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186)
만남
―글에서 힘이 느껴지지 않느냐?
“느껴집니다. 그것도 아주 강한 힘이.”
―마법을 펼칠 수 있게 해 주는 힘을 가진 글자라고 보면 된다.
“그러니까 주문이란 말이군요.”
―주문은 뭐냐?
“주문은 주술적인 힘을 문자나 혹은 말로 표현한 걸 말합니다. 귀신을 쫓아낼 때 많이 쓰이고, 저 같은 경우엔 강시를 제강할 때…….”
금장생은 강시 만드는 법을 간단하게 설명해 주었다.
―같다.
이야기를 듣고 난 라가 말했다.
“그렇다면 강시를 없애는 방법으로 언데드를 없앨 수도 있다는 거네요?”
―이미 시험해 본 것 같은데 아니냐?
“그때는 얼결에 한 거라 다시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금장생은 몸을 돌려 공간을 보았다.
공간은 상당히 넓었다.
공간의 중앙에는 커다란 원이 연속해서 새겨져 있고 원 안쪽에는 별 모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안쪽에 관 형태의 물체 여덟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금장생은 그곳으로 걸어갔다.
“저 문양은 뭡니까?”
―펜타그램이라고 부르는 마법진이다.
“일종의 진식이란 말이네요?”
―그렇다.
“저 관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진식인가요?”
―그럴 가능성이 높다.
“진식은 어떻게 발동하는지 아십니까?”
―네 발치에 뭐가 있느냐?
“검이 한 자루 놓여 있습니다. 그릇 같은 것도 있고요.”
―그 그릇에 네 피를 받아라.
“제 피요?”
―검과 그릇이 있다는 건 피를 담으란 뜻 아니겠느냐?
“다 받아야 할까요?”
금장생은 그릇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릇은 상당히 컸다.
―겁이 나느냐?
“그릇이 크잖습니까.”
―클!
라는 픽 웃었다.
“그런데 피를 주면 제가 무엇을 얻게 될까요?”
―낸들 알겠느냐? 나 같으면 일단 피를 담은 후에 상황을 지켜보겠다.
“이렇게 큰 그릇에 피를 가득 채우려면 얼마나 많이 빼야 하는지 아세요?”
―그럼 안 할 참이냐?
“그러자니 궁금해 죽겠고. 에라, 모르겠다.”
금장생은 검을 들었다. 그리고 손목을 스윽 그었다. 그러자 피가 주르르 떨어졌다.
금장생은 그릇 가까이 손목을 가져다 댔다.
피는 금세 채워졌다.
다 채워지자 금장생은 얼른 지혈을 했다. 그러고는 그릇을 지켜보았다.
잠시 후 그릇을 채우고 있던 피가 줄어들었다.
“어디로 가는 거죠?”
금장생은 그릇 주위를 살폈다.
“아!”
금장생의 눈이 커졌다.
그릇에서 흘러 나간 피는 바닥에 새겨진 홈을 따라 이동했다. 두 개의 원과 별 문양이 빠르게 피로 채워졌다.
“내 피는 저렇게 많지 않은데.”
금장생은 신기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심하게 엄살을 떨긴 했지만 그가 그릇에 담은 피의 양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런데 라가 펜타그램이라고 하였던 홈이 전부 피로 채워진 것이다.
파앗!
느닷없이 펜타그램에서 푸른 광채가 솟구쳤다.
그사이 금장생의 피는 다시 이동하더니 관으로 보이는 물체 위로 타고 올라갔다. 그리고 여덟 조각으로 나뉘어 안으로 스며들었다.
꿀꺽!
금장생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덜컹!
잠시 후 일제히 뚜껑이 열렸다. 그리고 사람으로 보이는 자들이 상체를 일으켰다.
여덟 개의 관에서 상체를 일으킨 자들은 모두 투구를 쓰고 있었다.
그들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뭐죠?”
금장생은 물었다.
―저들은 에고족의 그림자 중 한 부류로, 데스 나이트라고 부른다.
“어떤 특징을 지녔습니까?”
