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가-193화 (193/524)

황금가 (193)

“내가 아는 ‘라’는 한 명뿐인데 그가 맞느냐?”

바타르의 얼굴에 놀라운 기색이 떠올랐다.

그는 수만 년 전 존재고 이미 소멸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자신이 ‘라’라고 하는 자가 나타난 것이다.

“에고족은 거짓말을 못 한다는 걸 모르는 걸 보니 햇병아리인 모양이구나.”

“지금 나보고 햇병아리라고 했느냐!”

바타르의 몸에서 진득한 살기가 넘실댔다.

“몇 살 먹었냐?”

라는 물었다.

“칠천오백 살이다.”

“아직 젖비린내도 가시지 않은 놈이 어디서 반말이야, 자식아.”

“지, 지금 젖비린내도 가시지 않았다고 했느냐!”

“그랬다. 어쩔 건데?”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에고족.”

“지금 한번 해보자는 거냐?”

휙! 휙휙!

느닷없이 건틀릿에서 혈반이 튀어나와 바타르 앞으로 늘어섰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듣고 있던 금장생이 버럭 소리쳤다.

“그럼 좀만 한 게 깝치는데 두고 보라는 거냐?”

“나이 드신 분이 참으셔야지요. 그리고 이렇게 개인행동을 하시면 함께 생활하는 게 불가능합니다.”

“끙! 알았다.”

라는 혈반을 회수했다. 그리고 바타르를 보며 한마디 했다.

“운 좋은 줄 알아, 새퀴야.”

“아무튼 나이를 어디로들 처먹었는지, 나잇값을 좀 해라, 새끼들아!”

둘을 바라보고 있던 무혼이 툭 쏘아붙였다.

“……!”

“……!”

바타르와 라는 일순 할 말을 잃었다.

바타르는 칠천오백 년을 살았고, 라는 자신이 언제 태어났는지도 모를 정도로 오래 살았다. 그런데 인간에게 ‘새끼들아’라는 욕을 들은 것이다.

너무 어이가 없어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지, 지금 뭐라고 했느냐?”

먼저 정신을 차린 이는 바타르였다.

“왜, 내 말이 틀렸냐?”

“너 내가 누군지 잊은 게냐? 아니면 차원을 넘다가 머리가 이상해진 거냐?”

“니들 싸우는 걸 쳐다보고 있자니 울화통이 치밀어서 그런다.”

“저 새퀸 뭐냐?”

라가 바타르에게 물었다.

“인간이다.”

“그냥 인간이 아닌 것 같은데?”

“맞다, 절대 그냥 인간이 아니다. 저놈은…….”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오다 못해 고환처럼 덜렁거린다고?”

“맞다.”

“이것들 맛이 간 것 같지?”

“글쎄요. 저분은 워낙 정정해서…….”

금장생은 바타르를 턱으로 가리켰다.

“아냐. 노망난 것 맞아. 그게 아니라면 저 새끼가 이렇게 조용할 수가 없어.”

무혼 역시 턱으로 바타르를 가리켰다.

보통 골드 드래곤은 이성적이고 차분하다. 그러한 성격 덕분에 드래곤 종족의 수장인 총로드가 되곤 한다.

하지만 바타르는 다르다. 가장 급한 성격을 지닌 레드 드래곤보다 더한 다혈질로 알려져 있다.

여느 때 같았으면 벌써 주변이 날아갔을 텐데 오늘은 가만히 있다. 망령이나 기타 등등의 이유로 심경의 변화가 생기지 않았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너 여기에 무덤 자리 쓰고 싶냐?”

바타르가 살기를 쏟아 냈다.

“내 손에 뒈진 드래곤이 몇 명인 줄 알아? 그 새끼들도 다들 처음엔 너처럼 말했어, 자식아.”

“저 새퀴 드래곤 슬레이어냐?”

라가 바타르에게 물었다.

“아니다. 그랜드크로스 때 어둠의 드래곤 몇 마리 죽인 걸 가지고 저렇게 자랑질을 하는 거다.”

“지, 지금 그랜드크로스라고 했느냐?”

라는 깜짝 놀랐다.

“그랜드크로스를 알아?”

무혼은 금장생의 손목에 채워져 있는 건틀릿으로 시선을 주며 물었다.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정말 그랜드크로스가 왔느냐?”

라는 다시 물었다.

“그 바람에 샤이칸드리아 대륙 사람은 수백만 명이 죽었고, 드래곤도 멸종 지경까지 갔다.”

“맙소사! 어둠의 존재는, 그것들은 어떻게 됐느냐?”

라는 급하게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불안한 그림자가 잔뜩 깔려 있었다.

“그랜드크로스는 삼천 년 전에 일어났고 샤이칸드리아 대륙은 아주 평화로웠어. 그 개자식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지금도 아주 평화롭다. 지금 상황이 불편한 건 네 녀석뿐이다.”

바타르가 툭 쏘아붙였다.

“저놈이 왜 불편하지?”

라는 물었다.

“저놈이 없앤 크로노마스가 돌아왔거든.”

“크, 크로노마스가 돌아왔다고?”

