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180)
만리만년향
“맙소사!”
적지영뿐만이 아니었다. 적풍영과 적운영의 얼굴도 해쓱해졌다.
“그, 그럼 그자는……?”
적풍영은 부들부들 떨며 적지영을 보았다.
수십 년 동안 함께했던 적지영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완벽한 역용술은 유마환용대법뿐이고, 그 무공을 익힌 자는 마왕 자리에 앉아 있는 가짜가 유일하다.
자신들은 가짜 마왕에게 최후의 보루마저 털어 주고 만 것이다.
“누님!”
적운영도 적지영을 보았다.
“무슨 일입니까?”
안으로 들어온 유덕인이 물었다.
“조금 전에 네가 여기에 왔다 갔다.”
적지영이 말했다.
“제, 제가요?”
유덕인은 의아한 얼굴로 손끝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정확하게는 너로 변장한 마왕이다.”
“그가 왜…….”
“우리 껍질을 벗겨 가기 위해 온 것 같구나.”
“천장의 껍질이라면 어떤 걸 말하는 겁니까?”
“내가 숨겨 놓은 돈과 비급들이다.”
“마왕이 그걸…….”
“유 부천장은 경공에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강잡니다, 누님. 서두르면 마왕보다 먼저 도착할 수도 있습니다.”
적풍영이 다급하게 말했다.
“마왕 그놈의 무공을 알면서 그런 말을 하느냐?”
“그렇다고 시도조차 해 보지 않고 포기할 수는 없잖습니까.”
“경공에는 자신 있습니다, 천장. 맡겨 주십시오.”
유덕인이 자신 있는 얼굴로 말했다.
“알았다.”
적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세 사람의 비밀 창고에 대해 말해 주었다.
“비급은 네가 가져도 좋다.”
적지영은 덧붙였다.
보통 때 같으면 비급을 넘긴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지금은 찬밥 더운밥 따질 때가 아니었다.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서 돈을 가져와야 하니까.
“바로 다녀오겠습니다.”
유덕인은 바로 밖으로 나갔다.
파앗!
대문으로 나가는 시간도 아까운 듯, 곧바로 담을 향해 몸을 날렸다.
막 담을 넘으려는 순간 강한 기운이 가슴으로 쏘아져 왔다.
“헉!”
퍼억!
신음에 이어 둔탁한 소리가 유덕인의 가슴에서 터져 나왔다.
“커억!”
유덕인은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으로 나뒹굴었지만 곧 벌떡 일어났다.
“쳐라!”
동시에 살기 어린 외침과 함께 수십 명이 담을 넘었다.
“저, 적이다!”
유덕인은 고함을 내질렀다.
“적이라고?”
적지영은 질겁했다. 그녀는 시선을 들었다.
굳이 적을 찾기 위한 노력도 필요 없었다. 검은 옷을 입은 자 수십 명이 담을 넘어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노, 놈이 보낸 자들입니까?”
적풍영이 잔뜩 겁먹은 얼굴로 물었다.
무공을 잃기 전이라면 적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자들이 온다고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양민으로 변한 상태. 적이라는 말에 당당할 수가 없었다.
“서천왕부 무인은 아닌 것 같다.”
적지영은 고개를 저었다.
창! 창창창! 창창!
“크악!”
“아악!”
“으아악!”
병기 부딪치는 소리에 이어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양측이 쓰러지는 수는 거의 비슷했다.
“보통 자들이 아닙니다, 누님.”
창가로 다가간 적풍영이 말했다.
“아무래도 내가 나가 봐야 할 것 같다.”
적지영은 곧바로 몸을 날렸다.
전장에 당도한 적지영은 무자비하게 무공을 펼쳤다.
“크아아악!”
“으아아악!”
“아아아악!”
그녀의 양팔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여기저기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절대적인 수세에 몰려 있던 서천장 측은 금세 안정을 되찾았다.
“저 여자는?”
제진은 적지영을 보았다.
부하들을 격살하고 있는 적지영은 파군룡에게 들은 것보다 훨씬 강했다.
―하독은 했느냐?
제진은 부하에게 전음을 보냈다.
그는 만일에 대비해서 적지영 일행이 머물던 방에 산공독을 뿌리라고 지시를 내려 둔 상태였다.
