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168)
금장생은 곧바로 몸을 굴렸다.
나려타곤 수법이었다.
게으른 나귀가 뒹군다는 뜻의 나려타곤 수법은 무인들이 수치스럽게 여기는 회피 방법 중 하나였다. 그런 동작을 금장생은 아무렇지 않게 했다.
중인이 보기엔 금장생의 상황이 그만큼 다급했다.
금장생이 바닥을 구르자 적풍영의 공격은 더욱 거칠어졌다.
그의 혈수가 수백 개의 구덩이를 만들어 놓았다. 그 혈수 중 수십 개가 금장생의 몸에 격중했다.
하지만 그걸로 금장생의 움직임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그런 금장생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있었다.
눈동자의 주인은 적지영이었다.
적지영의 얼굴엔 득의양양한 기색이 역력했다.
저 정도로 몰리면 마왕의 최강 무공인 적수마신만마공을 펼쳐야 한다. 그런데 마왕은 그 무공을 펼치지 않고 구르고 다닌다.
어떻게 보면 적풍영이 적수마신만마공을 펼칠 시간을 주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지금까지 반격할 기회가 다섯 번은 있었다. 설사 기억을 잃어 적수마신만마공을 모른다고 해도 한 번 정도는 펼쳐야 했다.
양극마신만마공은 쉬지 않고 펼치면서 적수마신만마공만 기억나지 않는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이제야 확실한 증거를 잡았다, 놈!”
적지영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적풍영에게 전음을 보냈다.
―이제 물러나. 그리고 놈이 일어나면 다시 해.
“크아아아!”
적풍영의 입에서 괴성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의 공격은 더욱 거칠어졌다.
―푸, 풍영아!
적지영은 질겁했다.
전음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듣지 못한다는 건 이성을 잃었다는 뜻이다.
‘벌써 시간이…….’
―누님!
그때 적운영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문제가 생긴 것 같다.
―어떤 문제가 생겼단 말입니까?
―제때에 내기를 멈추지 않으면 폭주하고 마는데 지금 풍영의 상태가 그런 것 같다.
―스스로 제어가 안 된다는 겁니까?
―스스로 제어할 수 있는 시기가 지난 것 같다.
―그럼……?
―이제 놈을 죽여 주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
―멈추게 해야 합니다.
적운영은 다급하게 말했다.
―멈추려면 풍영이 증폭단을 복용한 상태라는 걸 밝혀야 해. 그렇게 되면 풍영이 증폭단을 준비했다는 사실을 우리도 알고 있었다는 걸 자백하는 셈이 되고 말아. 그럼 어떻게 되겠니? 증폭단은 풍영 혼자 준비한 걸로 하는 수밖에 없어.
―형님이 폐인이 되는 걸 지켜보자는 겁니까?
―지금이라도 정신을 차리고 멈추면 괜찮아질지도 몰라.
적지영과 적운영은 계속해서 적풍영에게 전음을 보냈다.
하지만 적풍영은 두 사람의 전음을 무시했다. 그는 미친 듯이 금장생을 공격했다.
“크아아아아!”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전신에서는 더 강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움직임 또한 더욱 빨라졌다.
퍽! 퍽퍽! 퍽!
빨리 움직여 피한다고 하지만 열 개의 혈수 중 세 개는 금장생의 몸에 격중했다.
그렇다고 금장생이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나려타곤 수법으로 피하면서도 마수를 펼쳤다.
그가 펼친 마수 중 수십 개가 적풍영의 몸에 박혔다. 하지만 적풍영의 기세가 워낙 강해 타격을 받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가랑비에도 옷은 젖습니다, 서천장. 이렇게 두들겨 맞다가는 얼마 버티지 못합니다.
금장생은 바닥을 구르면서도 계속 전음을 보냈다.
적풍영이 이성을 잃은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금장생이 보내는 전음 때문이었다.
어느 순간 적풍영의 동작이 우뚝 멈췄다.
그가 멈추자 걷잡을 수 없이 솟구치던 기운도 언제 그랬냐는 듯 그쳤다.
“너, 너 이…….”
적풍영은 손가락으로 금장생을 가리켰다.
“공격을 다 한 모양이군요.”
금장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쿠웅!
금장생이 완전하게 일어선 순간 적풍영의 동체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비무장 주변 및 관중석 가솔은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적풍영은 곧 끝장을 볼 것처럼 공격을 해 대고 마왕은 보기에도 측은할 정도로 피해 다녔다. 그런데 한순간에 전세가 역전돼 적풍영은 쓰러지고 마왕은 일어난 것이다.
“내가 아직 죽을 때가 안 된 모양입니다.”
금장생은 옷을 툭툭 털며 말했다.
