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166)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다가 일순간에 깊은 바닷속 같은 정적에 빠져들었다.
무려 일만 명 가까이 모여 있는데도 숨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이곳에 있는 모두는 등천명이 승천고 소리라는 걸 알고, 승천고는 승천비무를 요청할 때 치는 북이라는 사실도 안다.
문제는 승천고를 두드리는 자의 신분과 시기였다.
원래는 마왕에게 도전하는 도전 기간이었지만 천 년 이상 동안 단 한 번도 도전자가 없어 언제인가부터 승천비무 전 웃고 즐기는, 즉 전야제 같은 기간으로 변했다.
그런데 중천장 적풍영이 승천고를 친 것이다.
그건 곧 마왕에게 도전한다는 걸 뜻했다.
“설마 아닐 거야.”
“흥을 돋우려고 승천고를 친 게 분명해.”
서천왕부 가솔들은 적풍영이 정말로 도전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런 그들의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적풍영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생 동천장 천장 적풍영, 서천왕부 율법이 정하는 바에 따라 마왕께 가르침을 청하오이다.”
“헉!”
“억!”
“맙소사!”
여기저기서 경악한 외침이 흘러나왔다.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한 폭탄 발언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냐?”
그들 중 가장 놀란 사람은 원로원 수장이자 마왕의 고모할머니인 적순우였다.
그녀는 적풍영을 보았다.
“우리 서천왕부는 지난 세월 동안 모진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는 천년 거목이었습니다. 그런데 근자에 들어 그 고목이 부러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아니, 어쩌면 타서 재가 돼 버릴지도 모릅니다. 제 아버지가 지켜 왔고, 아버지의 아버지가, 조부님의 아버지가, 증조부님의 아버지가, 대대손손 지켜 왔던 왕부의 몰락을 저는 지켜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승천고를 친 겁니다.”
“중천장은 왜 왕부가 몰락할 거라고 생각하는가?”
“마왕은 기억을 잃었습니다. 즉 과거를 모른다는 말입니다. 자기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는 자가 어떻게 서천왕부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현 마왕은 전 마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은 정통 승계자네.”
“저자는 제 아버지로부터 마왕 자리를 물려받았다는 사실조차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마왕 자격이 없는 자란 말입니다. 만일 저자가 정상적인 사고를 가졌다면 기억을 잃은 상태로는 마왕직을 수행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스스로 물러났을 겁니다. 하지만 저자는 자신이 자격이 없다는 것 자체를 모릅니다. 그게 바로 마왕 자격이 없다는 증겁니다.”
“꼭 도전을 해야겠는가?”
“충동적인 결정이 아닙니다. 그동안 늘 생각해 왔던 사안입니다. 하지만 도전을 취소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취소하겠는가?”
“저자가 스스로 마왕 자리에서 내려오는 겁니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게냐?”
결국 적순우는 폭발하고 말았다.
“어서 취소하지…….”
“중천장은 율법을 어기지 않았습니다, 원주님.”
차가운 목소리가 적순우의 말을 잘랐다.
적순우는 고개를 돌렸다.
적지영이 벌떡 일어나서 이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적지영 옆에는 적운영이 서 있었다.
“너희 셋이 작당을 한 거였더냐?”
적순우는 물었다.
“작당이 아니라 율법이 허락한 정당한 도전이에요, 원주님. 그리고 장수원 원로들께서는 지켜보기만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현역에서 은퇴하신 분들이 우리 일에 간섭하는 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가, 감히 네가…….”
적순우는 부들부들 떨었다.
“지금 서천왕부를 끌어가는 사람은 장수원 원로들이 아니고 우립니다.”
적지영은 차갑게 쏘아붙였다.
사실 그녀는 적순우에게 감정이 좋지 않았다.
아버지가 막내인 적천영에게 마왕 자리를 물려주려고 했을 때 적순우를 비롯한 원로들이 적극적으로 반대했다면, 자신 아니면 적풍영이 마왕이 돼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순우와 원로들은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오늘 사태의 가장 큰 책임은 당신네들에게 있습니다.’
적지영은 내심 중얼거렸다.
“오냐, 얼마나 잘났는지 보자. 저 녀석이 마왕과 싸우기 전에 너와 내가 먼저 싸우는 건 어떠냐?”
적순우는 시뻘게진 얼굴로 소리쳤다. 혈파파란 별호를 얻게 하였던 성격이 유감없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고정하세요, 고모할머니.”
금장생이 적순우를 말렸다.
“무슨 소린가, 마왕!”
