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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가-156화 (156/524)

황금가 (156)

무혼의 말이 맞다.

크로노마스는 고대의 비술을 찾아냈고, 차원의 문을 여는 방법을 연구 중이다. 그 때문에 다른 세상이 차원 통로에 신기루처럼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가 원하는 게 뭐지?”

“모른다.”

“거짓말!”

무혼은 바타르를 빤히 쳐다보았다.

무려 팔천 살에 달하는 고룡이면서 종족의 총로드가 바로 바타르다. 그런 그가 크로노마스가 하고자 하는 일을 모를 리가 없다.

“정말 모른다.”

“하긴…….”

무혼은 피식 웃었다.

설사 안다고 해도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지금은 지켜본다, 크로노마스.”

무혼은 허공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아스!”

무혼의 입에서 나직한 외침이 흘러나왔다.

웅! 웅웅! 웅웅!

그러자 무혼 옆 공간에서 대기가 요동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곧 커다란 동체가 나타났다.

그것은 타이탄이라고 불리는 기사들의 무기였다.

무혼의 시선이 타이탄의 얼굴로 향했다.

황금색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늘어져 있고, 유니콘의 그것과 같은 뿔이 길게 나 있는 투구를 쓰고 있다. 귀는 엘프를 닮아 길쭉하고 눈은 푸른색이다.

푸른색 목걸이를 목에 걸었고, 황금 갑옷을 걸쳤다. 아래는 짧은 치마를 입었는데, 치마 아래로 드러난 다리는 은색이다.

육 미터에 달하는 커다란 크기임에도 불구하고 거부감이 들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몸매를 지닌 타이탄. 그녀의 이름은 아마조네스 드 샤이아다.

그를 이곳까지 오게 만든 장본인이다.

문득 아스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약간의 자아만 가지는 다른 타이탄과 달리 아스는 에고 타이탄, 즉 영혼을 가진 타이탄이었다.

그 영혼의 주인이 바로 수천 년 전 최강의 엘프 마법사였던 아마조네스 드 샤이아다. 그녀를 네 배 정도 확대시켜 놓은 게 타이탄 아스였다.

그녀는 생뚱맞게 결혼하겠느냐고 물었다.

“왜 개조하지 않는 거냐?”

바타르가 물었다.

일천 년 전 고대의 유물이 발견되면서 대륙의 역사는 새로 씌었다.

삼천 년 전 그랜드 크로스 때 거대한 화산 폭발이 있었고, 그 영향으로 지진이 일어나 바다가 육지와 같은 높이까지 융기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곳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인체에 치명적인 유독가스로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으로 들어가게 된 건 그랜드 크로스가 일어난 이천 년 후였다.

그곳으로 맨 처음 들어갔던 자가 엄청난 걸 발견했는데, 그건 바로 키가 십 미터가 넘는 거대한 타이탄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타이탄은 가드급, 로열급, 슈페리어급, 그레이드급의 네 등급으로 분류했다. 크기 또한 육 미터 내외로 대동소이했다. 다만 타이탄의 동력이라고 할 수 있는 하트에 따라 강약을 구분했을 뿐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십 미터 이상의 거대한 타이탄이 발굴된 것이다.

처음에 사람들은 누군가가 만들어 묻은 가짜 타이탄이라고 생각했다.

그랬던 타이탄이 계약이라는 과정을 통해 기사와 하나가 되고 소위 가드급이라고 불렸던 최강의 타이탄과 대등하게 싸우는 걸 보고 사람들은 자신들이 잘못 생각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 타이탄이 만들어진 연대는 놀랍게도 고대라고 불리는 역사 이전이었다.

사람들은 그 타이탄을 일만 년 이상을 산 최강의 고룡을 일컫는 말인 라그나뢰크라 명명했다. 그리고 가드급 타이탄보다 위에 놓았다.

수많은 왕국과 제국이 라그나뢰크 발굴에 열을 올렸다.

고대에 차원 통로가 건설됐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도 그 무렵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차원 통로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았다. 차원 통로보다는 라그나뢰크 발굴이 더 급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고대의 문서가 다량 발견됐는데, 그 안에서 라그나뢰크의 설계도가 나왔다. 설계도를 발견한 자는, 그 설계도 때문에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세상에 공개해 버렸다.

라그나뢰크를 만드는 방법은 대륙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갔고, 설계도를 입수한 자들은 보유한 타이탄을 개조했다.

그로부터 일천 년이 지난 지금 저렇게 작은 타이탄은 박물관이나 가야 볼 수 있다.

그런데 무혼은 타이탄을 개조하지 않고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그녀의 처음 만났을 때 첫마디가 뭐였는지 알아?”

무혼의 눈빛이 아득해졌다.

“모른다.”

바타르는 고개를 저었다.

“‘난 아마조네스 드 샤이아다! 나와 결혼하겠는가?’였어.”

