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172)
죽지 않는 군단
휘이익! 휘이이이!
차가운 기운을 머금은 북풍이 산자락을 휘감았다.
소나무들은 맹렬하게 가지를 흔들어 마른 잎사귀를 털어 냈다. 끝이 뾰족한 솔잎들이 바닥에 수북하게 쌓였다.
그 솔잎을 밟고 수백 명이 나타났다.
그들이 있는 곳에서는 환수각 건물 수백 채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척척척척! 척척척척!
아래를 내려다보던 자들의 좌우로 갈라졌다. 그들 사이로 두 명이 걸어 나왔다.
갑옷을 걸친 무혼과 로브를 입은 바타르였다.
“축제를 벌이고 있는 것 같군.”
무혼은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새해니까.”
“맞아. 오늘이 새해였지.”
무혼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새해가 밝았다.
중원에서 맞는 새해가 얼마 만인지 모른다. 평소에 먹어 보지 못한 특별한 음식을 먹었던 것도 같은데 기억은 희미하다.
“그래도 이건 같네.”
무혼은 손바닥을 폈다. 그러자 새하얀 덩어리가 손바닥 위로 떨어졌다.
덩어리는 금세 녹아 없어졌다.
첫눈이었다.
“행운의 징조다, 바타르.”
무혼은 주먹을 가볍게 말아 쥐며 말했다.
“내가 가장 이상하게 생각하는 인간의 특징 중 하나가 아무것도 아닌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습관이다.”
“첫눈이 별것 아니라는 거냐?”
“추운 겨울이란 사실을 나타내는 것들 중 하나일 뿐이다.”
“아무튼 드래곤이란…….”
무혼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백리장광을 보았다.
“모든 부대 배치 끝났습니다. 이제 저들이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쳐들어가면…….”
“굳이 잠들 때까지 기다릴 필요 없다. 그리고 아침이 오면 언데드 군단은 무용지물이 된다.”
“그럼 아군의 희생이…….”
“절반의 전력도 어쩌지 못한다면 중원 정복에 대한 꿈을 접어야 한다, 백리 가주.”
“절반의 전력뿐이라는 건…….”
“오늘이 일월 일일이란 사실을 잊었느냐?”
“아!”
백리장광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월 일일에는 많은 이들이 춘절을 쇠기 위해 고향으로 간다. 무림 단체라고 해서 다를 게 없다.
다른 조직보다 고향으로 가는 자들이 적긴 하지만, 그래도 절반 정도는 비게 될 것이다.
“당장 공격을 시작하라!”
“알겠습니다, 대공.”
백리장광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자리를 떴다.
잠시 후, 수십 발의 신호탄이 하늘을 향해 쏘아졌다.
“진격하라!”
“진격하라!”
“진격하라!”
“진격하라!”
총 네 곳에서 공격 명령이 떨어졌다.
척! 척척! 척척척! 척척척!
그리고 검은 인형들이 환수각을 향해 나아갔다.
“이게 무슨 소리지?”
장철진은 고개를 갸웃했다.
어둠을 뚫고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수천 명이 줄을 맞춰 행진하는 것 같았다.
“글쎄. 천둥소리는 아닌데…….”
정욱 역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년 동안 정문 경비를 섰지만 이런 소리는 처음이었다.
“오늘 같은 날 경비를 서는 것만 해도 재수 없는 일인데 이상한 일까지 생기면 나는 돌아 버리고 말 거야.”
장철진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사실 장철진은 오늘 근무가 아니었다.
원래는 상관이 근무자였는데 배탈이 났다면서 대신 서 달라고 했다. 거짓말이라는 건 알지만 상관의 부탁이라 거절할 수가 없었다.
“나도 그래.”
정욱이 맞장구를 쳤다.
척척! 철척! 척척! 척척!
시간이 흐를수록 소리는 점점 커졌다.
“발소리 맞는데?”
장철진이 정욱을 보며 말했다.
“나도 그 말 하려고…… 헉!”
전면을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정욱이 신음을 내뱉었다.
수백 명이 이편을 향해 행군해 오고 있었다.
“적일까?”
장철진은 신호적을 꺼내며 물었다.
“선자불래 내자불선이라고 했어.”
“그렇지.”
장철진은 신호적을 힘껏 풀었다.
삐이익! 삐이익! 삐이익!
신호적 소리는 밤하늘을 가르며 퍼져 나갔다.
처음엔 아무도 그 소리에 집중하지 않았다. 누군가 휘파람을 부는 걸로 생각했다.
