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가-152화 (152/524)

황금가 (152)

이 판은 무효

“왜 그래요?”

금장생이 갑자기 소리치자 사미염이 물었다.

“혹시 절대삼마라고 아세요?”

금장생은 되물었다.

“당연히 알죠.”

“설명해 주십시오.”

몰라서 묻는 게 아니었다. 무인들처럼 자세하게는 아니지만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세 사람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

다만 사미염이 좀 더 정확하게 알고 있을 것 같았다.

“천마天魔, 잠마, 수라修羅 세 사람을 말하는 거예요. 천마와 잠마는 동시대 사람이고 잠마는 이십 년인가 늦게 활동했다고 알고 있어요.”

“그렇군요. 그럼 지금부터 제가 이걸 읽어 줄게요.”

금장생은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곧 그가 읽지 않은 부분까지 왔다.

잠마.

중원으로 들어와서 귀가 따갑도록 들은, 한 절대자의 별호였다.

천상천하유아독존, 명실공히 천하제일인, 사의 황제 등 잠마는 나열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수식어가 따라다닌 절대자다.

그 많은 수식어 중 가장 충격적인 건 ‘천마를 지옥으로 처박은 자’라는 소문이었다.

천마는 중원 무인들에게 있어 전설이었다.

마의 조종, 마공의 창시자, 고금제일인. 그런 칭호들이 결코 아깝지 않은 절대 초인이라고 무인들은 생각했다. 그런 그를 지옥으로 처박았다고 하니 믿기지 않는 건 당연했다.

무림인들은 천마가 나타나 그 소문을 부정해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천마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하였다.

아무튼 그는, 수라와 함께 절대삼마라고 불리고 있는 잠마를 언급한 것이었다.

―당신이 잠마와 무슨 상관입니까?

나는 물었다.

―잠마 헌원소야가 바로 나네.

―지, 지금 헌원소야라고 하였습니까?

잠마라는 말보다 헌원소야라는 이름에 나는 더 놀랐다. 헌원소야는 바로 내 이름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그 이름은?

―맞네. 자네 이름이네. 내가 지금은 많이 똑똑해졌지만 어린 시절에는 명석하지 못했다네. 하나를 가르쳐 주면 열을 헤아리는 자네처럼 좋은 머리를 지녔다면 나는 우리 신족을 멸망으로 이끌지 않았을 거네. 그래서 자네처럼 똑똑한 사람이 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헌원소야로 바꿨다네.

―신족이라는 건 무슨 소립니까?

―내가 이 세상이 아니라 다른 세상 사람이라면 믿겠는가?

―설마…….

―설마가 아니고 사실이라네. 신마전쟁에서 패한 우리 신족은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다네. 그래서 우리 신족 편에 섰던 인간과 유사인간, 그리고 동족들로부터 배신자로 낙인찍힌 마족들과 함께 새로운 세상을 찾아 나섰네. 그래서 중원으로 오게 됐네. 처음엔 좋았네. 노예로 부려 먹던 중원인들이 반란을 일으키기 전까진 말이네. 결국 우린 반란을 일으킨 노예들에게 패했네. 많은 이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하였지만 나는 갈 수가 없었네. 왜냐면 내 고향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네. 그래서 남은 생 또한 이곳에서 보낼 수밖에 없었다네.

―당신의 세상을 만들고 싶은 겁니까?

―나는 원래 신이 돼야 하는 운명이었다네.

―신이 되고 싶은 거군요.

―그렇다네.

―부처님께서 저를 중원으로 보낸 이유를 비로소 알겠습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소승은 이곳 중원에 불교를 전파하라는 엄명을 받고 왔습니다.

더 이상 대화가 필요 없었다. 우리 둘은 숙명의 적처럼 싸움을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숙명이라 생각했던 건 핑계에 불과했다. 나는 사십 년 전 그에게 패했던 걸 돌려주고 싶었고, 그는 자신이 더 뛰어나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 했다.

며칠을 싸웠는지 모른다. 아미 내 기억에 의하면 십 주야는 족히 된 것 같았다.

그는 역시 천하제일인이었다. 결국 나는 그가 마지막 쏟아 낸 성천사력聖天邪力을 막아 내지 못했다.

하지만 나만 손해를 본 것은 아니었다. 그 역시 내가 쏟아 낸 천불성력天佛聖力에 큰 타격을 입었다.

나는 한편으로 너부러졌다. 모든 걸 쏟아 낸 상태라 일어설 힘조차 없었다.

죽음을 기다리며 궁금한 걸 물었다.

