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177)
먹을 땐 껍질까지 몽땅
척!
금장생 앞으로 붉은 비단으로 싼 서찰이 전달되었다.
서찰을 가져온 사람은 총관 나박이었다.
“뭐죠?”
“마총회 개최를 요구하는 문섭니다.”
나박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
“마총회는 또 뭡니까?”
금장생은 다시 물었다.
“마총회는 마가 수뇌 모두가 참석하는 회의를 말합니다.”
“다루는 안건은 뭔데요?”
“탄핵입니다.”
“탄핵?”
“네.”
“누구를 탄핵하기 위해 열린다는 거죠?”
“마왕을 비롯한 다섯 천장입니다.”
“마왕과 천장을 물러나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승천비무 말고 또 있다는 거네요?”
“승천비무는 십 년에 한 번 개최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사이에는 마왕이나 천장이 마가의 존립을 위협할 정도로 비리를 저질러도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는 거군요. 그 단점을 해결하기 위해 마총회라는 게 만들어졌고.”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적지영 일행은 왜 지금까지 가만있었던 거죠?”
“누군가의 해임을 요구하기 위해서는 자신도 모든 걸 걸어야 하기 때문에 마총회 개최는 함부로 요구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모든 걸 걸어야 한다는 건 어느 정도를 말하죠?”
“만일 모함이란 사실이 밝혀지면 가문에서 추방당합니다.”
“모든 걸 걸어야 한다는 게 그런 의미군요.”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상은 나겠죠?”
“그렇습니다.”
“왜 안 하나 했습니다.”
“네?”
“아닙니다. 마총회가 열리는 장소는 어딥니까?”
“율각의 집행실입니다. 시간은 오늘 저녁이고요.”
“이 서찰, 수수에게도 갑니까?”
“지금쯤 여기로 오고 계실 겁니다.”
똑똑똑!
나박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아수수가 들어왔다.
그녀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다.
“이거 봤어요?”
아수수는 서찰을 들었다.
“여기 있잖습니까.”
금장생은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서찰을 가리켰다.
“적지영이 마총회 개최를 요구했다는 건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 건데, 짚이는 거 없어요?”
“없습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저었다.
“끙!”
아수수는 얼굴을 찌푸렸다.
“별일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금장생은 아수수의 등을 두드렸다.
“믿어도 되는 거죠?”
금장생을 바라보는 아수수의 얼굴에는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승천비무 때 있었던 발 크기 사건도 그렇고, 적지영이 확실한 증거를 가진 것만 같았다.
“남편을 못 믿으면 어떻게 하자는 겁니까?”
“알았어요.”
그제야 아수수의 얼굴이 펴졌다.
“밥 먹으러 갑시다.”
금장생은 아수수를 데리고 식당으로 갔다.
그 후 일정은 다른 날과 다르지 않았다. 차를 마시고, 늘 하던 대로 업무를 봤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자 식사를 하고 율각의 집행실로 갔다.
집행실에는 벌써 원로들을 비롯한 마가 수뇌들이 전부 들어와 있었다.
적지영과 적풍영, 적운영 형제들도 한편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금장생과 아수수가 들어가자 적지영 형제 셋을 제외한 나머지 일행이 일어나 인사를 했다.
“좋은 일로 자주 만나야 하는데 이런 일로 만나 아쉽습니다. 앉으세요.”
금장생은 그의 자리로 가 앉았다.
침묵이 실내를 감싸고 돌았다.
“험!”
침묵 끝에 적순우가 헛기침을 했다.
그녀는 적지영을 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안건이 마왕의 해임이라 하였는가?”
“그렇습니다.”
“만일 모함으로 밝혀지면 추방이란 사실을 알고 있는가?”
“알고 있습니다.”
“추방은 바로 시행될 거네. 그래도 상관없는가?”
“대신 제가 내민 증거가 사실이면 저 가짜가 추방되는 거 맞습니까?”
적지영은 금장생을 가리켰다.
“그러네.”
“좋습니다. 이제 저자가 가짜라는 증거를 말하겠습니다.”
적지영은 금장생을 보았다.
그녀는 원래 십이월 말, 즉 승천비무 마지막 날에 금장생이 가짜라는 걸 밝힐 예정이었다.
그랬던 계획을 바꾼 건 마왕에게로 쏠린 민심 때문이었다.
