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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가-195화 (195/524)

황금가 (195)

초인삼황

엘은 쉬지 않고 동쪽으로 날아갔다.

두 시진 정도를 날아간 그는 산 위로 내려섰다. 마나가 모두 소진돼 더 이상 날 수가 없었다.

그 자리에 가부좌를 하고는 운기행공을 시작했다.

운기행공은 중원인들의 기술이었다.

처음에는 미개인들이 개발한 방법이라며 무시했다. 그러다가 어떤 면에서는 몸을 치료하는 힐링 마법보다 더 뛰어나다는 걸 알게 되었다.

특히 소진된 마나를 회복하는 덴 탁월했다.

마나가 급격하게 단전으로 채워지는 게 느껴졌다.

반 시진 후 엘은 눈을 떴다.

그의 눈에서 핏빛 광채가 폭사되었다.

그는 다시 마나를 끌어 올렸다.

스아악!

곧 날개가 생겨났다. 눈에서 나오는 혈광만큼이나 날개가 뿜어내는 금광도 강렬했다.

바닥을 차고 허공으로 솟구친 엘은 다시 날개를 펄럭였다.

쉬지 않고 날아간 그가 이윽고 멈춰 선 곳은 수천 채의 고루거각이 늘어선 거대도시 위였다.

도시 위를 한참 동안 날았다. 잠시 후 성벽이 나왔다.

성벽을 지나쳐 한 식경 정도 더 날아가자 높은 산에 둘러싸인 장원이 나타났다. 엘은 그 자리에 멈췄다.

“펜타그램이었네.”

엘의 입가에 싱긋 미소가 떠올랐다.

이곳에서 장원을 내려다보는 건 처음이었다.

위에서 바라본 장원은 아주 작아 보인다. 하지만 아래로 내려가면 달라진다.

장원을 구성하는 건물의 수는 무려 일천오백 채다.

그 건물들은 물론이고 야산과 강 모두가 펜타그램의 각 부분을 형성하고 있었다.

엘의 시선이 안쪽에 도드라져 보이는 다섯 채의 건물로 향했다.

오각형을 이루고 있는 저 건물이 장원의 핵심이다. 그리고 저 건물 중 세 곳에 장원의 주인들이 살고 있다.

중원인들이 초인삼황이라고 부르는 그들 셋 중, 자신이 가야 할 곳은 좌천심황 좌무백의 거처다.

엘은 곧바로 하강했다.

백여 장을 하강한 그는 소리 없이 내려섰다.

척!

그가 내려서자마자 사방에서 삼엄한 기운이 밀려왔다. 좌천심황 좌무백의 호위들이 내뿜는 기운이었다.

“나다!”

엘은 로브 후드를 벗었다. 그러자 붉은 눈동자와 은발 머리가 나타났다.

그 상태에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곧 그에게로 향하던 기운이 사그라졌다.

엘은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은 오 층이었다. 그는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 좌우측에서도 호위들의 기척이 감지되었다.

“별일 없느냐?”

그는 올라가면서 물었다.

“네.”

잠시 후 오 층에 도착했다.

오 층은 좌무백의 거처 한 곳뿐이고 계단에서 좌무백의 집무실까지는 회랑으로 이어져 있다. 엘은 회랑을 따라 걸었다.

그가 좌무백의 집무실 앞으로 다가가자 좌우로 열렸다.

엘은 반사적으로 허리를 숙였다.

안쪽에는 머리가 허옇게 센 노인이 좌탁 앞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엘이 들어서자 노인은 고개를 들었다.

‘음!’

엘은 내심 신음을 내뱉었다.

단지 시선이 마주쳤을 뿐인데 발가벗은 상태로 좌무백 앞에 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엘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하지만 그 눈빛은 금세 사라졌다.

“다녀왔습니다.”

그는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혼자 온 게냐?”

‘흐흡!’

엘은 다시 심호흡을 했다.

목소리를 듣는 순간 머릿속이 아득해지며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상급 신족만이 가지는 신언神言이다. 대비하지 않으면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만다.

“네.”

엘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으며 대답했다.

“드래곤의 능력은 어떻더냐?”

“샤이칸드리아 대륙에서의 능력의 삼분의 이 정도를 발휘하는 걸로 파악됐습니다.”

“드래곤과 함께 온 자는…….”

“그자는 중원 무인과 별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마법 실력이 형편없단 말이냐?”

“제가 보기엔 그랬습니다.”

“그 외에 다른 건 없느냐?”

“네.”

금장생과 강시가 있긴 했지만 엘은 보고하지 않았다. 금장생은 초인삼황이 아니라 자신의 몫이라고 여긴 탓이었다.