―소드 마스터, 즉 강기의 경지에 달한 전사가 죽을 때 깊은 원한이나 살고자 하는 의지를 품고 있으면 그가 생전에 지녔던 기가 어둠의 힘으로 변하면서 자아를 갖게 되고, 전사의 영혼을 붙잡아 두게 된다. 그 결과 절대적인 힘을 지닌 전사로 부활하게 된다.
“저들이 영감님과 다른 점이 뭡니까?”
―나는 이성적인 판단을 하는 반면 저들은 불가능하다.
“영감님은 영혼의 힘이 더 강한 반면 저들은 어둠의 힘이 더 강하다는 말이군요.”
―이해가 빠르구나.
“만일 영혼의 힘을 더 강하게 만들면 어떻게 됩니까?”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해지겠지.
그사이 데스 나이트들은 하나둘 관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금장생 앞으로 다가왔다.
“어떻게 강해진다는 거죠?”
―데스 나이트들의 마나는, 아니 기는…….
“알아들으니까 그냥 마나라고 하세요.”
―안 그래도 그럴 참이었다. 저 녀석들의 마나는 어둠의 힘이 더해지면서 생전보다 더 많아졌다. 그건 더 강해졌다는 걸 뜻한다. 하지만 전투력은 그렇지 않다.
“더 약해졌다는 건가요?”
―아무래도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하니까 대처 능력이 떨어진다고 봐야 하지 않겠느냐.
“우리는 그걸 임기응변이라고 합니다.”
척! 척척! 척!
데스 나이트들이 금장생의 반 장 앞에 멈춰 섰다.
“뭐라고 한마디 해 줘야 하는 건가요?”
―해 보려무나.
“투구를 벗어 봐.”
금장생은 데스 나이트들을 보며 말했다.
그러자 데스 나이트들은 전부 투구를 벗었다.
“제 말을 듣는데요?”
―네가 저들의 주인으로 선택된 모양이구나.
“그런데…….”
금장생은 데스 나이트들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얼굴이며 피부가 모두 검었다. 그런데 얼굴은 서역인의 얼굴이 아니라 코가 낮고 광대뼈가 약간 튀어나온 전형적인 중원인이었다.
“데스 나이트는 피부가 검나요?”
라에게 물었다.
―그렇다.
“그럼 저들은 중원인이군요.”
―그렇게 생각하느냐?
“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펜타그램 밖으로 나오라고 손짓을 했다.
―저 녀석들에게는 말로 해야 한다.
“모두 나오세요.”
금장생은 나직하게 말했다.
그러자 데스 나이트들이 펜타그램 밖으로 나와 금장생 앞으로 늘어섰다.
금장생은 천마구유이혼대법을 펼쳤다. 그러자 귀안이 더욱 강해지면서 데스 나이트가 좀 더 명확하게 보였다.
“역시…….”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데스 나이트 역시 강시와 마찬가지로 영혼이 눈에 보였다.
“내가 보이세요?”
스산한 목소리가 금장생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러자 데스 나이트가 움찔했다.
금장생은 데스 나이트의 영혼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잠시 후 영혼의 울림이 전해져 왔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인 듯, 영혼은 잔뜩 긴장하고 있는 듯했다.
“누가 가장 나이가 많죠?”
금장생은 다시 물었다.
―데스 나이트는 말을 하지 못한다.
라가 말했다.
“당신네들의 주인으로서 명령하는 겁니다. 나이가 가장 많은 사람이 누굽니까?”
금장생은 다시 물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데스 나이트 중 한 명이 고개를 돌려 뒤편을 보았다.
금장생의 시선이 데스 나이트 뒤편으로 향했다.
“관에 뭔가가 있다는 말이군요.”
금장생은 펜타그램 안으로 들어가 관 앞으로 갔다.
그의 예상대로였다. 가장 오른편에 있는 관 안에 석판 다섯 장이 들어 있었다.
금장생은 그 석판을 챙겨 들고 펜타그램 밖으로 나와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맨 위에 있는 석판을 들었다.
우리를 이용해서 놈들을 없애길 간절히 바란다.
석판 가장 위에 적힌 글이었다.
갑골문자로 씌어 있었지만 금장생이 읽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첫 구절을 읽은 금장생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다음으로 시선을 주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기록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이걸 기록하지 않으면 아무도 우리가 존재했다는 걸 모를 것이기에.