그의 말은 나직했지만 내공이 실려 있어 대연무장 구석구석까지 퍼져 나갔다.
“와아!”
“우와와와아!”
가솔들은 열광적으로 함성을 내질렀다.
“서천장은 치료를 해야 할 것 같은데…….”
금장생은 적지영을 보았다.
휙!
바로 그때 비무대 아래쪽에서 무인 한 명이 뛰어올라 왔다. 그는 적지영의 부관 청천수였다.
적풍영 앞으로 간 청천수는 재빨리 맥을 짚었다. 다행히 숨이 끊어진 건 아니었다.
‘응?’
청천수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왜 그러느냐?
그때 적지영의 전음이 들려왔다. 청천수에게 적풍영을 살피라고 명령한 사람이 적지영이었다.
―단전이…….
청천수는 말끝을 흐렸다.
―말해라.
―완벽하게 파훼됐습니다. 서천장은 무공을 잃었습니다, 천장.
‘죽일 놈!’
적지영은 죽일 듯한 눈빛으로 금장생을 보았다.
―일단 의원으로 모시겠습니다.
청천수는 적풍영을 안았다. 그리고 비무대를 내려갔다.
“혹시 또 마왕 자리에 도전하고 싶은 분은 다음 기회를 이용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저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여력이 없어서 말입니다.”
금장생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휙!
그러자 단상에 있던 이들이 비무대를 향해 몸을 날렸다. 아수수와 사미염을 비롯하여 왕부삼웅과 적순우 등이었다.
일행 중 가장 먼저 도착한 사람은 아수수였다. 그녀는 금장생을 부축했다.
“괜찮은가?”
아수수보다 한발 늦게 도착한 적순우가 물었다.
“괜찮고말고요. 이 정도로 쓰러지면 마왕이 아니지요.”
금장생은 아수수의 부축을 뿌리치고 혼자 걸었다.
곧 넘어질 것처럼 위태위태했지만 그는 비무대를 내려가 단상으로 가 섰다.
“나는 보다시피 멀쩡합니다. 몇 군데 멍이 들었겠지만 그 정도로 축제를 멈춘다는 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축제는 계속돼야 합니다, 철웅!”
금장생은 거석을 불렀다.
“네, 마왕!”
“내 기억에는 철웅이 어떤 무공을 익히고 있는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아니, 남아 있겠지만 기억하지 못합니다.”
“알겠습니다, 마왕! 제 무공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거석은 비무대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자신의 무공을 펼쳤다.
거석은 한 식경 넘게 자신의 무공을 펼쳤다. 그리고 원로로부터 조언을 들었다.
그게 시발점이었다.
적풍영의 도전으로 인해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다시 살아나며 본래의 축제의 장으로 변했다. 가솔들은 술과 음식을 먹으며 축제를 즐겼다.
저녁 무렵 하루 일정이 끝났다. 금장생은 그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모두 해산하고 나자 금장생도 마차에 올랐다.
“괜찮아요?”
아수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일부러 맞아 준 겁니다.”
“일부러요?”
아수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금장생을 보았다.
그녀는 금장생이 일부러 공격을 허용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녀가 적천영으로부터 들은 혈수는 그만큼 무서운 무공이었다.
“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무슨 소리죠?”
아수수는 물었다.
“머잖아 알게 될 겁니다. 그때 절 원망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당신을 원망할 일이 생기나요?”
아수수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아마도요.”
“무슨 일인데 제가 당신을…….”
“혈수는 어떤 무공입니까?”
금장생은 화제를 돌렸다.
“그건…….”
아수수는 말끝을 흐렸다.
“굳이 제가 말하지 않아도 시간이 흐르면 저절로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보다 혈수에 대해서 말해 주십시오.”
“휴우! 알았어요.”
아수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혈수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혈수를 알려면 먼저 마가오대철인에 대해 알아야 해요.”
거의 이천 년 가까운 역사를 지닌 마가에서는 수많은 무인이 태어났다. 그들 중 가장 강한 무인 다섯 명을 마가오대철인이라고 부른다.
“마가오대철인의 첫째는 흑철마신黑鐵魔神 적무황이에요. 그는 마가 초대 가주로 알려져 있어요. 하지만 정확하진 않아요. 마가의 역사가 워낙 오래되고, 역사로 기록된 부분이 많지 않기 때문이에요.”
흑철마신 적무황에 대해 알려진 건 그것뿐이다.
그의 무공이나 활동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이 없다. 다만 서천비고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전설 같은 말만 전해져 내려올 뿐이다.
