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188)
“자, 잘 봐!”
금장생은 바닥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발자국이 깊숙이 찍혀 있었다. 삼백예순다섯 개로 이루어진 그것은 군림천하보였다.
금장생은 맨 앞에 있는 발자국부터 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사노왕 먼저 해!”
군림천하보를 펼치며 소리쳤다.
그러자 불여하가 곧바로 몸을 날렸다.
그녀는 강시 복장을 하고 도관을 쓰고, 이마에는 부적을 붙이고 있었다.
“부적이 불편하면 떼도 돼.”
처음에 금장생은 부적이 붙을 거라고 생각지 않았다. 강시대법을 펼치긴 했지만 저들은 데스 나이트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부적은 풀 같은 접착제로 붙이는 게 아니고 붙이는 대상이 강시면 그냥 달라붙는다. 하지만 살아 있는 사람의 몸에는 절대 붙지 않는다.
그런데 데스 나이트 모두의 이마에 부적이 달라붙었다.
그건 곧 천마이혼대법을 통하여 저들이 강시가 돼 가고 있다는 걸 뜻했다.
강시화가 진행되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아직까지는 나쁘지 않았다.
불여하가 나아가는 속도는 금장생보다 몇 배 느렸지만 비교적 정확하게 발자국을 따라 했다.
불여하에 이어 마노왕 적사월이 군림천하보 발자국을 따라 달렸다. 어설픈 동작이었지만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마무리했다.
그 후로 나머지도 순서대로 군림천하보 발자국을 따라 달렸다.
“계속해.”
지시를 내려 놓고 한편에 앉아 육포를 씹었다.
―뭐 하는 거냐?
라가 물었다.
“무공이잖습니까?”
―저게 무공인지 몰라서 묻는 게 아니다. 내가 알고 싶은 건, 알아먹지도 못하는 걸 굳이 가르치는 이유다.
“사람은 어떤 걸 익힐 때 머리와 몸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한다는 거 아세요?”
―안다.
“그럼 둘 중 어떤 게 더 효과가 있는지도 아세요?”
―나는 육체를 가져 본 적이 없다.
“몸으로 기억하는 게 더 효과가 있고 오래갑니다.”
―하지만 이론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위력은 절반도 나오지 않는다는 건 상식이다.
“그래서 신법이면서 보법인 군림천하보를 택한 겁니다.”
―군림천하보는 보통 보법과 다르단 말이냐?
“크게 다르진 않습니다. 원래 신법이나 보법은 창안될 때 내공 소모를 최소화하도록 돼 있습니다. 그런데 일부 신법, 소위 최고의 신법이라 부르는 것들은 내공 소모를 최소화하는 것은 물론이고 운기행공 효과까지 내기도 합니다. 즉, 신법을 펼치면서 내상을 치료할 수도 있다는 거죠. 물론 그 효과는 직접 치료를 받는 것보다는 약합니다. 하지만 전투 와중에 그런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면 엄청난 우군을 얻는 거와 같은 거죠.”
―군림천하보가 그렇다는 말이구나.
“네.”
―그럼 저들에게 무슨 효과가 있느냐?
“군림천하보를 펼치면 팔과 다리뿐만이 아니라 내기도 움직이게 됩니다. 암흑 마기가 됐건 어둠의 힘이 됐건, 그것들은 신법에 따라 움직이며 단전을 치게 될 테고, 굳은 단전은 조금씩 녹게 될 겁니다.”
―저들을 인시로 만들 참이냐?
“시작이 다르니까 그렇게까지 되진 않을 수도 있습니다.”
―시작이 다르다는 건 무슨 뜻이냐?
“처음부터 강시로 제강된 자들이 아니라는 겁니다.”
―인시는 아니더라도 의사소통이 되는 그런 상태는 만들고 싶다는 거구나?
“네. 하지만 꿈으로 끝날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불여하 일행을 바라보았다.
여덟 명은 쉬지 않고 군림천하보를 펼쳤다. 수십 번도 더 펼친 것 같은데 동작은 조금도 달라진 게 없었다.
“첫술에 배부른 건 없으니까.”
금장생은 육포를 먹으며 기다렸다.
그가 그곳을 떠난 건 두 시진 후였다. 그 두 시진 동안 불여하 일행은 한 번도 쉬지 않고 군림천하보를 펼쳤다.
그 후로도 금장생은 시간만 나면 데스 나이트들에게 군림천하보를 가르쳤다.
