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179)
“그대로 있어라!”
화홍이 일어나려고 하자 파군룡은 엉덩이를 틀어쥐었다. 그리고 예고도 없이 밀어붙였다.
화홍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그 표정은 이내 지워졌다. 곧 그녀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걸 네 음부에 넣어라. 그럼 네 동생과 부모님들은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을 게다. 만일 이 일을 그자에게 발설했다가는 너는 물론이고 네 가족도 전부 처참하게 죽게 될 것이다.”
화홍은 이곳에 오기 전에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그 말을 한 사내의 얼굴도 보지 못했다. 그 사내는 지금 뒤에 있는 파군룡처럼 뒤에서 겁탈하면서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일 개월 후 이곳으로 왔다.
천중전장에서 일한 지 보름 정도 지났을까? 일을 하다가 우연히 장주의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날부로 장주 시비로 발령이 났다.
호색한답게 장주는 하루도 틈을 주지 않았다.
시비가 된 그날 밤 그의 침대로 불려 들어갔다.
하룻밤도 쉬지 않고 장주의 수발을 들었다.
‘짐승 같은 자식!’
내심으로는 욕설을 하면서도 더욱 자극적으로 신음을 내뱉었다.
파군룡이 몸을 뺀 건 일각 후였다.
“물러가라!”
파군룡은 침대로 가 앉으며 말했다.
“네, 장주님.”
화홍은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들어와!”
파군룡은 밖을 보며 말했다.
문이 열리고 오십 대 중반 사내가 안으로 들어왔다. 서늘한 눈빛을 가진 이자는 천중전장 총관 유남수였다.
“죄송합니다, 워낙 급한 일이라서…….”
유남수는 먼저 사죄의 말을 했다.
“무슨 일인데?”
“적지영, 적풍영, 적운영이 서천왕부에서 파문당했습니다.”
“파문?”
파군룡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네.”
“그러니까 막냇동생에게 쫓겨났다는 거냐?”
“그렇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냐?”
“자칫 잘못하면 돈을 떼일 수도 있습니다.”
“말이 되는 소릴 해라. 나는 서천왕부를 보고 돈을 빌려준 거지 적지영 일행의 얼굴을 보고 빌려준 게 아니다!”
파군룡의 목소리가 커졌다.
유남수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잔뜩 굳었다.
그가 적지영 일행에게 빌려준 돈은 사백오십만 냥이다.
원래 천중전장은 아무리 대단한 집안이라고 해도 백만 냥 이상은 거래하지 않는다. 떼였을 경우 손실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지영 일행과 거래를 한 건, 현재보다는 미래를 염두에 둔 포석이었다.
파군룡은 전장에 이어 다른 사업도 구상 중이었다. 그 사업에는 서천왕부 같은 거대 단체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래서 훗날을 대비해 적지영에게 투자를 했다.
물론 그렇다고 손해를 염두에 둔 투자는 절대 아니었다. 설사 일이 잘못돼도 적지영 일행이 서천왕부의 요직에 있으면 세월을 두고 받아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사백오십만 냥이지만 세 사람이 나누면 백오십만 냥씩밖에 되지 않는다. 즉, 한계치인 백만 냥에서 오십만 냥이 추가된 셈이다.
그 정도는 견딜 만한 수준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최악의 상황이 발생하고 만 것이다.
적지영 일행이 가문에서 축출되었다면, 그들로부터 받아 낼 방법이 없다.
“지금 그자들은 어디 있느냐?”
“수소문하고 있습니다.”
―운기산장.
느닷없이 유남수의 귓전으로 전음이 흘러들었다.
‘응?’
유남수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왜 그러느냐?”
“……아, 아닙니다.”
잠시 생각하던 유남수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자신에게 온 기회를 놓칠 만큼 머리가 나쁜 자가 아니었다. 적지영 일행이 숨어 있는 장소를 안다는 건 중요한 정보가 되고, 잘만 이용하면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걸 알아차렸다.
전음을 보낸 자가 누군지 하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당장 찾아내라.”
“알겠습니다, 장주님.”
유남수는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제진 있느냐?”
유남수가 나가자 파군룡은 밖을 향해 소리쳤다.
“네.”
곧 검은색 무복을 걸친 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이 사내는 빌려준 돈을 회수하는 조직인 전수대錢收隊 대주였다.