그들이 우리가 사는 곳에 나타난 건 삼백 년 전이었다.
처음에는, 그들은 우호적이었다. 우리는 아무런 의심 없이 그들을 받아들였다.
그자들이 변하기 시작한 건 이십 년 후였다.
마법과 강한 무력을 바탕으로 우리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 모두를 노예로 삼았다.
아니, 우리뿐만이 아니었다. 조선과 동영인들까지 모두 노예로 삼았다.
그동안 우리를 우호적으로 대했던 건 어느 정도 힘을 가졌는지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전지전능한 신처럼 행동했다.
온갖 유희를 즐기다가 더 이상 재미있는 게 없자 우리를 싸움터로 내몰았다.
수만 명이 참여한 대규모 전쟁이 한낱 재미로 치러졌다.
수만 명이 죽었지만 그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구성했던 노예가 전부 죽으면 또 다른 노예를 투입했다.
그렇게 삼백 년의 세월이 흘렀다.
수천수만 번의 전쟁은 우리를 전사로 만들었다. 그리고 더 이상 노예로 살 수 없다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다행히 그들은 우리를 노예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즉, 노예는 반란의 꿈조차 꾸지 못한 미개한 자들이라고 간주했다.
자신들이 쥐여 준 무기로 반란을 일으킬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우리는 전쟁을 하면서도 서로 연락을 했다.
그리고 기회를 엿봤다.
전쟁이 격렬해질수록 그들은 우리 손에 최고의 무기를 쥐여 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타이탄이라고 부르는 철갑거인까지 우리 손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들은 철갑거인만큼은 우리에게 완전하게 맡기지 않았다. 철갑거인 탑승자에게는 특수한 마법을 걸어 절대 배신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가한 금제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을 찾기에 골몰했다.
그러다 마침내 한 가지 방법을 찾아냈다. 그건 바로 우리가 언데드가 되는 거였다.
언데드는 완전히 죽었다고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철갑거인과 맺은 계약이 끊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산 상태도 아니기 때문에 그들이 가한 금제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야말로 완벽하게 숨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들은 노예들의 왕인 우리에게 가장 강한 철갑거인을 맡겼다.
이 녀석들만 우리 걸로 만들 수 있다면, 아니 그들의 편에 서지 않게 할 수만이라도 있다면, 그들과 전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를 찾지 못하겠지만 우리 후예는 여길 찾아올 테고 피의 시험을 받게 될 것이다.
그 시험에 통과하면 그는 우리의 주인이 될 테고, 우린 적을 없애는 데 선봉에 서게 될 것이다.
부디 우리를 깨워 그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나는 마노왕魔奴王 적사월이다. 철갑거인 렉탄의 주인이다.
나는 화노왕火奴王 금웅이다. 철갑거인 카루라의 주인이다.
나는 해노왕海奴王 혁장운이다. 철갑거인 타호너의 주인이다.
나는 전노왕戰奴王 묵천야다. 철갑거인 블루나이트의 주인이다.
나는 혈노왕血奴王 신무다. 철갑거인 레드선의 주인이다.
나는 철노왕鐵奴王 고태백이다. 철갑거인 타바토르의 주인이다.
나는 사노왕邪奴王 불여하다. 철갑거인 카바야의 주인이다.
나는 암노왕暗奴王 염라다. 철갑거인 데스퍼의 주인이다.
여덟 명의 사연이 적힌 석판이 네 장이고 한 장에는 부리는 방법이 적혀 있었다.
―데스 나이트들의 이름이 나와 있느냐?
“네.”
―내가 아는 자들일지도 모르니까 불러 봐라.
금장생은 석판에 나와 있는 이름을 차례로 불러 주었다.
―마지막 노예의 왕 이름이다.
“저들이 이곳에 철갑거인을 숨기면서 전란의 시대가 시작됐단 말이군요.”
―그렇다. 그 당시 노예들이 팔장군을 보유했다면 전란의 시대는 더 빨리 끝났을지도 모른다.
“후손들이 발굴하기를 바라고 데스 나이트가 된 것 같은데 실패로 돌아간 모양이네요.”
―그런 것 같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