―왜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거냐?
어느 날 라가 물었다.
“이것 말고는 딱히 할 것도 없잖습니까.”
금장생이 군림천하보를 가르치는 데 몰두하는 가장 큰 이유였다.
아무튼 데스 나이트들에게 군림천하보를 가르치면서 감숙성까지 왔다.
객잔에서 쉬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불여하 일행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별수 없이 전에 묵었던 강시 객잔으로 향했다.
그는 먼저 데스 나이트들을 강시 객잔으로 데리고 가 목욕을 시켰다.
이들은 굳이 목욕을 시켜 줄 필요가 없었다. 데스 나이트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목욕하는 법을 기억하고 있었다. 금장생이 가르쳐 준 건 조두를 사용하는 방법뿐이었다.
목욕이 끝나자 방에 뉘어 놓고 밥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향했다.
추운 날씨 탓인 듯 손님은 두 명뿐인데 그들도 일행이었다.
그들은 바로 사천을 떠나 감숙성으로 들어온 무혼과 바타르였다.
무혼이 바타르와 단둘이 감숙성으로 온 건 올해 천왕지회가 열릴 장소인 낭인성을 둘러보고 강호 정세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음식이 많은데 함께하겠습니까?”
무혼이 금장생을 청했다.
“그럼 감사하죠.”
금장생은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공짜 점심은 없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지만 청한 사람은 여기서 처음 보았고, 객잔을 나서면 다시 만날 일도 없다. 완전 공짜 점심이었다.
게다가 청한 자가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미남이다.
사내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잘생기고 있어 보이는 사내가 청하자 공연히 기분이 좋았다.
“장생이라고 합니다.”
의자에 앉기 전에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무혼입니다.”
무혼은 금장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가 금장생을 청한 건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 번째는 옷이다.
환수각을 점령하고 정비하면서 중원에 대해 공부를 했다.
그가 한 공부 중 가장 집중했던 건 강신술사였다. 언젠가 본래 몸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강신술사가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강시 객잔에 방을 잡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밥을 먹고 있을 때 들어온 강신술사에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로 흥미를 가진 건 금장생의 심장이었다.
무공은 익힌 흔적이 전혀 없는데 심장에 엄청난 힘이 모여 있었다.
그가 아는 한 저런 힘은 6~7클래스 마법사밖에 없다. 중원인이 마법을 익혔을 리가 없으니, 그 힘에 대해 호기심이 일었다.
“무혼요?”
금장생은 깜짝 놀랐다.
동명이인이겠지만 역천영면마진 안에서 보았던 무혼이란 이름을 가진 자를 보자 기분이 묘했다. 게다가 혼이 없다는 뜻의 무혼이란 이름은 흔하지도 않다.
“아는 이름입니까?”
“전에 본 적이 있어서 그럽니다. 제가 아는 무혼은 삼백 년 전 사람이었거든요.”
“삼백 년 전이라고요?”
이번엔 무혼이 놀랐다.
“왜 그러십니까?”
“아, 아닙니다.”
무혼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삼백 년 전 사람이라고 굳이 말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중원 사람 맞습니까?”
금장생은 무혼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는 중원 사람의 특징이다. 하지만 코와 입은 중원보다 서역인에 가깝다.
그의 얼굴에서 서역인에 가장 가까운 부분은 눈까풀의 크기다. 중원인은 눈까풀이 큰 반면 서역인은 눈을 뜨면 눈썹 바로 아래로 파묻힌다. 그런데 무혼이란 사내가 그랬다.
“내가 서역인 같습니까?”
무혼은 되물었다.
“모르겠습니다. 얼굴은 서역인 같은데 이름도 그렇고 언어를 구사하는 것도…… 서역인은 아무리 중원에 오래 살아도 무 대협처럼 중원어를 능숙하게 구사하지 못하거든요.”
“그럼 서역인의 피가 섞인 중원인인가 봅니다.”
“혼혈이란 말씀이군요.”
그때 주인이 숟가락과 젓가락 그리고 술잔을 가져왔다.
“혹시 천주 있습니까?”
금장생은 주인을 보며 물었다.
“있습니다. 그런데 가격이…….”
“가격은 걱정 말고 가져다주세요.”
“알겠습니다.”
주인은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술 한 병을 가지고 나왔다.
“이게 요즘 가장 잘나가는 술입니다. 식사는 무 대협이 샀으니까 술은 제가 사겠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금장생은 바타르를 가리켰다.