섬서성에서 가장 큰 도시인 서안에는 많은 전장이 있다. 그들 중 합법적인 전장은 몇 곳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대부분 무허가다. 세금을 내는 것보다 단속하는 자에게 뇌물을 주는 게 더 낫기 때문이다.
불법적으로 영업을 하다 보니 이자도 높고, 빌려준 돈을 받아 내는 데도 철저하다.
모든 전장은 빌려준 돈을 받아 내는 조직을 하나씩 운영하고 있다.
그 조직 중 가장 악명 높은 곳이 바로 천중전장의 전수대였다.
전수대 앞에서는 배 째라는 강짜도 통하지 않는다. 돈을 빌린 자는 물론이고 그의 가족까지 전부 노예로 넘기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빌려준 돈을 받아 냈다.
특히 전수대 대주 독사의 악명은 전수대보다 더 높았다. 그래서 사채 시장에서는 저승사자를 만날지언정 독사는 만나지 말라는 말까지 있다.
그 독사가 바로 제진이었다.
“적지영, 적풍영, 적운영 셋을 잡으려면 전력이 얼마나 있어야 하겠느냐?”
“그들의 무공 정도를 모르는지라…….”
제진은 말끝을 흐렸다.
그가 서천왕부 인물에 대해 모르는 건 당연했다.
세간에 알려진 서천왕부는 황실 세력이었다. 따라서 그곳 사람에 대해서는 관심을 거의 두지 않았다.
제진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가 아는 서천왕부는 돈이 아주 많은 황실 세력의 한 곳일 뿐이었다.
“우리를 찾아왔던 적풍영은 최소한 강기를 펼치는 고수다.”
“강기요?”
“그렇다.”
“그렇다면 나머지 둘도 강기를 펼치는 수준의 무인이라고 봐야겠군요.”
“그래야 할 게다.”
“셋만 있을까요?”
“그들은 반란을 꿈꿨다. 반란을 꿈꾸는 자들이 단독으로 행동할 리가 없다. 방수들이 있을 게다.”
“그렇다면 부하들과 함께 있다고 봐야겠군요.”
“그럴 거다.”
“백 명을 데리고 가겠습니다.”
“부하들은 몰라도 그들 셋은 죽여선 안 된다.”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출동 대기해.”
“알겠습니다.”
제진은 바로 밖으로 나갔다.
“그나저나 요새 몸이…….”
파군룡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직 한창 나이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면 몸이 개운하지 않았다.
일 년 전만 해도, 아니 몇 달 전만 해도 이런 일이 없었는데 영 찜찜했다.
“보약이라도 먹어야 하나…….”
“접니다.”
그때 총관 유남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이어 문이 열리고 유남수가 들어왔다.
“알아냈습니다.”
파군룡 앞으로 간 유남수가 말했다.
“어디 있느냐?”
“운기산장에 숨어 있는 걸로 확인됐습니다.”
“빨리 알아냈구나. 수고했다.”
“감사합니다.”
유남수는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전음으로 적지영 일행이 숨어 있는 곳을 알려 준 자가 누군지 궁금했다. 그자는 그 뒤로는 다시는 전음을 보내오지 않았다.
‘해가 될 건 없으니까.’
그는 고개를 들었다.
“제진!”
파군룡은 밖을 향해 소리쳤다.
“네.”
“운기산장이 어디 있는지 아느냐?”
“알고 있습니다.”
“적지영 일행이 거기에 숨어 있다.”
“알겠습니다.”
제진은 곧바로 자리를 떴다.
“특이 사항 있으면 바로 보고하겠습니다.”
유남수는 밖으로 나갔다.
“잠도 깨 버렸고,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내야 하나.”
파군룡은 방 안을 서성였다.
잠이 완전히 깨 버려 다시 자기는 글렀다. 그럼 책을 보면 좋은데, 그건 더 싫다.
이럴 때는…….
그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맺혔다.
“화홍을 불러와라!”
그는 밖을 향해 소리쳤다.
* * *
서천왕부에서 안가를 만든 건, 과거에는 비상시에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안가에서 중요한 장소는 진식을 설치하여 외부로 드러나지 않게 숨겼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더 이상 마왕을 위협하는 일이 없어지자 자연스럽게 안가의 기능도 축소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별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은 그 장원의 주인이 누군지 알지 못한다. 안에 사는 사람이 이웃과 교류도 없고, 외출할 때도 마차를 이용하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마차 한 대가 안으로 들어갔지만 관심을 갖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마차를 타고 은밀하게 들어간 자들은 적지영 형제였다.
