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164)
승천비무
금장생이 적지영 일행으로부터 이백삼십만 냥을 갈취한 사건은 아무도 모르게 넘어갔다.
그 사건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적지영 일행 세 명과 금장생뿐이었는데, 네 사람이 모두 침묵했다.
적지영 일행은 횡령 사실이 밝혀질 게 겁나서 쉬쉬했고, 금장생은 밝힐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영원한 비밀은 없었다.
그 일에 대해 가장 먼저 알아차린 사람은 아수수였다.
적지영이 전장에서 수백만 냥을 빌렸다는 소문이 은밀하게 돌고 있었다. 소문을 접한 대부분은 적지영 일행이 돈을 빌릴 리가 없다며 헛소문으로 치부했지만 아수수는 달랐다.
그리고 그녀는 수백만 냥이란 사실에 주목했다.
그래서 금장생에게 그 일에 대해 물었다.
“적지영이 가져온 돈은 이백이십만 냥입니다.”
금장생은 딱 잡아뗐다.
“사실이에요?”
“제가 왜 거짓말을 합니까?”
“아닌 것 같은데…….”
아수수는 금장생을 빤히 바라보았다.
“어디서 무슨 말을 듣고 온 겁니까?”
“적지영 일행이 전장에서 수백만 냥을 빌렸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요.”
“그렇게 큰돈을 빌렸는데 소문이 나지 않을 수가 없겠지요.”
“우리는 보통 이백만 냥 정도는 수백만 냥이라고 하지 않아요.. 수백만 냥이라고 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사백만 냥 이상이 돼야 한다는 게 일반적인 상식이에요.”
“그러니까 내가 이백만 냥 이상을 횡령했다는 겁니까?”
“아닌가요?”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입니까?”
“네.”
아수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까지 잤는데도 아직 날 못 믿는군요.”
“아니에요. 나는 당신을 믿어요. 한 가지 부분만 빼고요.”
“그게 뭡니까?”
“돈이에요. 당신은 모든 부분에서 완벽한데 돈 앞에서만큼은 나쁜 놈이 돼요.”
“나쁜 놈요?”
“네.”
“아무래도 그동안 내가 너무 돈, 돈, 한 모양이군요. 반성하겠습니다.”
“아무 말 안 할 테니까 사실을 말해 봐요.”
“어떤 사실을 말하는 거죠?”
“내가 전장으로 가서 물어보면 금세 알 수 있다고요. 그렇게 하길 바라시는 거예요.”
‘끙!’
금장생은 내심 뜨끔했다. 이러다가 정말 들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일 절대로 없습니다. 그리고…….”
금장생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고는 책상 서랍을 열어 선물 포장한 걸 꺼내 아수수 앞으로 내밀었다.
“이건 뭐죠?”
“풀어 보세요.”
아수수는 끈을 풀고 천을 펼쳤다. 안에서 나온 물건은 상자였다.
“이건?”
아수수는 금장생을 보았다.
“열어 보십시오.”
아수수는 상자 뚜껑을 열었다.
“아!”
아수수의 눈이 커졌다. 상자 안에는 반지, 귀걸이, 목걸이, 비녀가 들어 있었다.
“원래는 당신 생일 때 주려고 했는데, 그때 여기 없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미리 주는 겁니다.”
“세상에…….”
아수수의 귀에는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미 머릿속에서 전장이나 횡령이란 단어도 사라지고 없었다.
아수수는 황홀한 눈으로 녹영을 바라보았다.
“자고로 부인의 잔소리를 잠재우는 가장 좋은 건 아주 고가의 선물이야, 이 녀석아.”
언젠가 아버지가 어머니께 선물하면서 하신 말씀이었다.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아버지.’
금장생은 내심 중얼거렸다.
바로 앞에서 뜨거운 숨결이 느껴지자 금장생은 시선을 들었다. 아수수가 뜨거운 눈빛으로 이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다가 아냐. 어린 네가 이해하지 못하는 보상도 있어.”
“그게 뭔데요?”
“나중에 크면 알게 돼.”
아버지가 이어서 하신 말씀이었다.
“이건 그다지…….”
“불은 지른 사람이 꺼야 하는 거예요.”
아수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그리고 금장생의 얼굴을 잡아당겨 입을 맞췄다.
두 사람이 밖으로 나온 건 반 시진 후였다.
건물 문 앞에는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마차 좌우측에는 옷을 차려입은 호위대가 늘어서 있고, 문 앞에는 대주 거석과 총관 나박, 군사 유공, 마마호위대 대장 사마영이 서 있었다.
네 사람은 금장생과 아수수를 향해 인사를 했다.
두 사람은 마차에 올랐다.
마차는 바로 출발했다.