―했습니다.
부하의 대답이 들려왔다.
“그렇다면 우리 생각보다 더 강하단 소린데…….”
제진의 시선이 적지영을 좇았다.
그사이에도 적지영은 전후좌우로 움직여 다니며 전수대 대원들에게 살수를 펼쳤다.
‘시간을 끄는 수밖에 없겠네.’
제진은 적지영 쪽으로 이동했다.
“대원들은 물러나라!”
제진은 버럭 소리쳤다.
그러자 전수대 대원들이 뒤편으로 이동했다.
“웬 놈들이냐!”
적지영은 차가운 얼굴로 물었다.
“처음 뵙습니다. 저는 제진이라 합니다.”
제진은 한 걸음 앞으로 나가며 고개를 숙였다.
“제진?”
적지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이름은 처음이겠지만, 전수대 대주 독사라고 하면 아실 겁니다.”
“전수대라면? 천중전장?”
“드디어 아셨군요.”
제진은 활짝 웃었다.
“천중전장에서 우리를 공격하는 이유가 무엇이더냐?”
“저런, 오늘 날짜도 모르고 있는 걸 보면 가는 세월이 그다지 아쉽지 않은가 봅니다.”
“날짜?”
“제 말은, 당신께서 빌려 가신 돈을 변제할 날짜가 지났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돈을 갚지 않을까 봐 공격을 한다는 거냐?”
“당신을 비롯한 세 사람은 빈손으로 쫓겨났다고 들었습니다.”
“시간을 좀 더 주면 이자까지 쳐서 모두 갚을 거다.”
“제날짜에 돈을 갚지 않은 자들을 찾아가면 뭐라고 하는 줄 아십니까? 백이면 백 모두가 방금 당신이 한 말과 꼭 같은 소리를 합니다. 시간을 좀 더 주면 반드시 갚을 거라고요. 물론 이자도 확실하게 계산할 거라고 하지요. 하지만 맹세컨대 나중에 돈을 갚는 빚쟁이는 한 명도 없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돈을 갚을 시간이 아니라 도망칠 시간이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
“저희 천중전장에서 빌려 간 돈 사백오십만 냥에 이자 오십만 냥을 합쳐 오백만 냥을 주시면 바로 돌아가겠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세 분은 우리와 함께 천중전장으로 가 주셔야 합니다. 물론 혈도를 눌러 무공을 펼칠 수 없는 상태라야 하고요.”
“우리를 데려가면 돈을 받아 낼 수 있는 확률이 더 줄어든다는 걸 아느냐?”
“돈을 받아 낼 걱정까지 해 주지는 않아도 됩니다. 돈은 우리가 받아 낼 거니까요. 세 분은 그저 따라오기만 하면 됩니다.”
“못 가겠다면?”
“결국엔 따라가게 될 겁니다.”
“난 서천왕부 서천장이다.”
“서천장 아니라 왕부 주인이라고 해도 전수대의 표적이 된 이상 천중전장으로 가야 합니다.”
제진은 오른손을 앞으로 휘둘렀다.
“차앗!”
“타하!”
“하아!”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전수대 대원들이 일제히 몸을 날렸다.
“네놈들은 단순한 전장 호위가 아니구나.”
적지영의 얼굴이 굳어졌다.
보통 불법적인 전장에서 일하는 자는 조폭이 대부분이다. 양민들에게 빌려준 돈을 받는 덴 정식으로 무공을 익힌 무인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설사 무공을 익혔다고 해도 삼류다.
그런데 저들은 다르다. 체계적으로 훈련을 받고 무공을 익힌 자들이다.
저런 자들을 백 명이나 동원할 수 있다는 건 천중전장이 단순한 전장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네놈들도 숨길 게 많다는 뜻일 터, 일단 네놈들을 전부 잡아 놓고 장주와 협상을 하겠다.”
적지영은 내기를 끌어 올렸다.
“헉!”
그녀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내기가 끌어 올려지지 않았다. 단전이 말라 버린 것처럼 텅 빈 상태였다.
“구, 군자산!”
적지영은 비명처럼 소리쳤다.
군자산은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만 내기를 사방으로 흩트려 무공을 펼칠 수 없게 하는 독이다.