승천비무 기간 동안 문도들은 마왕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게 되었고, 그 상황에서 설사 가짜라는 증거를 꺼내 놓는다고 해도 믿을 문도가 없을 것 같았다.
세 형제가 마왕을 시기하여 말이 안 되는 일을 꾸몄다며, 오히려 반감을 살 게 분명했다.
그럼 남은 건 마총회뿐이었다.
“가짜라는 증거를 꺼내 놓기 전에, 마왕께 두 가지를 요구하겠습니다.”
“뭘 요구하겠다는 건가?”
적순우가 물었다.
“서천왕부 마왕이면 반드시 지니고 있어야 할 물건과 무공이 있는데, 원주께서는 그게 뭔지 아십니까?”
“마왕패와 적수로 알고 있네.”
“제가 요구하는 건 바로 그 두 가집니다.”
‘헉!’
아수수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설마 적지영이 그 두 가지를 요구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남편의 시신을 찾지 못했으니 그 두 가지가 있을 리가 없다. 아니, 적수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둘러댈 수 있겠지만 마왕패가 없는 건 변명의 여지가 없다.
‘걸렸구나, 계집.’
적지영은 아수수를 바라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수수의 얼굴만 보아도 자신이 승리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 두 가지가 서천장이 말한 증건가?”
적순우는 물었다.
“그렇습니다, 원주. 만일 저 가짜에게서 적수와 마왕패가 나온다면 저는 제 동생 둘과 함께 마가를 떠나겠습니다.”
적지영은 자신 있게 말했다.
그녀가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는 건 아수수의 얼굴 표정 때문이었다.
“정말입니까?”
이번에는 금장생이 물었다.
“나는 한입으로 두말하지 않는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금장생은 다시 물었다.
“생각해 볼 것도 없다. 네게는 마왕패가 없다. 그 사실에 내 목을 걸겠다!”
적지영은 더욱 자신만만한 얼굴로 소리쳤다.
“그럼 일을 효과적으로 처리하기 위해서 혈도를 눌러야 하는데,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
적지영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이성을 잃으면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난동을 부릴 거란 말이냐?”
“…….”
금장생은 말없이 적지영을 바라보았다.
“좋다.”
적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금장생이 자꾸만 묻고 혈도 운운하는 모양새가, 그에게 마왕패가 없다는 확신을 더욱 확고히 해 주었다.
“그럼 허락한 걸로 알겠습니다.”
금장생은 율장의 장주 채윤을 보았다.
채윤은 적지영 옆으로 가 섰다.
“점혈하시오.”
적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례를 범하겠습니다.”
채윤은 적지영의 혈도를 눌렀다.
“마왕패를 꺼내라!”
적지영은 소리쳤다.
“알겠습니다.”
금장생은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네겐 마왕패가 없다. 그건 아수수의 얼굴이 증명한다.’
적지영은 눈 한 번도 깜짝하지 않고 금장생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금장생의 품에서 패가 나왔다. 마왕패를 잠시 바라보던 금장생은 적순우에게 건넸다.
마왕패를 살펴본 적순우는 미리 준비한 먹물을 찍었다. 그러자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탁자 위에 펼쳐진 종이로 시선을 주었다.
적순우는 천천히 마왕패를 찍었다.
“오!”
“마왕상이다!”
종이를 주시하던 이들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종이에 찍힌 그림은 마왕상이 분명했다.
“아!”
안도의 숨을 내쉰 다른 이들과 달리 아수수는 무너지듯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멍한 얼굴로 금장생을 보았다.
금장생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원망의 빛이 가득했다. 금장생의 품에서 나온 마왕패 때문이었다.
마왕패를 가졌다는 건 곧 남편 적천영을 만났거나 임종을 지켰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지금까지 금장생은 단 한 번도 남편에 대해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확인하시겠는가?”
적순우는 적지영을 보며 말했다.
하지만 적지영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마왕패가 찍히고 마왕상이 드러난 순간 넋이 나가 버린 탓이었다.
“서천장!”
적순우는 적지영의 직함을 불렀다.
“네? 네!”
적지영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확인해 보겠냐고 물었네.”
“네.”
적지영은 적순우 앞으로 갔다. 그리고 덮치듯 마왕패를 잡아챘다.