전에 카밀이 입고 있던 것과 비슷한 형태의 옷을 입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내 친구입니다. 이름은 바타르고.”
“처음 뵙습니다, 바 대협. 그런데 그 로브 아주 멋집니다.”
금장생은 무혼의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저 옷이 로브라는 걸 어떻게 아십니까?”
“전에 함께 일하던 사람이 서역인이었는데 그가 입고 있더군요. 그래서 알게 됐습니다.”
“그렇군요. 한 잔 하시지요.”
무혼은 술잔을 들었다.
그러자 금장생도 술잔을 들었다.
“만남을 위하여.”
둘은 의미 없는 건배사를 외치며 술잔을 비웠다.
“오!”
무혼은 깜짝 놀랐다.
별다른 생각 없이 술을 마셨는데 지금까지 마셔 본 어떤 술보다 나았다. 과거 샤이칸드리아 대륙에 처음 도착했을 때 아스로부터 받은 ‘드래곤의 눈물’에 비견될 정도였다.
“술 괜찮죠?”
금장생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어렸다.
술맛이 전에 마셨을 때보다 한 단계 더 발전했다는 게 느껴졌다. 마나부가 합류하면서 생긴 변화가 분명했다.
“이 술 얼마 합니까?”
금장생은 술병을 들어 올리며 주인에게 물었다.
“여섯 냥씩 받습니다.”
“열 냥을 받아도 될 것 같습니다.”
“술맛으로 따지자면 열 냥도 아깝지 않지만 마시는 분들의 주머니 사정도 생각해 주어야지요.”
“그렇죠.”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강신술삽니까?”
무혼은 빈 술잔에 술을 따르며 물었다.
“네.”
“제강도 할 줄 압니까?”
“제강을 할 줄 모르면 강신술사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제강도 하고 부적도 쓰고, 운구도 합니다.”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그 전에 먼저 이것부터 좀 먹고 이야기를 하도록 하지요.”
무혼은 음식을 가리켰다.
“언제 그 이야기를 하나 했습니다.”
금장생은 빙긋 웃고 앞접시에 음식을 덜어 입으로 가져갔다.
시장이 반찬인지는 몰라도 음식 맛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드래곤이다.
열심히 젓가락질을 하고 있는데 라의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들려왔다.
‘드래곤이 뭡니까?’
금장생은 음식을 먹으며 물었다.
―방문자들의 세계에서 모든 종족의 정점에 있는 자들이 드래곤이다.
‘어떻게 생겼습니까?’
―생김새는 공룡과 비슷하지만 크기는 완전체가 됐을 때 250미터, 즉 중원의 길이로 치면 팔십 장이 약간 넘는다.
‘지금 팔십 장이라고 했어요?’
―그렇다.
‘그럼 저 모습은…….’
―마법을 사용하여 인간의 모습으로 바꾼 상태다.
‘에이, 말도 안 돼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팔십 장이나 되는 자가 저렇게 작아집니까.’
―지금은 믿지 못하겠지만 언젠가는 내 말을 믿게 될 게다. 그나저나 드래곤이 들어와 있다니 놀랍구나.
‘그러니까 드래곤인가 하는 자는 이세계 종족이라는 거죠?’
―그렇다.
‘전에 어디론가 떠났던 백리장광 장주가 돌아왔다는 말이 되는 거군요.’
―그런 모양이다.
‘나야 뭐 일거리가 늘어나니까…….’
―상관없다는 거냐?
‘장사꾼이잖습니까.’
―이기적인 자식.
‘일단 좀 먹겠습니다.’
금장생은 음식 먹는 것에 집중했다.
잠시 후 세 명 앞에 놓인 접시가 전부 비워졌다.
무혼은 주인에게 탁자를 치워 달라고 했다. 그런 다음 술을 더 주문했다.
그리고 금장생을 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알고 싶은 건, 영혼이 다른 육체 속으로 들어가서 자리를 잡았어도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금장생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는 무혼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한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영혼이 빠져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영혼이 저승으로 가지 않고 다른 몸으로 들어가서 새로운 삶을 산 겁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자신이 죽었던 곳으로 가게 됐는데, 썩어 없어졌어야 할 시체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겁니다. 이제 사내는 자신의 본래 몸을 찾고 싶어 합니다. 가능하겠습니까?”
“혹시 그거 본인 이야깁니까?”
금장생은 물었다.
“그렇습니다.”
무혼은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