“우린 군자산이 아니라 기폐산을 사용합니다. 기폐산은 군자산보다 약간 개선된 산공독입니다.”
제진은 빙그레 웃으며 적지영 앞으로 가 혈도를 눌렀다. 그리고 서천왕부 무인들을 향해 소리쳤다.
“너희 주인을 살리고 싶으면 무기를 버리고 혈도를 눌러라!”
“억!”
“헉!”
“어?”
서천장 무인들은 질겁했다.
그들은 적지영이 잡힐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마왕을 꿈꿨던 사람이 그녀였다. 그녀가 개입한 이상 금세 자신들의 승리로 끝날 거라고 확신했다.
“산공독이다.”
유덕인과 눈이 마주치자 적지영이 말했다.
“비겁한 놈들!”
유덕인은 제진을 보며 이를 갈았다.
“나는 정당한 죽음보다, 비겁한 짓을 하더라도 사는 게 더 좋습니다.”
제진은 싱긋 웃었다. 그리고 차갑게 소리쳤다.
“당장 혈도를 누르지 않으면 이 계집을 죽이겠다!”
그는 적지영의 목을 틀어쥐었다.
“커억!”
“머, 멈춰라!”
유덕인은 다급한 얼굴로 소리쳤다.
“혈도를 눌러라!”
제진은 다시 소리쳤다.
유덕인 일행은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의 혈도를 눌렀다.
“안으로 들어가서 두 명을 잡아 와라!”
서천장 무인들이 모두 혈도를 누르자 제진은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전수대 대원들은 안으로 뛰어들어 갔다.
잠시 후 적풍영과 적운영 형제가 전수대 대원들에게 끌려 나왔다.
“반항도 안 해?”
제진은 적풍영을 끌고 나온 부하를 보며 물었다.
“이자들은 반항할 형편이 아닙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둘 다 내공을 잃었습니다.”
“내공을 잃어?”
제진은 의아한 얼굴로 적풍영과 적운영 앞으로 갔다. 그리고 차례로 두 사람의 맥문을 쥐었다.
“세상에…….”
제진의 눈이 화들짝 커졌다.
두 사람이 내공을 잃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탓이다.
“나머진 어떻게 합니까?”
그때 밖에서 부하의 외침이 들려왔다.
“전부 죽여라!”
제진은 차갑게 소리쳤다.
그가 돈을 빌린 장본인들을 제외한 나머지를 살해하는 건 돈을 받아 내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간의 경험을 통해 가장 빠르게 돈을 받아 내는 방법은 공포라는 걸 알아냈다.
시체를 볼 사람은 바로 적지영 형제의 피붙이, 즉 서천왕부 주인인 마왕이다. 서천왕부 부하들을 죽인다는 건, 빌려 간 돈을 갚지 않으면 적지영 일행도 죽이겠다는 확실하고 강력한 의사표시가 된다.
“존!”
“크악!”
“아악!”
“으아악!”
곧 처절한 비명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컥!”
“큭!”
바로 그 순간 적풍영과 적운영이 풀썩 쓰러졌다.
“어?”
제진은 깜짝 놀랐다.
자신은 적풍영과 적운영 옆에 서 있기만 했을 뿐이다. 그런데 두 사람이 비명과 함께 쓰러진 것이다.
그는 얼른 적풍영과 적운영을 살폈다.
두 사람의 뒷목에는 날카로운 무기가 파고든 흔적이 선명하게 나 있었다. 아주 얇고 폭이 좁은 무기에 의한 살인이었다.
“어떤 암기가?”
제진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적풍영과 적운영은 바로 옆에 있었다. 뭔가가 날아오는 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는데 두 사람이 살해됐다는 건, 상대가 절대 고수이거나 절대 암기를 가진 자라고 보는 게 옳다.
제진은 전 내공을 귀에 집중하여 적풍영과 적운영을 암살한 자를 찾았다.
하지만 그의 귀에는 서천왕부 무인들이 죽어 가면서 내지르는 비명밖에 들려오지 않았다.
“나를 따라와라!”
제진은 고함을 내지르며 안으로 뛰어들어 갔다. 그의 생각에 적풍영과 적운영을 살해한 자가 숨어 있을 곳은 거기뿐이었다.
제진을 비롯한 전수대 대원 십여 명이 건물 내부를 살폈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