“크로노마스 그 새끼를 알아?”

무혼은 라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내 동생을 죽인 놈인데 아주 잘 알지.”

“네 동생이 누군데?”

“히난시아.”

“히, 히난시아라고?”

무혼은 자신도 모르게 고함을 빽 내질렀다.

“히난시아를 알아?”

이번에는 라가 물었다.

“아는 정도가 아냐. 히난시아가 죽은 게 바로 나 때문이다.”

“맙소사, 그럼 네가 히난시아의 달링?”

“허!”

무혼은 멍한 얼굴로 라를 보았다.

설마 바람의 정령인 히난시아와 아는 자를 만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잠깐.”

바타르가 말을 끊었다.

“넌 새퀴야…….”

“일단 내 질문에 대답부터 해, 자식아. 수천 년 전부터 이곳에 살았던 놈이 어떻게 샤이칸드리아 대륙에서 일어난 일을 알고 있는 거지?”

“히난시아는 내 동생이라고 했잖아, 새퀴야.”

“네 동생이 어쨌다는 건데, 자식아.”

“우리 영혼족은 소멸되기 직전 자신과 가장 친했던 영혼을 찾아가서 작별 인사를 한다, 이 멍청한 놈아.”

“끙!”

바타르는 어깨를 으쓱했다. 라의 말을 듣자 영혼족의 특징이 이제야 생각이 났다.

“이제 알았냐?”

라는 윽박지르듯 말했다.

“알았다. 그보다 크로노마스가 살아났다고 하니까 질겁하던데 그 이유가 뭐냐?”

조금 전 상황을 떠올린 바타르가 물었다.

“히난시아 말이, 그놈이 모든 일의 원흉이라고 했다.”

“그건 나도 알고 무혼도 안다.”

“너희가 알고 있는 건 뭔데?”

라가 물었다.

“이놈의 반쪽이 크로노마스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벌인 일이라는 걸 알고 있단 말이다.”

바타르는 무혼을 가리켰다.

“그게 아니라는 거다.”

“그게 무슨 소리냐?”

무혼이 물었다.

“히난시아 말이, 그 모든 일을 꾸민 자는 갈릭이 아니라 크로노마스라고 했다.”

“정말이냐?”

무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히난시아는 본체는 크로노마스지만 그 안쪽에 있는 영혼은 갈릭 드 트란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런 그녀가 갈릭이 아니라 크로노마스라고 했다면, 그건 진짜 크로노마스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그랜드크로스를 이용해서 샤이칸드리아 대륙을 멸망시키려고 했던 자가 마룡 크로노마스였다는 거냐?”

“나는 자세한 건 모른다. 다만 히난시아 말이 그렇다는 거다. 그리고 이백 존체의 드래곤, 오백 명의 마법사, 오백 명의 드래곤 워리어, 오백 명의 신관, 오백 명의 팰러딘, 오백 명의 정령사와 그들과 계약한 정령, 오백 명의 드워프, 오백 명의 엘프가 마계로 간 것도 크로노마스의 농간이라고 했다.”

“…….”

무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자신은 크로노마스 덕분에 샤이칸드리아 대륙을 구했다고 여겼다. 그래서 늘 그에게 감사했다.

그런데 그가 그 모든 일의 원흉이라니.

너무 엄청난 사실 앞에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과거와 달라진 점이 없었느냐?”

바타르가 물었다.

“누구? 크로노마스?”

“그렇다.”

“아주 많았지.”

전에 갈릭의 영혼이 들어가 있을 때와 다른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우선 심적인 여유가 느껴졌고, 신중할 뿐 아니라 영리하기까지 했다.

많은 부분이 달랐지만 가장 이상했던 건 아스에게 집착하는 모습이었다.

과거 크로노마스는 아스에게 관심도 없었다. 그랬던 자가 비록 인질로 삼았다고 하지만 아스의 영혼을 지니고 있는 건 절대 갈릭 드 트란다운 행동이 아니었다.

그런데 라의 말을 듣고 보니 그의 모든 행동이 이해가 갔다.

“그럼 어떻게 되는 거냐?”

바타르가 무혼을 보며 물었다.

“어둠의 드래곤도 부활할 거라고 하더냐?”

무혼은 라를 보며 물었다.

“어둠의 드래곤의 영혼의 그릇을 가지고 있는 놈이 크로노마스라고 했다.”

“그럼 다 살아나겠군.”

무혼은 진저리를 쳤다.

그들을 없애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었는데.

자신 또한 그들을 없애기 위해 무리하게 익힌 마법 때문에 결국엔 요절했다. 그런데 그들이 다시 살아난단다.

“니미럴!”

무혼의 입에서 욕설이 비어져 나왔다.

그는 남아 있는 술을 전부 입안으로 들이부었다.

식도가 탈 정도로 독한 술이었지만 아무런 느낌도 오지 않았다.

“그 사실을 크로노마스가 알까?”

크로노마스는 자신이 어둠의 드래곤들의 영혼의 그릇이라는 걸 모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더 높다.”

“그건 그렇고, 그가 원하는 게 뭐라고 생각하느냐?”

