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153)
‘끙!’
하지만 이내 얼굴을 찌푸렸다.
불빛은 보이기만 할 뿐 활활 타오르지 않았다. 그 불빛을 주시하며 다시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불빛은 깜빡깜빡하기만 할 뿐 더 커지지 않았다.
“다음을 기약하는 수밖에 없네.”
금장생은 깊은 숨을 내쉬며 자세를 풀었다. 그리고 사미염을 찾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가장 먼저 그의 눈에 들어온 건 달덩이처럼 커다란 엉덩이였다. 이 장 떨어진 곳에서 사미염이 절벽을 바라보며 볼일을 보고 있었다.
문득 사미염의 피부가 무척 하얗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쳐다보고 있으면 무안해지는 상황이 벌어질 게 분명했다.
금장생은 고개를 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그의 눈에 불상 하나가 들어왔다. 그 불상은 다른 불상과 달랐다. 후광이 어려 있지도 않고 연좌 위에 서 있지도 않았다.
오만상을 찡그리고 있는 모습이 인간과 흡사했다. 아울러 조각한 방식도 불상과 달랐다.
‘사람이네.’
그는 그곳으로 가기 위해 오른발을 내디뎠다.
“앗!”
바로 그때 짤막한 비명이 들려왔다. 이상한 느낌에 고개를 돌렸던 사미염이 내지른 비명이었다.
‘이런!’
그제야 금장생은 상황을 파악했다.
사미염은 아직 볼일이 끝난 게 아니었다.
“계속 볼일 보세요.”
금장생은 한달음에 사미염을 지나쳐 갔다.
“내가 미쳐.”
사미염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사실 그녀는 좀 더 멀리 갈 수도 있었다.
그런데 절벽 가까이 다가가자 바로 앞에 있는 수백 불상들이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었다. 아무리 불상이고 조각상이라고 하지만 대부분이 사내다. 사내 수천 명이 지켜보는 데서 은밀한 곳을 내보이며 볼일을 볼 수가 없었다.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금장생은 집중하고 있는 상태라 작은 볼일보다 더한 걸 한다고 해도 문제가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금장생이 이편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차라리 나가서 싸고 올걸.’
그녀는 울상을 지었다. 상황이 이런데도 볼일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억겁 같은 시간이 지났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옷을 입었다.
“이거 좀 보십시오.”
그때 금장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뭔데요?”
그녀는 금장생 옆으로 갔다. 금장생 앞에는 불상 하나가 부서져 있었다.
“석판입니다.”
금장생은 부서진 불상 사이에서 석판 한 장을 들어 올렸다.
“일월 대사가 남긴 건가 보죠?”
“아닙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누가…….”
“천리신투라는 도둑이 남긴 겁니다.”
“천리신투 오구는 구백 년 전 사람인데요. 도둑계의 전설이라고 불려요.”
“천리신행이라는 신법과 지도를 남겼네요.”
금장생은 천리신행을 읽었다.
전설의 신투답게 천리신행은 대단했다. 더 놀라운 건 신법 속에 은신술도 포함돼 있다는 사실이었다.
“지도라는 건 무슨 말이죠?”
사미염이 물었다.
“마종총魔宗塚이란 무덤으로 들어가는 지돕니다.”
“마종총이라고요?”
사미염은 고개를 갸웃했다. 마종총은 처음 듣는 말이었다.
“그럼 혁지광이 누군지는 아세요?”
“혁지…… 저, 정말 혁지광의 무덤이라고 돼 있어요?”
사미염의 눈이 화들짝 커졌다.
“아주 작게 써 있네요.”
“정말 혁지광이 누군지 모르세요?”
“제가 아는 무인 중에 혁지광이란 이름으로 활동한 사람은 천마밖에 없는데, 그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오구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는데 그게 뭔지 아세요?”
“어떤 건데요?”
“‘내가 아직 들어가 보지 못한 곳은 천마와 잠마, 수라의 무덤뿐이다. 가장 먼저 나는 천마의 무덤을 찾아 들어갈 것이다.’라고 했어요.”
사미염은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까 사 비주 말은, 이 지도가 천마의 무덤 위치를 나타내는 장보도라는 거죠?”
“네. 그런데 어디죠?”
“장소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금장생은 지도를 사미염에게 내밀었다. 그는 천마의 무덤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사미염은 지도를 살폈다.
금장생의 말처럼 복잡한 선만 그려져 있을 뿐 어디를 그린 지도인지에 대해서는 나와 있지 않았다.
“사막에서 바늘 찾기네요.”
사미염은 어깨를 으쓱했다.
