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가-171화 (171/524)

황금가 (171)

“서천장도 도전하시겠습니까?”

금장생은 적지영을 보며 물었다.

단전이 짓이겨진 적운영은 의전으로 가 치료 중이었다.

적지영은 금장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동생이 그렇게 쉽게 당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단 한 번도 공격을 해 보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준비한 마광단조차 복용하지 못하고 처참하게 당하고 만 것이다.

부관의 말에 의하면 적운영도 단전이 부서져 무인으로서의 생명이 끝났단다.

“아니에요.”

적지영은 고개를 저었다.

비장의 수가 아직 남아 있는데 굳이 비무를 고집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 난 푹 쉬어도 되겠군요.”

“다른 사람이 또 도전한다면 모를까, 그래도 되겠네요.”

“말 바꾸면 이번엔 살려 주지 않을 겁니다, 서천장. 욱!”

금장생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우엑!”

그리고 피를 토했다.

사실 조금 전 그는 무리를 했다.

적운영이 세 형제 중 가장 약하다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강자들 입장에서 하는 말일 뿐이다.

적운영도 이기어검술을 펼치는 절대 강자다. 아무렇지 않게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래서 기습을 했고, 삼백육십혈부를 연속해서 네 번이나 펼쳤다. 거기에 더해 소도를 펼쳐 도벽까지 만들었다.

전날 적풍영과 싸울 때 당한 내상이 더욱 심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여보!”

“마왕!”

“마왕!”

아수수를 비롯한 거석 일행이 비무대로 몸을 날렸다.

“괜찮습니다.”

금장생은 일어섰다. 그의 얼굴엔 힘겨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수수가 얼른 그를 부축했다.

“오늘은 그만하고 쉬세요.”

아수수는 말했다.

“마왕이 자리를 비울 수는 없지요.”

“여긴 우리가 있어도 되니까 마왕은 들어가서 쉬시게.”

적순우가 두 사람 곁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승천비무는 마왕보다 우리가 더 많이 치렀네. 그리고 아픈 마왕이 지켜보고 있으면 가솔들의 마음이 더 불편한 법이라네. 여긴 우리에게 맡기고 마왕은 들어가서 쉬게.”

“그럼 저는 저기서 좀 쉬겠습니다.”

금장생은 대연무장에 딸려 있는 건물을 가리켰다.

연병전이라고 불리는 그 건물은 승천비무 기간 동안, 비나 눈이 올 때 마왕을 비롯한 원로들이 쉬는 휴식 공간이었다.

“그렇게 하게.”

적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요.”

아수수는 금장생을 부축해 건물로 향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연병전에 도착했다.

“청소만 하면 되니까 여기서 잠시 쉬고 계세요.”

상화는 두 사람 앞에 차를 가져다 놓고 위로 올라갔다.

금장생과 아수수가 맨 꼭대기 층으로 올라간 건 한 식경 후였다. 상화는 간식과 차를 준비해 주고 방에서 나갔다.

금장생은 창가로 갔다.

거기서는 대연무장이 한눈에 보였다.

“적지영이 가만있을 거라고 보세요?”

아수수가 금장생 곁으로 가며 물었다.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어떻게 나올까요?”

“오늘 적운영이 저를 가짜라고 한 것과 관련된 뭔가를 준비하고 있을 겁니다.”

“그들이 증거를 찾았다는 거예요?”

“증거가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그럼?”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겠지요.”

“그게 뭘까요?”

“지금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준비한 게 무엇이든 간에 올해 안에 정리된다는 건 변하지 않습니다.”

“제발 그렇게 됐으면 좋겠네요.”

“절 믿으십시오. 저는 돈을 받으면 돈값을 반드시 하는 사람입니다.”

금장생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날 이후 승천비무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십 년 동안 승천비무를 준비한 자들 중 어떤 이는 비무에서 승리하여 환성을 내질렀고, 패한 자들은 눈물을 삼키며 다음을 기약했다.

그렇게 한 해의 마지막 달은 빠르게 저물어 갔다.

* * *

그믐날의 풍경은 어디나 비슷하다.

많은 이들이 축제를 벌인다. 올해 있었던 좋지 않은 일을 가는 해와 함께 보내고, 새로운 해에는 좋은 일만 가득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특히 무림 단체에서는 더욱 성대한 축제를 벌인다.