적지영 삼 형제는 장원에서 가장 안전하고 은밀한 장소를 찾아 들어갔다.
“여기도 오래 있을 수 없어.”
적지영은 창밖을 살피며 말했다.
그녀는 금장생이 가만있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로 온 건, 부하들과 약속 없이 만날 수 있는 장소가 여기뿐이기 때문이었다.
“부하들이 올 거라고 보십니까?”
적풍영이 물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부천장은 반드시 올 거야.”
적지영은 단언하듯 말했다.
그녀가 이렇게 확신하는 건 유덕인을 믿어서가 아니라 그가 오지 않으면 자신은 살아갈 방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바로 쫓겨나는 바람에 갈아입을 옷은 물론이고 돈 한 푼도 가져오지 못했다.
“반드시 와야 해.”
적지영은 주먹을 불끈 그러쥐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그녀의 바람이 통했는지 부천장 유덕인이 왔다.
“부하들은 조금 있다가 도착할 겁니다. 마음이 급해서 먼저 왔습니다.”
“고맙다, 부천장.”
적지영은 곧 울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유덕인은 별것 아니라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돈은 얼마나 가지고 왔느냐?”
강호를 떠돌 때 필요한 건 옷이 아니라 돈이었다.
“저희가 가진 돈은 쉰 냥이 전붑니다.”
“쉰 냥이라고?”
적지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다른 사람이야 쉰 냥으로 몇 달을 살겠지만 그녀에겐 한 달 용돈도 되지 않는다.
더구나 혼자도 아니고 세 명이다. 아무리 절약해서 산다고 해도 두 달을 버티기 힘들 금액이었다.
“네가 내 방에 한번 다녀와야겠다.”
“말씀하십시오.”
“침대 아래쪽에 보면 비밀 공간이 있다.”
적지영은 비밀 공간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 안에 삼십만 냥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그리고 풍영과 운영의 방에도 십만 냥씩은 있을 게다.”
적지영은 두 동생을 돌아보았다.
“내가 돈을 숨겨 둔 장소는…….”
먼저 적풍영이 비밀 창고에 대해 말했다.
“내 비밀 창고는…….”
적풍영에 이어 적운영도 자신의 비밀 창고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돌아가는 즉시 돈을 찾아오겠습니다. 그런데 그때까지 여기 계실 겁니까?”
유덕인은 적지영을 보며 물었다.
“오늘 밤은 여기서 쉬고 내일 떠날 참이다.”
“그럼 만날 장소를 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감숙성으로 갈 거니까 보계에서 만나면 되겠구나.”
“알겠습니다, 천장.”
유덕인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바로 방에서 나갔다.
“휴우!”
적지영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덕인이 오십만 냥을 가지고 오면 먼저 장원을 하나 사자. 그리고 너희 치료를 한 후 다시 시작하자.”
“다시 시작한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적풍영이 물었다.
“서천왕부는 우리 거다. 그걸 아수수와 그 계집년의 정부에게 넘겨줄 수는 없다, 절대로! 반드시 되찾고 말 것이다. 반드시.”
적지영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이번엔 증거가 없어 당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허점을 보일 터. 빠져나가지 못할 완벽한 증거를 잡아서 다시 서천왕부로 갈 것이다.”
“그놈이 가짜라는 증거를 잡으려면 이곳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곳에 있는 정도가 아니라 다시 서천왕부로 들어가야 해.”
“그럼 유덕인에게 감숙성으로 간다고 한 건……?”
“우리가 서천왕부로 다시 들어가는 건 우리 셋만 알고 있어야 하니까.”
“그럼 보계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올 참이군요.”
“그럴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습…….”
쉿!
적지영이 손가락을 입에 대고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밖에서 인기척이 감지된 것이다.
그녀는 창가로 갔다.
“부천장 유덕인입니다, 천장님.”
유덕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덕인?”
적지영을 비롯한 세 사람의 눈이 동그래졌다.
유덕인은 조금 전 다녀갔던 것이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워낙 감시가 심해 빠져나오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그, 그럼 조금 전의 그자는?”
적지영의 얼굴이 해쓱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