“서천장 말처럼 율법이 정한 도전입니다. 나무랄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마왕은 지금 내상을 입은 상태 아닌가? 내가 승천비무를 수십 번도 더 치렀지만 내상을 입은 상대에게 도전하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네! 적씨가 아닌 가솔들도 그러지 않는데, 하물며 서천왕부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자가 그러면 되겠는가?”
“저자가 내상을 입은 게 우리 잘못은 아닙니다, 원주. 아니, 중천장이 도전하리라는 걸 미리 알고 내상을 입은 척하는 건지도 모릅니다!”
적지영이 소리쳤다.
“갈!”
적순우가 버럭 소리쳤다.
“고모할머니!”
금장생은 적순우 앞으로 갔다. 그리고 손을 잡고 자리에 앉혔다.
“마왕!”
“마왕 자리라는 게 그런 자리 아닙니까. 때로는 비바람이 불기고 하고 폭풍우가 치기도 하잖습니까. 그걸 헤치고 나가는 자가 진정한 마왕이라 할 수 있겠지요.”
“마왕은 적풍영 저놈이 얼마나 강한지 아는가?”
“모릅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도 도전을 받아들이겠다는 건가?”
“저는 마왕입니다, 고모할머니. 그리고 저는 제게 마왕 자리를 물려주신 제 아버지를 믿습니다. 누님이나 형들에게 빼앗길 거라 생각했으면 물려주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러니 편안하게 앉아서 축제를 즐기십시오.”
금장생은 편안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난…….”
“걱정하지 마시래도 그럽니다. 아무튼 전 나가 보겠습니다.”
금장생은 곧바로 몸을 날렸다.
잠시 후 그는 비무대 한가운데 섰다. 그가 서자 적풍영이 다가왔다.
“전장에서 돈을 빌리셨더군요.”
금장생은 적풍영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돈을 빌리면서 열흘 후에 돌려주겠다고 했다.”
“실수하셨군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실수했다는 건, 이 비무의 승패와는 상관없다는 말입니다. 왜냐면 나는 세 분이 주신 돈 중 이백삼십만 냥을 내 이름으로 따로 입금시켜 버렸거든요.”
“지금 네 이름이라고 했느냐?”
―내가 가짜라는 걸 세 분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금장생은 빙그레 웃으며 전음을 보냈다.
“지금 네가 가짜라는 걸 실토하는 거냐?”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한 번 더 말하는 건 실토라고 하지 않고 비아냥댄다고 하지요.
“그러니까…….”
―가짜가 분명한데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심정이 답답하긴 할 겁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증거가 없는데?
“굳이 증거를 댈 필요가 없다. 이 자리에서 네놈을 없애 버리면 되니까.”
적풍영은 비무대 가장자리로 자리를 옮겼다.
―세상일이 다 마음처럼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다. 그리고 어르신 말씀이 급하게 먹는 밥은 체한다고 하였는데 혹시 알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급하게 먹는 밥…… 혹시?”
적풍영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문득 놈의 술수에 말려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아닐 거야. 저놈이 그랬을 리가 없어.’
그는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둥!
바로 그때 승천고 소리가 들려왔다. 비무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였다.
적풍영은 전 내공을 끌어 올렸다. 곧 그의 주위로 역장이 형성되었다.
적풍영은 양팔로 내기를 보냈다. 그러자 그의 양손이 청색으로 변했다.
“청옥수靑玉手다!”
관중석의 누군가가 소리쳤다.
초식 이름은 청옥, 묵옥이지만 사람들은 청옥수, 묵옥수라고 불렀다.
“타하!”
적풍영은 기합과 함께 금장생을 향해 쏘아져 갔다.
순식간에 십 장을 나아간 그는 오른손과 왼손을 번갈아 휘둘렀다.
스아아악!
스산한 소리와 함께 손바닥 문양 수십 개가 나타나 금장생을 향해 쏘아졌다.
피할 곳이 전혀 없는 완벽한 공격이었다.
“차아!”
바로 그때 금장생의 입에서 기합이 터져 나왔다.
금장생은 양팔을 빠르게 휘둘렀다.
순간 그의 앞 허공에도 수십 개의 주먹 형태의 강기가 나타났다. 양극마신만마권으로 펼치는 마수였다.
퍽! 퍽퍽퍽! 퍽퍽퍽! 퍽퍽!
청옥과 마수가 부딪치며 둔탁한 소성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쿵쿵쿵쿵! 쿵쿵!
두 사람은 동시에 다섯 걸음씩 물러났다.
“차앗!”
“타하!”
자세를 잡자마자 기합을 내지르며 서로를 향해 몸을 날렸다.