“가지세요.”
금장생은 석판을 내밀었다.
“이, 이걸 절 준다는 거예요?”
사미염은 놀란 얼굴로 물었다.
“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석판이 천마총으로 들어가는 장보도일지도 모르는데도 제게 준다는 거예요?”
“그래서 준다는 겁니다.”
“네?”
“천마가 엄청난 부자였다면 비주가 내 목에 칼을 들이대도 절대 주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내가 아는 천마는 따르는 자들이 많기는 했지만 재산을 축적한 사람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따르는 자들을 거둬 먹이느라 빚까지 져야 했죠. 그런 자의 무덤에 보물이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하지만 이걸 팔면 천문학적인 돈이 생길 수도 있잖아요.”
“그 대신 죽음을 각오해야 하죠.”
“죽음이라면…….”
“그 석판의 최초 소유자가 나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무인들이 가만있을 리가 없잖아요. 석판의 주인은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살인멸구를 하려 들 테고, 다른 자들은 내 머릿속에 들어 있는 지도를 꺼내 가려고 날 잡으려 하겠지요. 그럼 난 평생을 도망 다녀야 합니다. 물론 천마의 무덤이 발견되면 더 이상 쫓기는 일은 없겠지만요.”
“호시탐탐 목숨을 노리는 자들에게 둘러싸여 사는 것보다 포기하는 게 더 낫다는 거네요?”
“그게 아니라도 돈을 벌 기회는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런데 고마워서 어쩌죠?”
사미염은 석판을 받으며 말했다.
“석판에 대한 보상은 충분히 받았습니다.”
“무슨 보상을 받았다는 거죠?”
“세상에서 가장 멋진 엉덩이를 두 번이나 봤잖습니까?”
“봐, 봤다고요?”
사미염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절대 고의가 아니었습니다. 우연히 시선을 돌렸는데 거기에 커다란 달덩이가 있었을 뿐입니다. 얼른 고개를 돌리긴 했는데 워낙 예뻐서 인장처럼 머릿속에 찍혀 버리고 말았습니다.”
“흥! 색마.”
사미염은 금장생을 흘겨보았다.
“자, 그만 갈까요.”
금장생은 손바닥을 비비며 말했다.
“일원은 익혔어요?”
“아뇨.”
“그럼 다른 무공을 익혔나 보죠?”
“사 비주는 다른 무공을 익혔어요?”
금장생은 사미염을 돌아보며 물었다.
“네.”
“어떤 무공인데요?”
“장공掌功이에요.”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른 무공을 익히게 돼 있나 보네요.”
“마왕은 정말로 아무것도 익히지 못한 거예요?”
“뭔가 오는 것처럼 하다가 다시 가 버렸습니다.”
“안됐네요. 제가 익힌 거라도 가르쳐 드려요?”
“아닙니다. 다 암기했으니까 제게도 언젠가는 깨달음이 찾아올 겁니다.”
“그날이 빨리 오길 바랄게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사미염은 일월 대사가 기거했던 동굴로 뛰어들어 갔다. 그리고 복면으로 싼 야명주를 가지고 나왔다.
“이걸 두고 갈 뻔했어요.”
사미염은 야명주를 금장생에게 내밀었다.
“고맙습니다.”
금장생은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리고 들어갔던 동굴을 통해 되돌아 나왔다.
동굴 출구에 당도하자 사미염은 은신술을 펼쳐 몸을 감췄다.
금장생은 밖으로 나갔다.
사인루 자객들은 쉬면서 금장생을 기다리고 있었다.
“식사는 했나요?”
금장생은 류와 오다아이를 보며 물었다.
“네.”
“먹었어요.”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바로 떠나도록 하지요.”
금장생은 먼저 마나부를 보았다.
“저희가 먼저 떠나겠습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나부는 금장생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감사합니다.”
다른 이들 또한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은혜를 갚고 싶거든 내 친구가 성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주십시오.”
“걱정 마십시오. 그분은 주루 업종에서만큼은 중원 최고가 되실 겁니다.”
마나부가 자신 있는 얼굴로 말했다.
“빈말이라고 해도 즐겁네요. 수고하세요.”
금장생은 헤벌쭉 웃었다.
“수고하십시오.”
마나부 일행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고 사인루를 떠났다. 그동안 정이 들었던 듯, 떠나면서도 흘끔흘끔 돌아보았다.
그들이 떠나고 반 시진 후 오다아이와 류도 나머지 일행을 데리고 사인루를 떠났다.
모두가 떠나고 나자 사인루는 적막감에 휩싸였다.