“가서 내가 보잔다고 해라. 아니다, 직접 가야겠다.”

좌무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을 나온 그는 천천히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신법을 펼치면 한달음이지만 내기조차 끌어 올리지 않았다.

“내가 왜 마법진이나 신법을 두고 힘들게 계단을 내려가는지 아느냐?”

좌무백은 물었다.

“모릅니다.”

“늙으면 어떤 방법으로든 몸을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마나가 몸을 보호해 주지 않습니까?”

“마나는 후천적으로 얻은 힘이고, 후천적으로 얻은 힘에는 한계가 존재한다.”

“순수한 육체의 힘을 길러야 한다는 말이군요.”

“그렇다. 나는 그 사실을 사천오백 살이 돼서야 깨달았다.”

“제 수명은 삼천 살입니다, 신왕.”

“그래서 육체적인 운동이 필요 없다는 거냐?”

“아직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머잖아 너도 깨닫게 될 게다.”

좌무백은 팔을 좌우로 흔들며 걸었다.

잠시 후 그와 엘은 호수 앞에 도착했다. 강물을 막아 만든 호수 중앙에는 정자가 서 있었다.

정자에는 두 명이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들 두 사람 중에서 키가 작고 온화한 느낌을 주는 노인은 치천마황 심무극이고 왜소하면서도 키가 크고 신경질적인 얼굴을 하고 있는 자는 지천마황 천우황이었다.

“벌써 와 있었구먼.”

좌무백은 웃으며 말했다.

호수 앞에 다다랐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마치 평지를 걷는 것처럼 뚜벅뚜벅 물 위를 걸어 정자로 올라갔다.

그런 좌무백을 바라보는 엘의 눈에 놀람의 빛이 어렸다.

어느 정도 능력을 갖게 되면 물 위를 걷는 건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 마나를 끌어 올리거나 무공을 펼쳐야 한다.

그런데 좌무백은 아무런 사전 준비도 없이 바로 물 위를 걷는다. 그건 곧 마음만 먹으면 마나가 저절로 일어나는 최고 경지에 이르렀다는 걸 뜻한다.

“너도 여기로 오너라.”

좌무백이 엘에게 말했다.

“네.”

엘은 마나를 끌어 올렸다. 그리고 물 위를 걸었다.

마나를 끌어 올리는 시간이 필요했을 뿐 물 위를 걷는 모습은 좌무백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정자에 도착한 엘은 한편에 시립했다.

“엘에 의하면 드래곤은 여전히 강하다고 하더구먼.”

먼저 좌무백이 입을 열었다.

“그자는 샤이칸드리아 대륙 드래곤이 아니라고 하던데.”

심무극이 말했다.

“샤이칸드리아 대륙 반대편에 있는 헤이람 대륙에서 온 자라고 하더구먼.”

“전부 몇 놈이나 되는지는 알아냈느냐?”

지천마황 천우황이 엘을 돌아보며 물었다.

“드래곤의 개체 수에 대해서는 언급한 적이 없었습니다. 다만 무혼 그를 이곳으로 보낸 자가 크로노마스라는 것만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바타르 그자 또한 크로노마스에게 복종하는 것 같았고요.”

“지금 크로노마스라고 하였느냐?”

심무극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네.”

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놈이 어떻게…….”

심무극은 좌무백을 보았다.

“죽었던 놈이 살아났다면 이유는 두 가지뿐이네. 첫째는 도플갱어인 무혼 그놈이 깨어나서고, 두 번째는 진짜 크로노마스의 농간이네.”

“진짜 크로노마스의 농간이라는 건 무슨 뜻인가?”

“무혼 그놈의 도플갱어가 아니라 진짜 크로노마스란 거네.”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심무극이 물었다.

“무극 자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은가?”

“가능성은 반반이네.”

심무극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좌무백의 말이 맞다. 부활한 크로노마스는 무혼의 도플갱어가 아니라 진짜라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다.

“만약 놈이 진짜 크로노마스라면 어떻게 되는 건가?”

천우황이 물었다.

“무혼 그놈의 도플갱어라면 크로노마스의 껍질을 쓰고 있더라도 인간에 불과할 뿐이지만, 진짜 크로노마스라면 만 살이 훨씬 넘었고 그 세월 동안 세상을 속여 온 드래곤이니까…….”

심무극은 말끝을 흐렸다.

“상대하기가 더 어려워진다는 말이군.”

천우황이 말했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니네.”

“크로노마스에 대한 대비책이 있다는 건가?”

“무혼의 도플갱어이든 크로노마스 본인이든, 놈이 모르고 있는 게 있네.”

심무극이 말했다.

“그게 뭔가?”

“자신의 육체와 어둠의 존재들이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거네.”