“여기서 뭐 해?”
아수수가 마차 뒤로 시선을 주며 말했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아지랑이 같은 게 일렁이고 있었다.
“호위하는 거야.”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사미염이었다.
“누굴 호위하는 건데?”
“마마님이지 누구겠어. 그리고 궁금한 것도 있고.”
사미염은 금장생을 빤히 쳐다보았다.
“날 보는 이유가 뭐죠?”
금장생이 물었다.”
“강기막 좀 쳐 줄래요?”
“중요한 이야긴가 보죠?”
“이거에 대한 이야기예요.”
사미염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을 쿡 눌렀다.
‘끙!’
금장생은 얼굴을 찌푸렸다. 하는 양이 아수수와 사미염이 술을 마신 그날 밤 이야기인 것 같았다.
“어떤 게 궁금합니까?”
금장생은 말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 강기막을 펼치며 물었다.
“첫 번째는 왜 우리 둘이 알몸으로 껴안고 있었는지 그걸 알고 싶어요.”
“기억이 하나도 안 나요?”
“무슨 기억을 말하는 거죠?”
“먼저 사 비주가 내 얼굴에 토를 하고 나서 두 분은 속에 있는 걸 전부 게워 냈습니다. 그다음에 자기네들이 토한 토사물 위에서 수영을 했고요.”
“수, 수영까지 했다고요?”
“우욱!”
그 상황을 상상한 듯 아수수는 구역질을 했다.
“그게 다가 아닙니다. 수영을 하다가 볼일까지 봤습니다.”
“보, 볼일이라고요?”
사미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설마 오줌까지 쌌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걸 전부 제가 치웠습니다.”
“게다가 우리도 씻겼고요?”
“두 분을 씻기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왜요?”
“그건 무슨 뜻입니까?”
“그런 좋은 기회를 왜 가만두었냐는 말이에요. 우린 완전히 무방비 상태였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두 분을 덮쳤어야 한다는 건가요?”
“정상적인 남자들은 그러지 않나요?”
“정상적인 남자가 아니라 밝히는 자들이겠죠. 아무튼 나는 두 분을 침대에 눕히고 제 집무실로 가서 잤습니다. 됐나요?”
“알았어요.”
“이제 강기를 거둬도 되죠?”
“한 가지 더 있어요.”
“말하세요.”
“영약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죠?”
“영약이라는 건 무슨 소리죠?”
“대륙황가로 들어가자마자 마왕은 석 단주에게 영약을 달라고 했잖아요. 마치 맡겨 놓은 것처럼요.”
“아! 그걸 말하는 거군요.”
금장생은 빙긋 웃었다.
“원래부터 알고 있었던 건 아니죠?”
“그날 처음 만났는데 알 리가 없잖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된 거죠?”
“믿음입니다.”
“믿음이라고요?”
“중원삼대상단 정도 되면 그 정도 영약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거거든요.”
금장생이 석보산에게 영약이 있을 거라는 확신은 과거 경험에서 나왔다.
황금전가에 영약이 있어 자신의 병을 고친 것처럼, 대륙황가 또한 반드시 영약을 보유하고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다 없었으면 어떻게 하려고…….”
“있었잖아요.”
“풋!”
사미염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웃고 말았다.
“이제 강기를 거두겠습니다.”
“알아서 하세요.”
세 사람을 태운 마차는 대연무장으로 들어섰다.
“와아아!”
“우와아아!”
마차가 대연무장으로 들어서자 사방에서 함성이 들려왔다. 그러자 사미염은 얼른 은신술을 펼쳤다.
“대주, 마차 뚜껑을 열어 주세요.”
아수수는 거석을 향해 말했다.
“마차 뚜껑을 열어라!”
거석은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그러자 한 명이 마차 위로 올라갔다.
지붕 맨 앞으로 간 그는 삐죽 튀어나와 있는 줄을 잡고 뒤편으로 이동했다. 그러자 마차 지붕이 판자를 쌓아 놓은 것처럼 접혔다.
이어 두 명이 좌우측으로 가서 벽 양끝에 있는 고리를 풀었다. 벽 역시 천장처럼 접혔다.
금장생과 아수수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와아아아!”
“우와아아!”
서천왕부 가솔들은 열화와 같은 함성을 내질렀다.
금장생과 아수수는 손을 번쩍 들었다. 두 사람을 태운 마차는 대연무장 가장자리를 따라 천천히 이동했다.
“아마 승천비무 사상 가장 많은 인원이 모였을 거예요.”
아수수는 웃으며 말했다.
과거 승천비무는 내가內家인들만의 축제였다. 서천왕부 외곽의 마을에도 초대장을 보냈지만 그들은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마을의 대표 격인 여덟 촌 사람들을 비롯한 모든 마을에서 사람이 나왔다.