“두 번째 무인은 무영유마無影幽魔 적보영이에요. 마가오대철인 중 유일한 여자이기도 해요. 흑철마신 적무황과 동시대를 살았다는 설과 몇백 년 후 사람이라는 설이 있지만 어느 게 정확한지는 아무도 몰라요.”
그녀에 대한 것 역시 흑철마신 적무황처럼 알려진 게 거의 없다.
“구체적인 행적이 드러난 사람은 세 번째 무인인 적영赤影 적군룡이에요.”
“적수마신만마공과 관련이 있는 분 같네요.”
“맞아요. 적수마신만마공을 창안하신 분이에요. 그가 창안한 무공은 현재까지 마가에서 가장 강한 무공이고, 오직 가주만이 익힐 수 있어요.”
“그렇군요.”
“네 번째는 양극천마兩極天魔 적좌윤으로, 마가 무공 서열 삼 위에 올라 있는 양극마신만마권을 창안한 무인이에요.”
“삼 위 무공이라면 이 위 무공이 따로 있다는 거네요.”
“그 무공이 바로 마가오대철인 중 막내인 혈수신마血手神魔 적상이 창안한 묵옥마수墨玉魔手예요. 그는 묵옥마수 말고도 한 가지 무공을 더 창안했는데 그 무공이 바로 혈수라고 불리는 혈옥수예요. 적수와 혈수, 마수 세 무공을 합쳐 마가삼천수라고 해요.”
“그런데 혈수를 왜 대단한 무공이라고 한 거죠?”
금장생은 물었다.
혈수가 대단한 무공이긴 하지만 마수보다 낫다고 하긴 힘들었다.
“마수를 이긴 무공이거든요.”
“마수를 이겨요?”
금장생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분명히 그렇게 기록돼 있어요,”
“혹시 그가 양극천마 적좌윤과 싸워서 이겼나요?”
“그건 아니에요. 혈수신마 적상은 양극천마 적좌윤보다 백 년 후 사람이에요.”
“적좌윤 본인이 아니고 마수를 익힌 마왕과 싸워서 이겼다는 말이군요.”
“네. 아무튼 그 사건은 마가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고 해요. 결국 혈수신마 적상은 자신이 창안한 혈수를 없애 버렸다고 했어요.”
“그런데 실전됐다고 알려졌던 혈수가 이번에 나타난 거군요.”
“네.”
“그 사람은 공연한 짓을 한 겁니다.”
“그 사람이라면 누굴 말하는 거죠?”
“혈수를 숨긴 적상 말입니다.”
“왜요?”
“마수는 결코 혈수보다 약한 무공이 아닙니다.”
“기록에 의하면 혈수신마 적상과 싸웠던 마왕은 양극마신만마권을 십이 성 익혔다고 했어요. 그런 분이 패했다면 마수가 패한 거 아닌가요?”
“그분이 익힌 십이 성이 완전한 십이 성이 아니었거든요.”
“그게 무슨 소리죠?”
“양극마신만마권에서 주시해야 할 건 만마권이 아니라 양극兩極입니다.”
“양극이라면?”
“양기와 음기를 동시에 가진 상태가 아니면 아무리 완벽하게 익혔다고 해도 본래 위력의 팔 성이나 구 성의 위력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당신 말은, 혈수가 마수를 이긴 게 혈수가 더 강해서가 아니라 마수가 본래 위력을 내지 못해서 그랬다는 건가요?”
“네.”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가 있나요?”
“완벽한 마수를 익힌 제가 이겼잖습니까.”
“당신이 음기와 양기를 다 가지고 있어요?”
“이겁니다.”
금장생은 양 손바닥을 폈다. 그러자 밤톨 크기의 구체가 생겨났다.
두 개의 공은 모두 흰색이고 속이 비칠 정도로 투명했다.
“이건?”
아수수의 눈이 커졌다.
왼손에서는 가공할 한기가 느껴지고 오른손 구체에서는 엄청난 열기가 감지되었다.
“아무튼 적풍영 그자는 다시는 무공을 펼치지 못하게 됐습니다.”
“단전을 파훼해 버린 건가요?”
“네. 그리고 머잖아 적지영과 적운영도 그렇게 될 겁니다.”
“다, 당신?”
아수수는 감격한 눈으로 금장생을 보았다.
그녀는 금장생이 그런 생각까지 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고마워요.”
아수수는 자기도 모르게 금장생의 품에 안겼다.
“윽!”
느닷없이 금장생이 신음을 내뱉었다.
“어? 왜 그래요?”
“적풍영 그자에게 맞은 데가 좀 아파서요.”
“어디 좀 봐요.”
아수수는 금장생의 장포를 풀었다.
“세상에…….”
상의까지 벗기고 알몸이 된 상체를 본 아수수는 할 말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