무혼은 빙긋 웃었다.

“놀랐겠구나.”

“놀란 정도가 아니었어. 그 당시 나는 거기로 건너간 지 얼마 되지 않았거든. 오크를 두 발로 걷는 돼지라고 생각했으니까.”

무혼의 시선이 먼 하늘로 향했다.

“좋다. 너와 결혼하겠다! 됐냐?”

“그걸로는 부족하다. 맹세를 해야 한다.”

“끄응! 고철 덩어리가 별 그지 같은 소릴 다 하네.”

“무슨 말인가?”

“아냐, 인마. 맹세는 어떻게 하는 건지 그거나 말해 봐.”

“따라 해라. 나 아마조네스 드 샤이아는!”

“나 갈릭 드 무혼은?”

“갈릭 드 무혼을 남편으로 삼아.”

“아마조네스 드 샤이아를 아내로 삼아.”

“영원히 아끼고 사랑하겠노라!”

“영원히 아끼고 사랑하겠노라!”

“우리 둘은 죽음도 갈라놓지 못할 것이며!”

“우리 둘은 죽음도 갈라놓지 못할 것이며!”

“죽어서도 하나가 될 것이다.”

“죽어서도 하나가 될 것이다.”

“이를 배신한 이는!”

“이를 배신한 이는!”

“영원의 바다에서!”

“영원의 바다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다.”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다.”

장난 같았던 맹세였다.

그 또한 그 맹세를 지킬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도 아니고 금속으로 만들어진 타이탄이었다.

그런데 그 맹세를 지키기 위해 차원을 넘어 이곳까지 왔다.

그녀를 구하기 위해.

“나도 너와 아마조네스에 대한 걸 알아보았다. 그런데 자료가 별로 없더구나.”

“아스에 대한 건 내가 지웠으니까.”

“왜?”

“내가 죽은 후 아스가 누군가에게 이용당하는 게 싫었거든.”

“다른 누군가가 아마조네스에 탑승하는 게 싫어서 기록을 지워 버렸다는 거냐?”

“맞아. 그런데…….”

“아는 자들이 있었다는 거구나.”

“내가 아스를 타고 싸우는 걸 본 사람이 수만 명이 넘었으니까.”

“죽기 전에 아마조네스를 숨기지 않았는가?”

“숨겼지.”

일순 무혼의 몸에서 진득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응?’

바타르는 흠칫했다.

무혼에게서 흘러나온 살기는 드래곤인 그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강했던 것이다.

‘사연이 있나 보네.’

그는 무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그 맹세 때문에 아마조네스를 개조하지 않은 건가?”

바타르는 처음 질문으로 되돌아갔다.

“결혼한 부인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잖아. 안 그래?”

“쿡! 일리가 있네.”

바타르는 피식 웃었다.

“바타르 너는 왜 그를 따르는 거지?”

문득 든 생각이었다.

삼천 년 전 그랜드 크로스 때 샤이칸드리아 대륙 드래곤은 르산나를 빼고 모두 죽었다.

그들의 공백을 메운 자들이 헤이람 대륙에서 건너온 바타르 일족이다.

헤이람 대륙은 샤이칸드리아 대륙 정반대편에 위치해 있는 대륙으로 그랜드 크로스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 바타르를 비롯한 드래곤들을 샤이칸드리아 대륙으로 인도한 이는 르산나였다.

정확하게 몇 객체가 샤이칸드리아 대륙으로 왔는지는 모른다. 그런데 스스로 지상 최강의 생명체라고 여기는 드래곤들이 크로노마스를 따르고 있다.

비록 그랜드 크로스를 겪지 않았다고 하지만 크로노마스에 대해서는 르산나로부터 들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바타르는 아무 거부감 없이 크로노마스의 부하가 된 것이다. 아니, 정말로 굴복하고 부하가 된 건지 살아남기 위해 그런 척하는 건지 알 수는 없다.

“그는 드래곤 역사상 최강의 드래곤이니까?”

“하지만 영혼은 인간이지.”

“영혼이 인간이라고 해서 그가 드래곤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무혼. 내게 있어 그는 두 대륙이 낳은 가장 위대한 드래곤이다. 그리고 그는 우리에게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았다.”

“삼천 년 전에 그에게 철저하게 당했던 건 어떻게 하고.”

“우린 그들과 같은 드래곤이 아니다. 그때 나는 헤이람 대륙에 있었다. 만일 내가 이곳 샤이칸드리아 대륙에 있었다면 협상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드래곤을 없앤 건 크로노마스가 아니라 어둠의 드래곤이었다.”

“그래서 크로노마스는 아무런 죄가 없다는 거냐?”

“죄가 없다는 게 아니라 우리 종족의 내부 일일 뿐이라는 거다.”

“의미를 부여하지 않겠다는 거구나.”