“아!”

천우황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삼백 년 전에 있었던 일이라 깜짝 잊고 있었다.

그때 신족은 어둠의 존재와 크로노마스의 운명을 잇는 작업을 했다. 그 일이 성공했다면 어둠의 존재 역시 다시 깨어나게 될 게 분명하다.

그들 정도면 크로노마스의 상대로 충분할 것이다.

“하면 그놈이 무혼과 드래곤을 보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좌무백이 두 사람을 보며 물었다.

“우리 때문일 가능성이 90퍼센트 이상이네.”

심무극이 대답했다.

“그자가 우리를 알고 있다는 건가?”

“그랜드크로스 때 크로노마스가 실패한 이유가 바로 중원에서 건너간 무혼 때문 아닌가?”

“우리가 아니었다면 무혼의 영혼이 차원을 넘을 수 없었을 거란 말이구먼.”

“그러네. 만일 그랜드크로스를 꾸민 자가 크로노마스라면 누구를 가장 미워하겠는가?”

“그게 우리란 말이군.”

“그러네.”

심무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무혼과 바타르가 차원을 넘어온 진짜 이유는 우리를 제거하기 위해서라는 게 되는 건가?”

“지금까지 한 모든 가정이 크로노마스가 가짜가 아닌 진짜일 경우네. 만일 그의 영혼이 여전히 갈릭 드 트란이라면 지금까지의 가정은 무의미하네.”

“하면 천사령 발동은 좀 더 늦춰야겠구먼.”

좌무백이 말했다.

“천사령 발동은 놈이 환수각을 친 이유가 우리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우연히 친 건지 확인하고 난 후에 생각해도 늦지 않다고 보네.”

“지금은 이곳 일이 먼저라는 건가?”

“그러네. 이제 반년만 있으면 황제는 물론이고 북경 전체가 우리 꼭두각시가 되네.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틈이 없네.”

심무극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그대로 두자는 건가?”

“그럴 수는 없지.”

심무극은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무혼 그놈의 오랜 친구들을 보낼 참이네.”

“오랜 친구들이라면…….”

저벅! 저벅! 저벅! 저벅!

바로 그때 발소리가 들려왔다.

좌무백은 고개를 돌렸다. 흑의를 걸친 네 명이 정자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저들은?’

좌무백과 함께 고개를 돌렸던 엘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물방울을 튀기며 이편으로 걸어오는 자는 구천각의 수장 네 명이었다.

가장 왼편에서 오고 있는 회색 머리 사내는 귀마존이고 그 옆에서 오는 불그스름한 머리 사내는 태양마존, 태양마존 옆의 백발 사내는 빙마존, 그리고 맨 오른편의 약간 푸른빛이 도는 머리카락을 지닌 자는 풍마존이었다.

“부르셨습니까?”

정자로 올라온 네 사람은 초인삼황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너희 친구가 돌아왔다고 하더구나.”

심무극이 말했다.

“친구요?”

귀마존이 물었다.

“삼백 년 전에 만났던 녀석이라 아직 기억할는지 모르겠다만, 무혼이다.”

“지, 지금 무혼이라고 하셨습니까?”

귀마존의 몸에서 진득한 살기가 요동쳤다.

“아직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구나.”

“제 몸을 두 쪽으로 잘랐던 놈인데 어떻게 잊겠습니까?”

“하지만 그놈 덕분에 탈피를 했으니까 어떻게 보면 은인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으냐?”

심무극은 웃으며 말했다.

탈피는 중원으로 넘어오면서 생겨난 신족의 특징이었다.

중원인과 섞이면서 많이 희석되긴 했지만 여전히 순혈의 신족이 존재했고, 그들은 탈피라는 과정을 거쳐 완전한 신족이 되었다. 그 탈피가 바로 죽음이었다.

죽음은 끝이 아니었다. 그 죽음 속에서 완전한 신족의 탄생이 이루어진다.

귀마존을 비롯한 네 명은 무혼에게 죽임을 당하면서 탈피를 했고, 나머지 다섯 명을 탈피시켜 준 이는 자신들이다.

“그래도 그때의 고통은 뼈에 사무쳐서 잊히지가 않습니다. 아니, 고통보다는, 벌레 같은 놈에게 당했다는 사실을 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삼백 년이나 지났는데…….”

귀마존은 의아했다.

인간은 절대 삼백 년을 살 수가 없다. 아무리 무공이 강해 수명이 늘었다고 해도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아니, 야수마존 말로는 분명 죽었다고 하였다.

“몸은 이곳에서 죽었지만 영혼은 차원을 넘어 샤이칸드리아 대륙으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황제가 되었다.”

“저, 정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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