그러다가 계속해서 들려오자 하나둘 동작을 멈추고 소리가 들려온 정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들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에도 신호적 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다.
삐이익! 삐이익! 삐이익!
신호적 소리에는 불길한 기운이 잔뜩 내포되어 있었다.
환수각은 순식간에 침묵으로 빠져들었다.
들리는 건 사르락사르락 눈 떨어지는 소리뿐이었다.
“적이다!”
“적이 나타났다!”
그때 내공을 잔뜩 머금은 외침이 들려왔다.
“맙소사!”
“말도 안 돼.”
무인들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다른 곳도 아니고 춘추오패의 한 곳인 환수각이다. 아무리 새해고 많이 풀어진 상태라고 해도 환수각을 공격할 간 큰 자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환수각 무인들 생각에는, 적의 공격은 꿈속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대사건이었다.
휙!
바로 그때 무인 한 명이 뛰어왔다. 정문 경비단 소속 무인이었다.
“정말 적이냐?”
수염을 기른 노인이 달려온 자를 보며 물었다.
형형한 안광의 이 노인은 환수각의 다섯 조직 중 한 곳인 풍수단風獸團의 단장 풍천도인風天道人 익상이었다.
“그렇습니다.”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는 얼마나 되느냐?”
“오백여 명 정돕니다.”
“오백 명?”
익상은 고개를 갸웃했다.
환수각을 공격하기 위해 온 자들치곤 너무 적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네!”
“일단 가 보자.”
“알겠습니다.”
“문도들은 전투준비를 하고 정문으로 집합하라!”
익상은 고함을 내지르고 정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적이 침입했다는 소식은 척사랑에게도 전해졌다. 척사랑은 신호적 소리가 들리자마자 곧바로 옷을 갈아입고 보고를 기다리고 있었다.
“적입니다.”
보고한 사람은 화객의 수장 화였다.
“인원수는 얼마나 되느냐?”
“정문 근처까지 와 있는 자는 오백여 명이고 후미에 수천 명이 더 있다고 합니다.”
“수, 수천 명이라고?”
“네.”
“가자.”
척사랑은 곧바로 일어났다.
전력을 다해 내달린 척사랑과 태월령은 한 식경 후 정문인 환문에 도착했다.
그녀는 환문 위로 올라갔다.
“어서 어십시오, 각주님.”
풍천도인 익상이 그녀를 맞았다.
“적의 정체는 알아냈나요?”
“정체를 밝힐 수 있는 어떤 단서도 없습니다.”
익상은 고개를 저었다.
“대화는 시도해 봤나요?”
“두 번 불러 봤는데 대답이 없습니다.”
“첫눈 오는 날인데…….”
척사랑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탐스러운 눈송이가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척척! 척척! 척척!
멈췄던 적이 다시 다가왔다. 그런데 그 수는 오백여 명뿐이었다.
“수천 명이라고 하던데…….”
“나머진 어둠 속에 숨어 있습니다.”
“그렇군.”
척사랑은 다가오고 있는 자들을 보았다.
성문에서 오십여 장 떨어진 곳까지 다가오자 비로소 생김새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전부가 검은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눈에서는 푸른 광채가 흘러나왔다.
‘왜 열기가 없지?’
그들을 바라보던 태월령이 가장 먼저 느낀 점이었다.
수천 명이 모여 있으면 생명력이 됐건 두려움이 됐건, 어떤 기운이 감지되어야 한다. 그런데 환문 앞 벌판에서는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난 풍수단의 단장 풍천도인 익상이다! 정체를 밝혀라!”
익상은 검은 갑옷을 걸친 자들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하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풍수단 집결 끝났습니다.”
“운수단 집결 끝났습니다.”
“뇌수단 집결 끝났습니다.”
“화수단 집결 끝났습니다.”
“환수단 집결 끝났습니다.”
아래쪽에서 집결 완료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풍수단은 나를 따르라!”
익상은 고함을 내지르고 아래로 몸을 날렸다.
끼이익!
그가 바닥으로 내려선 순간 대문이 열렸다.
“와아아아!”
“우와와!”
풍수단 무인들은 기합을 내지르며 몸을 날렸다.
잠시 후 그들은 갑옷을 입은 자들과 맞닥뜨렸다.
“차아!”
“타하!”
“이야합!”
풍수단 무인들은 기합과 함께 무기를 휘둘렀다..
창! 창창!