손으로 슥슥 먹물을 닦아 내고 표면을 살폈다. 마왕패 표면은 그녀가 아는 그대로였다.
이번엔 먹물에 담갔다가 종이에 찍었다.
마왕상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이럴 리가 없어!”
적지영은 넋을 잃은 얼굴로 소리쳤다.
“이럴 리가 없다고!”
그녀는 재차 소리쳤다.
“그건 마왕패 맞네.”
“아닙니다. 이 마왕패는 저 녀석에게 있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적지영은 고개를 저었다.
“우리 모두는 이 패가 마왕패가 확실하다고 결론을 내렸네. 서천장 자넨 무고한 사람을 모함했네. 모함에 대한 대가는…….”
“나는 두 가지라고 했습니다. 이 마왕패는 얼마든지 모조가 가능합니다. 하지만 적수는 절대 모방할 수 없습니다. 내가 아는 마왕은 적수를 구 성 익혔습니다. 그걸 보여 주면 저자가 진짜라는 걸 인정하겠습니다!”
적지영은 버럭 소리쳤다.
“기억을 잃은 마왕에게 적수를 펼치라는 건 억지임을 아는가?”
“절대 억지가 아닙니다. 저자는 마수를 자유자재로 펼쳤습니다. 그런 자가 적수를 펼치지 못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적지영은 손가락으로 금장생을 가리키며 고함을 내질렀다.
“적수라면 혹시 이 무공을 말하는 건지요.”
금장생은 내기를 끌어 올렸다. 그러자 그의 전신에서 검은 기운이 피어올랐다.
그 기운은 곧 거대한 마왕상이 되었다.
마왕의 크기는 무려 오 장이나 되었다.
“마, 마신상이다!”
원로 중 누군가가 경악한 얼굴로 소리쳤다. 적수마신만마공을 완성해야만 나타난다는 마신상이 금장생의 몸에서 나타난 것이다.
이윽고 마신상의 양손이 새빨갛게 변했다.
“적수다!”
“완성된 적수야.”
원로와 수뇌들은 감격한 얼굴로 금장생을 보았다.
지금껏 많은 마왕이 있었지만 적수를 완성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전 마왕은 물론이고 전전대 마왕도 끝내 완성을 보지 못했던 무공이 적수였다.
그런데 현 마왕이 완성된 적수를 보여 준 것이다.
“이젠 더 이상 나를 증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금장생은 차분하게 말했다.
“이, 이건 사기야! 저놈은 마왕이 아니라고. 마왕이 아니란 말이야!”
“율장은 집행하라!”
적순우는 율장의 장주 채윤을 보며 엄하게 소리쳤다.
“알겠습니다. 율사들은 저들을 서천왕부 밖으로 버리고 와라!”
채윤은 적지영 일행을 가리켰다.
“존!”
율사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잠깐만요.”
금장생은 율사들을 불렀다.
“하명하십시오, 마왕!”
채윤은 금장생을 보았다.
“아무리 날 모욕했다고 해도 제 형제잖습니까. 안가로 모시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마왕.”
채윤은 고개를 숙였다.
“들었느냐?”
“바로 시행하겠습니다!”
율사들은 적지영, 적풍영, 적운영 세 형제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문을 열고 몸을 날렸다.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나는 반드시 돌아온다! 반드시 돌아올 거다!”
적지영은 고래고래 고함을 내질렀다.
하지만 곧 그녀는 잠잠해졌다. 안고 가던 율사가 아혈을 눌러 버린 탓이었다.
“수고했네, 마왕. 그런데 왜 말하지 않았는가?”
적순우가 금장생에게 물었다.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지…….”
“적수를 완성한 거 말이네.”
“아! 사실 저는 그 무공이 적수인지도 몰랐습니다. 다만 강한 무공이 있어서…….”
“그랬구먼. 그런데 이 기쁜 순간에 이 아이는…….”
적순우는 조금 전 아수수가 앉아 있던 자리를 보았다. 아수수는 자리를 뜨고 없었다.
“먼저 나간 모양입니다.”
금장생이 말했다.
“아무튼 고맙네.”
“무슨 말씀이신지……?”
“그 아이들을 안가로 보내지 않았는가?”
“아! 그것 때문이었군요. 미우나 고우나 형제잖습니까?”
“그렇지. 나는 자네들이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네.”
“노력해 보겠습니다.”
금장생은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