그래서 대연무장과 관중석까지 발 디딜 틈 없이 인파로 가득했다.
“좋은 거겠죠?”
“물론이죠.”
아수수는 활짝 웃었다.
환호성과 함께 마차는 대연무장을 빙 돌아 본부석 앞에 멈췄다.
“어서 오십시오.”
각 천장들을 비롯한 서천왕부 수뇌들이 마차에서 내리는 금장생과 아수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준비들 하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단 위로 올라갔다.
그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원로들이 앉아 있는 귀빈석이었다.
“나오셨습니까?”
금장생은 적순우를 비롯한 원로들에게 인사를 했다.
“여행을 갔다가 공격을 받았다고 들었는데 다친 데는 없는가?”
“수수가 좀 다쳤는데 전화위복이 됐습니다.”
“전화위복이 됐다는 건 무슨 소린가?”
적순우는 물었다.
사적인 자리에서는 하대를 하지만 지금처럼 공적인 자리에서는 마왕의 명예를 지켜 주기 위해 반공대를 했다.
“갔던 곳에 영약과 약왕이 있어서 수수를 치료했을 뿐 아니라 내공이 팔 갑자나 되는 절대 고수가 됐습니다.”
“지, 지금 팔 갑자라고 하였는가?”
“세상에…….”
“맙소사.”
여기저기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주변에 있던 이들은 경악한 얼굴로 아수수를 보았다.
말이 좋아 팔 갑자 공력이지 무려 사백팔십 년 동안 쉬지 않고 내공을 쌓아야 모을 수 있는 양이다. 그 정도 내공이면 중원 무인들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문제가 있단 말인가?”
“그녀의 무공이 내공을 받쳐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왕 말은…….”
“저번에 제가 겪은 일도 있고, 이번에도 역시 자객들의 공격을 받은 걸 보면 계속해서 누군가가 저 노릴 것 같습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제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수수가 저를 대신해야 하는데 지금 무공으로는 힘듭니다.”
“마왕의 무공을 전수해 주겠다는 말인가?”
“원로분들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전수하고 싶습니다.”
“그건 안 됩니다!”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벌떡 일어나 소리친 사람은 적지영이었다.
“왜 안 된다는 거냐?”
“마가 가주무공은 우리 적씨에게만 전해져야 합니다.”
“그건 말이 안 됩니다, 서천장.”
금장생은 차분하게 말했다.
“뭐가 말이 안 된다는 겁니까?”
“승천비무를 시작하고 닷새 동안은 마왕에게 도전하는 기간입니다. 서천장의 논리대로라면 적씨가 아니면 도전이 불가능하다는 건데, 마가 율법 어디에도 그런 내용은 나와 있지 않습니다. 내 말이 틀렸습니까?”
“그건…….”
적지영은 할 말을 잃었다.
“외부로 내보내는 것도 아니고 유사시를 대비해서 부인에게 전수하겠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마왕의 뜻대로 하시게.”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금장생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몸을 돌렸다.
“개회 선언을 해 주십시오, 마왕.”
단상 앞에 서 있던 군사 유공이 금장생을 보며 말했다.
“알았습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걸음을 옮기면서 그는 적지영을 보았다.
―이번 승천비무는 기대해도 좋다, 놈!
적지영은 금장생에게 전음을 보냈다.
―원래 개가 사람을 물면 개 주인에게 책임을 묻는 법인데, 서천장이 나와 피가 섞여서 그냥 넘어간 겁니다. 하지만 개는 나와 피가 섞이지 않았지 않습니까. 원래는 죽일 생각이었는데 서천장을 생각해서 살려 둔 겁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더 데리고 놀고 싶으면 다른 사람에게 이를 드러내지 않도록 관리 잘하십시오. 한 번만 더 이빨을 보이면 그땐 목을 쳐 버릴 겁니다.
금장생은 적지영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단상 앞으로 갔다.
그는 단상 앞에 서서 가솔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서천왕부를 나설 때만 해도 이 자리에 설 수 있을 거라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기어코 이 자리에 다시 섰습니다. 기억을 잃은 상태이긴 하지만 여러분이 믿고 따라 준다면 나는 마왕직을 수행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마왕을 믿습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가솔들은 오른손을 들어 올리며 고함을 내질렀다.
거의 일만에 달하는 이들이 내지른 외침에 서천왕부가 들썩거렸다.
휙!
금장생은 오른팔을 들었다.
그러자 장내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지금부터 승천비무를 시작한다!”
“우와아!”
“와아아아!”
서천왕부 가솔들은 벌떡 일어나 함성을 내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