가 있었다. 실체가 없는 걸 보면 정령의 일종이 분명한데 기운이 어두웠다.
“왜?”
―저 녀석 건너편에 뭔가가 있다.
―뭐가 있는데?
―정령처럼 생긴 녀석인데 어둡다.
―귀신이네.
―맞다. 귀신이 있다는 걸 잊고 있었구나.
―그 귀신이 저 녀석을 돕는 것 같아?
―그건 좀 더 지켜봐야겠다.
“이제 팔십만 냥이 됐습니다.”
금장생은 도수를 보며 말했다.
“그, 그렇군요.”
도수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계속하실 수 있겠습니까?”
금장생은 다시 물었다.
도수의 손은 주사위를 굴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떨렸다.
“할 수 있습니…….”
―물러나라.
도수의 귓전으로 차가운 전음이 들려왔다.
“더 하시겠다면 저 대신 다른 분이 상대해 드릴 겁니다.”
도수는 한 걸음 물러나며 말했다.
“돈을 이렇게 땄는데 계속해야지요.”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지금까지 금장생을 상대했던 도수는 물러났다. 그리고 곧바로 위로 올라갔다.
반지하와 일 층 사이 공간에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그곳에는 두 명이 서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상당한 무공을 지닌 강자인 듯, 눈에서 광채가 쏟아져 나왔다.
도수가 간 곳은 두 사람 앞이었다.
“어떤 놈인지 알아냈느냐?”
둘 중 왜소하고 키가 큰 자가 물었다.
“저 정도 실력자면 도박깨나 한다는 자들은 모를 수가 없는데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도수는 고개를 저었다.
금장생이 도박장으로 들어온 건 한 시진 전이다.
그는 들어와서 안의 모든 도박판에 끼었다. 그러고는 돈을 땄다.
처음엔 큰돈이 아니어서 주시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투자판으로 오면서 주목을 받았다.
처음 그는 한 판에 스무 냥씩 걸면서 돈을 계속 잃었다.
한 식경 동안 주야장천 잃기만 했다. 그때 잃은 돈이 거의 십만 냥 가까이 되었다.
그런 다음 건 돈이 십만 냥이었다.
다들 홧김에 지르는 걸로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잃기만 하던 자가 십만 냥을 넣자 딴 것이다.
그다음엔 이십만 냥을 걸었고, 그다음엔 사십만 냥을 걸었다. 단 세 판 만에 십만 냥을 팔십만 냥까지 불린 것이다.
“속임수를 쓰는 것 같지는 않더냐?”
“무공을 익힌 흔적이 없습니다. 설사 무공을 익혔다고 해도 저자는 투자를 만져 보지도 않았습니다.”
“만져 보진 않았지만 소리는 들었지.”
“소리로 주사위 표면에 적힌 수를 읽어 냈다는 거냐?”
장주 옆에 있던 자가 입을 열었다. 장주보다 상관인 듯, 사내는 반말을 했다.
“도신의 경지에 오른 자들은 가능합니다.”
장주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하면 저자가 도신이란 말이냐?”
“도후가 상대하는 걸 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장주는 아래로 시선을 주었다.
“지금 장에 있는 돈이 총 얼마지?”
“아직 입금을 못 한 돈까지 합치면 일천만 냥 정도 됩니다.”
“전부 현금?”
“그렇습니다.”
“신풍대와 살천대를 대기시켜라.”
“굳이 그들까지…….”
“언제부터 내 말에 토를 달았느냐?”
“아, 알겠습니다, 당주.”
장주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안쪽에다 전음을 보냈다.
바로 그때 훤칠한 키의 여자가 금장생 앞으로 가는 게 보였다.
“도후賭后다!”
구경꾼들 사이에서 놀람에 찬 외침이 흘러나왔다.
금장생은 시선을 들었다. 가슴을 절반가량 드러낸 여자가 조금 전 도수가 섰던 자리로 와 섰다.
“바뀐 도순가요?”
“네.”
“구경꾼들은 도후라고 하던데요?”
“그 별호는 이곳에 있는 분들이 붙여 준 거고, 원래 별호는 천수千手예요.”
“맙소사!”
“세상에.”
주위에 있던 이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천수. 그 별호는 도박계의 전설이었다.
천수가 유명해진 건 마지막 판이 되면 늘 손목을 걸었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 바람에 수많은 도박꾼들이 손목을 잃었다고 하였다.
하지만 천수는 한동안 도박계에서 모습을 감췄다.
그랬던 천수가 도박계에서 보면 벽촌이나 다름없는 이곳에서 일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