바타르는 라를 보며 물었다.

“싸웠던 자들이 모르는 걸 내가 어떻게 알겠느냐?”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무혼은 시선을 돌려 금장생을 보았다.

금장생은 모닥불을 피워 놓고 불을 쬐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럼 무 형은 크로노마스 그자가 보내서 온 건가요?”

금장생은 물었다.

“응.”

무혼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중한 사람이 인질로 잡혀 있는 모양이군요.”

“내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여자가 잡혀 있어.”

“그랬군요.”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를 사랑해 본 적 있어?”

“어머니 말고는 없습니다. 앞으로도 없을 거고요.”

“그러면 내 마음을 절대 이해 못 해.”

“설사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고 해도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그렇지. 사랑의 크기는 모두 달라서 계량이 불가능하니까.”

“그럼 전쟁이 일어나는 건가요?”

“전쟁을 하기 위해 이곳으로 온 거니까.”

무혼은 다시 술병을 들었다.

“그럼 나는 돈을 많이 벌겠군요.”

“돈?”

“나는 장사꾼이거든요.”

“큭!”

무혼은 피식 웃었다. 금장생이 너무 순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의밉니까?”

“전쟁이 뭔지 모르는 것 같아서.”

“모든 것이 사라진다는 뜻인가요?”

“사라지는 것 이상이야. 인륜은 끝을 모르고 추락하고, 사람은 사라지고 포악한 짐승과 끝없는 절망만 남아. 죽은 자보다 산 자들이 더 힘들어지는 세상이 사막처럼 이어지고.”

“나는 큰 부자가 되겠군요.”

금장생은 싱긋 웃었다. 그리고 건틀릿을 빼 놓고 불타는 건물로 향했다.

그가 건틀릿을 빼 놓은 건 이야기를 끊기 싫어서였다.

“어디 가는 거냐?”

무혼이 물었다.

“술이 더 있어야 할 것 같아서요.”

“거긴 불길이…….”

무혼은 말끝을 흐렸다.

금장생이 다가가자 불길이 좌우로 밀려났다.

“불도 무서워서 도망가는 엄청난 무공을 지닌 녀석의 꿈이 돈이라니…….”

무혼은 어이없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저 녀석에게 돈은 너에게 아스와 같은 대상이다.”

“돈을 사랑한다는 거냐?”

“사랑이 아니라 삶이다.”

“미친…….”

그때 안으로 들어갔던 금장생이 나왔다.

그는 장포 앞자락을 보자기처럼 해서 들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천주가 가득 들어 있었다.

“그거 뭐냐?”

무혼은 물었다.

“술입니다.”

“술?”

“아주 비싼 거거든요.”

금장생은 헤벌쭉 웃었다.

무혼과 금장생은 다시 술잔을 기울였다.

“어떤 놈들인지 알아냈느냐?”

무혼은 바타르를 보며 물었다.

“천사의 흔적을 발견했다.”

“천사?”

무혼의 눈이 커졌다.

“그렇다.”

“천사면 신족을 말하는 거 아냐?”

“맞다.”

“신족은 샤이칸드리아 대륙에서도 일만 년 이전에 멸종했다고 아는데?”

“멸종한 게 아니라 사라졌다.”

“사라졌다는 건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 사라졌다는 말이다. 사실 신족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수만 명 정도였다. 그랬던 자들이 하루아침에 모두 사라졌다.”

“신족에 대해서는 내가 안다.”

라가 끼어들었다.

“말해 봐라.”

무혼은 라를 보았다.

“장생, 나를 다시 끼워라.”

라는 금장생에게 말했다.

“내 내기가 없으면 살 수 없나 보죠?”

금장생은 빙긋 웃었다. 라에 대해 새롭게 알아낸 사실이었다.

“그래서 여차하면 날 버릴 거냐?”

“조금 전처럼 영감님 마음대로 행동하면 고물로 팔아 버리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죠.”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무기를 버리겠다고?”

“싸움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영감님이 필요할지 모르지만 전 아니거든요. 만약 돈을 버는 데 영감님이 방해가 된다고 생각되면 바로 버릴 겁니다.”

“내게 원하는 게 뭐냐?”

“나대지 말아 줬으면 합니다.”

“나대지 말라고?”

“조금 전 저분과 실랑이를 벌일 때와 같은 상황을 말하는 겁니다. 나는 누군가가 허락 없이 내 물건을 사용하는 걸 가장 싫어합니다.”

“나는 네 물건을 사용한 적 없다.”

“제 내기를 사용한 걸 벌써 잊은 모양이군요.”

“마음대로 사용해도 좋다고 말한 사람은 너다.”

“그건 일상적인 대화를 할 때를 말한 겁니다. 누군가를 공격할 용도는 절대 아닙니다. 아무리 화가 나도 남의 물건엔 손대지 마십시오. 남의 물건에 손을 대는 자를 도둑놈이라고 하고, 나는 도둑놈과 함께 살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알았다.”

“좋습니다.”

금장생은 건틀릿을 끼웠다.

“자식, 쫀쫀하기는.”

라는 투덜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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