풍수단 무인들의 공격을 받은 자들은 별다른 반항도 못 하고 쓰러졌다. 풍수단 대원들이 적을 모두 쓰러뜨리는 데 걸린 시간은 한 식경 반이었다.
“돌아간다.”
더 이상 서 있는 적이 없자 익상은 철수를 명했다.
익상을 비롯한 풍수단 대원들은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밖을 주시했다.
“각주님, 별것 아닙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척사랑 앞으로 간 익상은 말했다.
사실 목을 칠 때 살이 아니라 뼈를 벤다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모두 쓰러졌으니 문제 될 게 없다. 나머지가 공격을 해 오면 지금처럼 처리하면 될 것 같았다.
“별것 아닌 게 아닌 것 같소, 각주.”
익상에게 말하는 척사랑의 눈은 더할 수 없이 커져 있었다.
그녀가 보고 있는 대문 앞 벌판에서는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게 무슨…… 억!”
익상은 경악했다.
조금 전 자신을 비롯한 풍수단 대원들이 없앤 자들이 꼼지락꼼지락 움직이고 있었다.
잘린 팔과 다리와 머리가 어디론가 움직여 갔다.
척! 척척! 척척!
그리고 본래 떨어졌던 자리에 붙었다.
“저, 저, 저럴 수가…….”
익상은 경악했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잘려 나간 팔다리와 머리가 본래 몸뚱이로 붙는 건 꿈속이 아니라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저런 일은 꿈속에서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놀라움은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팔, 다리, 머리가 붙자 하나둘 몸을 일으켰다.
철썩!
급기야 익상은 자신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혹시 고통을 느끼지 못할까 봐 뺨을 때린 오른손에 내공까지 주입했다.
“크윽!”
극심한 통증과 입안이 비릿한 냄새로 가득 찼다. 입안이 터져 피가 흘러나왔다는 뜻이다.
“꾸, 꿈은 아닌데 어떻게 저런 일이?”
놀라긴 척사랑도 마찬가지였다.
무림십패의 일인인 그녀도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게 뭔지 알아?”
척사랑은 태월령에게 물었다.
“강시 아닐까요?”
태월령이 대답했다.
“강시?”
“처음 나타날 때부터 생기를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그렇다면 죽은 시체라고 봐야 해요. 제가 알기론 죽은 상태에서 움직이는 건 강시뿐이에요.”
“하지만 강시는 잘린 팔이나 다리가 붙지 않아. 그리고 머리가 잘리면 아무리 강한 강시라고 해도 불능 상태로 변해. 그건 상식이야.”
“상식을 뛰어넘는 강시가 있을 수도 있잖아요.”
“글쎄. 풍주!”
척사랑은 익상을 불렀다. 풍주風主는 그녀가 풍수단의 단장을 부르는 호칭이었다.
“하명하십시오, 각주님.”
“한 번 더 공격해 보시오.”
“알겠습니다.”
익상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풍수단 대원들에게 공격 명령을 내리고 적진을 향해 몸을 날렸다.
다시 환문 앞 벌판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번에는 갑옷을 입은 자들도 반격을 해 왔다.
“크아악!”
“아아악!”
일방적인 공격이었지만 아군 측에서도 희생자가 생겼다.
다섯 명이 죽임을 당하고 세 명이 부상을 입었다. 적을 전멸시키는 시간도 처음보다 늘어났다.
그건 적이 강해져서가 아니었다. 다시 살아나는 모습을 본 풍수대원들이 겁을 먹어 움직임이 둔해진 탓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번엔 처음보다 더 많은 조각으로 잘랐습니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익상이 말했다.
“어떻게 되나 봅시다.”
척사랑은 벌판을 지켜보았다.
“으음!”
그녀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조각조각 잘린 조각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더니 하나로 합쳐지고 완전체가 돼 벌떡벌떡 일어나는 것이었다.
‘불사신!’
문득 든 생각이었다.
척척! 척척! 척척! 척척!
바로 그때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후미에 있던 자들이 환수각 쪽으로 걸어왔다.
그들의 수도 오백 명 정도였다.
나중에 온 자들은 먼저 나와 있던 자들의 좌우측으로 늘어섰다.
“일진과 이진은 진격하라!”
어디선가 차가운 외침이 들려왔다.
캬캬캬캬! 크크크크! 캬캬캬캬!
언데드들은 괴성을 흘리며 환수각을 향해 나아갔다.
“삼진과 사진은 진격하라!”
캬아! 크크크!
척척! 척척! 척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