“나는 지금은 전쟁을 해야 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쿡!”

무혼은 피식 웃었다.

그게 전부가 아닐 것이다.

그랜드 크로스 때 샤이칸드리아 대륙 드래곤은 멸종했다. 그걸 알고 있는 바타르는 자신들도 샤이칸드리아 대륙 드래곤처럼 멸종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크로노마스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

“설마 카알라스 그놈들이 다시 살아난 건 아니겠지?”

카알라스는 마계에서 돌아온 어둠의 드래곤 수장의 이름이다. 헤이람 대륙의 드래곤은 아무리 적어도 수십 객체는 될 것이다. 그들 모두가 크로노마스에게 굴복했다는 건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모른다.”

바타르는 고개를 저었다.

무혼은 바타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내가 신경 쓸 건 아니지.’

샤이칸드리아 대륙에 살아가는 인간도, 드래곤도, 각자 알아서 살면 된다. 이제는 더 이상 그들 삶에 끼어들지 않을 것이다. 무혼은 아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들어가겠다, 아스.”

그는 아스를 향해 몸을 날렸다. 잠시 후 아스 안쪽에 마련된 마법의 공간으로 들어갔다.

“좋군.”

무혼은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머금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장소가 바로 여기다. 여기에 앉아 있으면 모든 근심 걱정이 눈 녹듯 사라진다.

무혼은 오른편으로 시선을 옮겼다.

육십 센티미터 높이의 단이 있고 그 위에 특이한 검 한 자루가 올려져 있다. 과거 그가 사용하던 그레이훼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거면 충분해.”

무혼은 오른손을 쭉 내밀었다.

촤르르!

그러자 붉은색 연도가 손목에서 풀려나왔다.

천처럼 얇음에도 불구하고 수평으로 쫙 펴진 그것은 아버지의 유품인 수라修羅였다.

“어서 와라, 무혼.”

아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와, 무혼!’이라고 하라고 수백 번도 더 가르쳤다. 그런데 아스는 여전히 ‘어서 와라, 무혼!’이라고 퉁명스럽게 말한다.

들어올 때마다 다정한 목소리를 기대하지만 늘 기대로 끝난다.

“여긴 내 고향이야.”

“고향이 뭔가?”

“…….”

무혼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과거의 아스는 설명해 주지 않아도 고향이 무슨 말인지 알았다. 그런데 지금의 아스는 설명해 줘도 모른다.

“네 상태가 어떤지 한번 보자.”

차르르!

수라가 다시 그의 팔목의 팔찌 안으로 사라졌다.

무혼은 그 자리에 가부좌를 했다. 이곳 기운에 익숙해지기 위해 운기행공을 할 참이었다.

그가 가부좌를 하자 아스도 가부좌를 했다.

무혼은 곧바로 양극신공을 끌어 올렸다.

그의 전신에서 가공할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 기운은 곧 아스의 하트에서 흘러나온 기운과 합쳐졌다.

무혼은 금세 삼매경으로 빠져들었다.

둥실!

아스의 동체가 떠올랐다. 수십 톤에 달하는 아스가 떠오른 높이는 무려 십 미터나 되었다.

그 상태에서 무혼은 운기행공을 했다.

곧 아스 주변으로 역장이 형성되었다. 역장은 두 개의 기운으로 나뉘었다.

붉은색 역장은 가공할 열기를 뿜어냈고, 백색 역장은 한기를 뿜어냈다.

파직! 파지직!

그리고 두 기운의 경계선상에서는 충돌이 일어나며 특이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잠시 후 두 기운이 서로의 기운 속으로 스며들었다.

하지만 중간 정도 진행하다가 더 이상 나아가지를 못했다.

삼매경에 빠져 있던 무혼의 얼굴이 슬쩍 찌푸려졌다. 운기행공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이내 그의 얼굴은 본래 상태로 돌아갔다. 그리고 두 기운이 섞이지 않은 채로 운기행공은 계속되었다. 현재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운기행공이 끝나자 아스는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번쩍!

아스의 눈에서 푸른 광채가 쏟아져 나왔다.

퍼억!

아스는 왼팔로 바닥을 쳤다.

휘릭!

공중제비를 넘어 내려섰다.

아스의 두 팔이 허공을 감아 돌았다. 그리고 춤을 추는 것처럼 천천히 움직였다.

오른 다리를 내뻗고 왼팔을 들어 올렸다. 왼발을 오른발 앞으로 내밀고, 왼팔과 오른팔을 교차시켰다.

훌쩍 뛰어오르며 빙글 돌았다.

왼 다리에 모든 체중을 싣고 오른 다리를 앞으로 내밀었다. 무게중심을 앞으로 이동시키면서 왼팔로 강하게 허공을 후려쳤다.

푸아악!

새하얀 광채가 공간을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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