두 사람 사이는 빠르게 좁혀졌다. 하지만 두 사람은 공격을 펼치지 않았다.
어느새 적풍영의 양손은 먹물에 담갔다가 꺼낸 것처럼 새카맣게 변해 있었다.
적풍영은 묵옥을 끌어 올린 채 기회를 노렸고, 금장생은 여전히 마수를 펼칠 준비를 한 상태였다.
파앗! 파앗!
이 장 거리를 두고 두 사람은 빠르게 좌우로 움직였다.
수시로 손을 내뻗었지만 모두가 허초였다.
“차앗!”
적풍영이 느닷없이 오른팔을 쭉 내밀었다.
그러자 금장생의 단전을 향해 손바닥 형태의 검은 강기가 화살처럼 쏘아졌다.
휙!
손바닥 형태의 강기가 일 장 건너편까지 다가오는 순간 금장생이 왼팔을 쭉 내질렀다.
콰앙!
이번에는 화탄 터지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응?’
적풍영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두 힘이 부딪칠 때 나오는 반발력이 조금 전보다 더 커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문득 내상을 입었다는 것도 거짓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두고 보면 알겠지.’
적풍영은 금장생을 향해 쏘아져 가면서 양팔을 번갈아 내뻗었다.
수백 개에 달하는 묵옥이 금장생 전면을 가득 채웠다.
“차앗!”
금장생의 입에서 우렁찬 기합이 터져 나왔다.
그의 양팔이 빠르게 움직이고 삼백예순다섯 개의 장掌이 그 앞을 가득 채우며 나아갔다. 마치 장으로 들어찬 공간이 나아가는 것 같았다.
금장생이 펼치는 무공은 철장이었다.
퍽! 퍽퍽퍽! 퍽퍽퍽! 퍽!
철장은 묵옥을 부수며 나아갔다.
자신의 무공이 파훼되자 적풍영은 깜짝 놀랐다.
적풍영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지금까지 그는 팔 할의 내공만 사용했다. 그런데 그 정도로는 상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해야 한다면…….’
적풍영은 모든 내공을 끌어 올렸다.
그의 장포가 팽팽하게 부풀고 몸 주위 역장은 더욱 강해져 새카만 광채를 뿜어냈다.
파앗!
적풍영은 바닥을 찼다.
그는 근접전으로 승부를 볼 생각이었다.
두 사람 사이는 일 장으로 좁혀졌다.
적풍영은 금장생을 보았다.
그는 금장생이 당황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금장생의 표정은 조금 전 그대로였다. 마치 거리와는 상관없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놈!’
조금도 당황하지 않는 금장생의 모습에 적풍영은 공연히 질투가 났다.
아버지가 막내에게 마왕 자리를 물려준 이유가 어쩌면 바로 저런 모습 때문일 거란 생각이 들자 짓이겨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치밀었다.
가짜 놈은 많은 부분에서 막내를 닮은 점이 많았다.
“죽여 주겠다!”
그는 이를 악물고 더욱 거리를 좁혔다. 이제 두 사람은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가 되었다.
“차앗!”
적풍영은 기합과 함께 손을 휘둘렀다. 그와 동시에 금장생도 오른손을 내밀었다.
퍽! 퍽! 퍽퍽퍽! 퍽퍽!
서로의 얼굴 앞에서, 심장 앞에서, 단전 앞에서, 사혈 앞에서 둔탁한 소성이 계속해서 터져 나왔다.
처음에 주도권을 쥔 자는 적풍영이었다.
그의 묵옥은 금장생의 장포 앞까지 나아갔고, 금장생은 가까스로 막아 내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금장생은 교묘한 보법과 손놀림으로 적풍영은 공격을 막아 냈다.
그렇게 공격과 수비가 이어졌다.
‘이건?’
적풍영은 당황했다.
묵옥이 뻗어 나가지 못하고 중간에서 막힌다는 기분이 들었다.
‘저놈이?’
밀리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그 시간은 촌각에 불과하니까 다시 공격하면 된다.
문제는 그 촌각들이 더해지면서 긴 시간이 되고, 결국엔 주도권이 금장생에게로 넘어가는 데에 있었다.
처음엔 금장생 바로 앞에서 묵옥과 마수가 맞닥뜨렸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맞닥뜨린 위치가 적풍영과 가까워졌다.
적풍영은 주도권을 넘겨주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양팔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라졌다.
하지만 전세를 바꾸지는 못했다.
퍼억!
급기야 명치에 금장생의 권을 허용하고 말았다.
“커억!”
적풍영은 비명을 내지르며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