“이제 다 해결됐네요.”
금장생은 가볍게 박수를 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간밤에 한숨도 자지 못한 잠을 보충할 생각이었다.
“뭐 좀 먹을래요?”
안으로 들어서자 사미염이 물었다.
“먹을 게 있나 모르겠네요.”
“오다아이 소저가 음식 있는 곳을 가르쳐 줬어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사미염은 주방으로 갔다. 잠시 후 음식이 올려진 쟁반을 가지고 왔다.
쟁반을 탁자에 내려놓자 금장생은 의자에 앉았다. 닭 육수에 면을 집어넣고 고명을 얹은 동영식 국수와 소고기 채소볶음과 속을 넣지 않은 만두였다.
밤새 아무것도 먹지 않은 탓인 듯 두 사람은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웠다. 음식은 금세 사라졌다.
“더 드려요?”
사미염이 물었다.
“있어요?”
“없어요.”
“……?”
“더 드신다면 제가 하려고요.”
“이 정도면 됐어요.”
금장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위로 올라갔다.
“바로 갈 건가요?”
“한숨 자고 가죠 뭐.”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중이었어요.”
사미염은 싱긋 웃으며 쟁반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금장생은 욕실로 들어가 목욕을 했다. 그러고는 삼 층 침실로 들어갔다.
그가 들어간 곳은 사토의 침실이었다. 침대에 있던 이불을 걷어 내고 새 이불과 요를 깔았다. 그런 다음 상의와 하의를 벗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아이고, 좋다.”
금장생은 활짝 웃었다.
그에게 돈 다음으로 좋은 게 있다면 잠을 자러 침대로 들어가는 이 시간이다.
“바로 옆에 금자와 은자가 쌓여 있는 진열장이 있으면…… 맞아, 그게 있었지.”
금장생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사미염이 준 야명주를 탁자 위에 놓았다. 너무 단단하게 싸서 겉으로는 야명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복면 한편을 살짝 열어 야명주가 조금만 보이게 했다.
야명주가 흘리는 빛은 잠을 자는 데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밝기였다.
“보석이 내뿜는 광채보다…….”
금장생은 만족스럽게 웃고는 침대로 들어갔다.
“더 좋은 자장가는 없지.”
금장생은 야명주가 뿜어내는 광채를 황홀한 듯 바라보았다.
그때 문이 열리고 사미염이 들어왔다.
그녀가 여기로 들어온 건 이 건물에 침실이 이곳뿐이기 때문이었다.
다른 건물로 가면 침대가 있긴 하겠지만 아무도 없는 건물에서 혼자 자기는 싫었다. 그래서 별수 없이 금장생이 자는 방으로 들어왔다.
방금 목욕을 한 듯 그녀의 몸에서는 장미 향이 풍겼다. 옷은 야행복 그대로였다.
“뭐 해요?”
그녀는 손으로 머리를 털며 물었다.
“여기서 잘 건가요?”
“침대가 좁아요?”
금장생의 물음에 사미염은 되물었다.
“다섯 사람이 잘 정도로 넓습니다.”
“그럼 내가 옆에서 자는 게 싫은 거군요.”
“사 비주가 싫은 게 아니라,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을 방해받는 게 싫어서 그런 겁니다.”
“마왕이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라고요?”
사미염은 금장생과 방 안을 휘 살폈다.
금장생은 그녀를 향해 모로 누웠고, 그 앞 탁자에는 동굴에서 떼어 온 야명주가 놓여 있다.
약간 풀어진 복면 사이로 야명주 빛이 새어 나와 방 안을 희미하게 밝히고 있다. 그 야명주 불빛을 금장생은 꿈꾸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풋!”
사미염은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되었다.
그가 야명주를 갖고 싶다고 했던 까닭은 밤중에 책을 보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에게 야명주는 밤을 밝히는 등불이 아니라 보석이었던 것이다.
보석이 뿜어내는 광채를 바라보며 잠들 수 있는 지금 이 시간이 그에게 가장 좋을 수밖에 없다.
‘아무리 그래도, 여자가 함께 자겠다고 들어왔는데…….’
갑자기 자존심이 상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상대 여자를 보며 침이라도 삼켜 주는 게 최소한의 예의다. 설사 침을 바가지로 삼킨다고 해도 그녀는 절대 금장생을 색마라고 욕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
그런데 금장생은 침을 삼키기는커녕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가 홀린 듯 쳐다보는 건 야명주가 뿜어내는 광채뿐이었다.
‘이래도 날 안 보는지 보자.’
사미염은 오기가 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