고향으로 가지 않고 남아 있는 자들은 돌아갈 고향이 없거나 고향을 아예 모르는, 그리고 고향이 있음에도 갈 형편이 안 되는 자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연말과 새해는 더욱 외로운 시간일 수밖에 없다.

그런 그들의 마음을 달래 주는 게 바로 축제다.

사천의 환수각도 다르지 않았다.

이천 명이 고향으로 떠났고 환수각에는 문도 삼천 명과 일하는 사람 그리고 떠나지 않는 문도들의 가족이 남았다.

척사랑은 그들을 위해 성대한 축제를 열었다.

축제가 시작된 건 저녁 무렵부터였다.

묵은해와 새해가 교차하는 자정이 되자 축제는 절정에 달했다. 수만 개의 폭죽이 동시에 터지고, 축제에 참석한 이들은 열렬한 함성으로 오는 해를 맞았다.

“한잔해요.”

화려하게 터지는 불꽃을 바라보고 있는 척사랑 앞으로 술병이 불쑥 다가왔다.

척사랑은 시선을 내렸다.

술병을 내밀고 있는 사람은 태월령이었다.

곤륜산을 다녀온 후 태월령은 이곳에 머물고 있었다.

“좋지.”

척사랑은 방긋 웃었다.

“자리를 옮겨서 한 잔 더 하는 건 어때요?”

“그럴까?”

두 사람은 척사랑의 처소로 자리를 옮겼다.

“언제 봐도 여긴 멋져요. 여기에 비하면 신강의 내 방은 돼지우리라니까요.”

태월령은 감탄사를 연발했다.

벌써 몇 번을 들어왔지만 볼 때마다 놀랍고 새롭다.

내부 집기가 최고급이라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척사랑의 방을 채운 집기들은 고급이면서도 품격이 있었다. 게다가 확 튀지도 않았다. 각각 독특한 존재감을 뽐내면서도 서로 조화를 이루는 품격을 지녔다.

“다 물려받은 거지 내가 들인 건 몇 개 없어.”

척사랑은 빙그레 웃으며 입고 있던 장포를 벗었다.

장포와 상의를 벗자 천으로 친친 동여맨 상체가 드러났다.

그런데 천으로 동여맨 가슴 윗부분이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사내 가슴이라고 하기엔 뭔가 어색했다.

척사랑은 묶인 부분을 풀었다. 그리고 그 끝을 태월령에게 건넸다.

태월령이 천을 잡자 팔을 들어 올린 채 제자리에서 빠르게 돌았다.

곧 천이 전부 풀리고 상체가 드러났다.

놀랍게도 척사랑은 사내가 아니고 여자였다.

“이제야 좀 살겠네.”

척사랑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차라리 여자라는 사실을 떳떳하게 밝히는 게 낫지 않아요?”

태월령은 척사랑의 가슴으로 시선을 주며 말했다.

그녀의 가슴은 천으로 묶는다고 해도 표시가 날 정도로 풍만했다. 그런 가슴을 하루 종일 압박하면 건강에도 좋지 않을 것 같았다.

“한두 해도 아니고 삼십구 년 동안 사내로 살았는데 이제 와서 여자라고 밝혀 봐. 폭동이 일어나고 말 거야.”

“그렇다고 그 짓을…….”

“지금까지 잘해 왔는데 뭐.”

척사랑은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었다.

하루 종일 혹사한 가슴을 해방시켜 주려고 밤에는 가장 얇은 옷을 입고 활동하고, 잘 때는 그마저 벗어 버린다.

“남자는 만난 적 있어요?”

태월령은 차를 준비하며 물었다.

척사랑의 나이가 훨씬 많아 언니 동생 하기로 했지만, 가족 관계라든가 성적인 부분들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술 때문인 듯 자연스럽게 말이 나왔다.

“남자?”

“네.”

“그러니까 남자와 잔 적이 있느냐는 질문인 거야?”

“네.”

“월령 너는?”

“저는 열다섯 살 때 첫 경험을 했는걸요.”

“그렇게 빨리?”

“사막은 사는 환경이 워낙 열악해서 사내들이 빨리 죽어요. 부족을 유지하려면 자식을 많이 가져야 하고, 자식을 많이 낳으려면 일찍부터 혼인을 해야 해요. 그러다 보니 여자나 남자나 성에 빨리 눈을 뜰 수밖에 없었어요.”

“환경적인 요인이 컸다는 거네.”

“네. 그 후로도 몇 명을 더 만났어요. 만나면 깊은 관계까지 갔고요.”

“그랬구나.”

척사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는…….”

“없어.”

“남자를 만난 적이 없다고요?”

“만난 적도 없고 잔 적도 없어. 내 옆에서 잠을 찬 최초의 사내는 장생 그자야.”

“맙소사, 그 몸을 가지고…….”

태월령은 믿기지가 않았다.

그녀가 척사랑의 알몸을 처음 본 건 곤륜산으로 가는 도중 사막에서였다.

함께 목욕을 하게 되면서 본 척사랑의 알몸은 같은 여자마저 달아오르게 할 정도로 치명적인 유혹을 품고 있었다. 아니, 실제로 달아올랐다.

처음엔 자신 내면에 잠자고 있던 동성애에 대한 갈구가 척사랑의 알몸 때문에 표출된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몇몇 여자의 알몸을 떠올리며 시험을 해 보았다. 물론 자위에 불과했지만.

하지만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런데 척사랑은 성공했다.

그때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척사랑은 음기의 결정체라고 부르는 만음요화상萬陰妖花像의 신체를 타고난 여자였다. 만음요화상의 신체는 구양절맥을 타고난 사내를 치료할 수 있는 치료제이기도 했다.

아울러 만음요화상을 타고난 여자의 또 한 가지 특징은 양성애자라는 점이다. 즉 사내와 여성을 가리지 않고 사귈 수 있다.

척사랑이 사십 년 동안 사내로 살 수 있었던 이유가 어쩌면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오래 하는데?”

척사랑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아니에요.”

태월령은 고개를 저었다.

“둘이 잤어?”

“누구요?”

“장생 말이야. 한 달 이상 둘만 여행했다고 한 것 같은데.”

“아뇨.”

“마음에 안 들었나 보지?”

“저 때문이 아니고 그 녀석 때문이에요.”

“유혹을 했는데도 안 넘어왔다는 거야?”

“알몸을 몇 번 보여 준 적은 있지만 유혹을 하진 않았어요.”

“알몸을 보여 주는 건 유혹 아닌가?”

“아무튼 그 녀석은 제 알몸을 보고도 옴짝달싹도 하지 않았어요.”

“만일 덮쳤으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는데?”

“열렬히 환영해 주지 뭘 어떻게 해요. 그런데 녀석은 침만 흘릴 뿐 덮치지는 않더라고요. 그렇다고 여자 체면에 먼저 덮칠 수도 없잖아요.”

“하하하! 그거 말 된다.”

척사랑은 크게 웃었다.

“아무튼 그 녀석은 돈밖에 몰라요.”

“어디 산다고 했지?”

“낙양에서 장례 사업을 한다고 했어요. 가게가 북망산 어딘가에 있다고 했던 것 같아요.”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네.”

“잘 살고 있을 거예요.”

“거기서 살아 나왔겠지?”

“사막에서 사는 우리보다 생존 능력이 더 강한 사람인데요 뭐.”

“그렇지.”

“참! 우리 술 한 잔 더 하기로 하지 않았어요?”

“맞다, 그랬지. 술은 내가 준비할게.”

척사랑은 오른편에 있는 간이 주방으로 향했다.

“자위도 안 해 봤어요?”

문득 척사랑이 성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 아는지 궁금했다.

“너무 노골적인 질문 아냐?”

척사랑은 살짝 웃으며 물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기분이 상했을 텐데 이상하게 오늘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마흔 살이 돼서 그런 모양이네. 아무튼 나이란…….’

척사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다고 쉬쉬할 것도 아니잖아요.”

“그렇긴 하지. 요샌 거의 안 해.”

“전에는 했다는 거네요?”

“성에 대한 책을 많이 봤으니까. 여자처럼 살고 싶다는 욕구도 있었고.”

척사랑은 술을 챙겨 들고 태월령 앞으로 가 앉았다.

잠시 후 술판이 벌어졌다. 두 사람은 허리띠를 풀어 놓고 술을 마셨다.

주거니 받거니 술을 마시는 두 사람은 먹구름이 환수각을 뒤덮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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