첫 번째 질문은 정말 천마를 죽였느냐 하는 거였다. 내 질문에 그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두 번째는 늙지 않는 얼굴은 어떻게 된 거냐는 질문을 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자넨 사십 대 중반과 후반의 얼굴이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다른가?

그 말의 의미를 몰라 무슨 뜻이냐고 다시 물었다. 그러자 충격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내가 태어난 해는 지금부터 삼천 년 전이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자리를 떠났다.

나는 떠나는 그를 향해 왜 죽이지 않느냐고 물었다.

―앞으로도 자네 이름을 계속 사용하는 대가라고 생각하게.

그가 떠나고 나서 나는 여기로 왔다. 그를 막을 방법을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완전하지 않은 몸으로 뭔가를 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서 새기기 시작한 게 불상이다.

처음엔 정과 망치로 새겼다. 백여 개를 새기고 났을 때 몸이 조금씩 나아가는 걸 느꼈다. 그래서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천 개의 불상을 완성했을 때 나는 절반가량 회복했다. 더하여 더 이상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런 몸으로 잠마를 다시 찾아간다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서 이곳을 내 무덤 자리로 정하고 불상 조각에 매진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의 무공을 완성했다. 그건 바로 일원一圓이다. 아니, 일원一原이라 해도 좋고 일심一心이라고 해도, 일념一念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이 일원으로 그를 없앨 수 있다고 장담하지도 못한다. 하지만 일원은 나의 최선이다.

만불상 중앙에서 모든 선을 하나로 이어라. 그럼 일원을 얻게 될 것이다.

연자여!

녹옥불장에 내가 가진 천불성력을 전부 남겼다. 그대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그대는 수백 년 동안 참선한 불제자보다 더한 불력을 갖게 되었다.

부디 좋은 곳에 쓰기 바란다.

일월 대사의 마지막 말은 사미염에게 읽어 주지 않았다.

“이 석판에 나와 있는 내용, 믿겨요?”

금장생은 석판을 가루로 만들며 물었다.

“수천 년을 사는 인간에 대한 걸 말하는 건가요?”

사미염은 되물었다.

“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어때요?”

사미염은 질문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내게 질문을 한다는 건 판단을 내릴 수 없다는 뜻인가요?”

“판단을 내릴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사실인 것 같은데 쉽게 받아들여지지가 않는다는 뜻이에요.”

“맞을 겁니다.”

“맞다고요?”

“네.”

“근거가 있나요?”

“유언보다 더 확실한 근거가 있을까요?”

“유언을 거짓말로 남길 이유가 없다는 거군요.”

“더구나 일월 대사는 불제자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되는 거죠?”

“뭐가 말입니까?”

“잠마 헌원소야를 말하는 거예요.”

사미염은 헌원소야라는 대목에 힘을 주었다.

즉 그녀의 말의 의미는, 수천 년을 산다면 화왕 헌원소야가 잠마일 가능성이 높지 않겠느냐는 뜻이었다.

“일월 대사가 남긴 글에는 수천 년 전에 태어났다고 했지 앞으로도 수천 년을 살 거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죽었을 수도 있다는 거군요.”

“네.”

“너무 확신하는 거 아닌가요?”

“저는 확신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요?”

“잠마가 아직 살아 있다면 그것처럼 끔찍한 건 없을 테니까요.”

금장생은 부르르 떠는 시늉을 하며 동굴을 나갔다. 일월 대사가 말한 일원을 찾기 위해서였다.

금장생은 분지 중앙으로 갔다. 그곳에는 두어 사람이 앉을 수 있을 정도 크기의 평편한 돌이 있었다.

금장생은 그 돌 위에 가부좌를 했다. 그러고는 불상을 바라보았다.

만불상의 절반 정도가 시야에 들어왔다.

처음엔 뭔가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가 찾기를 포기한 건 두 시진 후였다. 노력한다고 해서 찾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는 모든 걸 내려놓았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불상들을 바라보았다.

“웃는 불상도 있네.”

금장생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어렸다.

번뇌에 시달리는 불상만 있는 게 아니었다. 활짝 웃고 있는 불상도 있었다. 그런데 그 불상들은 웃고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양팔과 두 다리의 위치도 달랐다. 어떤 불상은 오른손을 단전에 대고 왼손은 머리 위로 올렸고, 왼 다리를 들었다. 어떤 불상은 기마 자세를 한 채 왼팔과 오른발을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금장생은 자신도 모르게 웃고 있는 불상을 찾았다.

웃고 있는 불상은 모든 곳에 다 있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일월 대사가 말한 무공은 나타나지 않았다.

“음!”

금장생은 나직한 신음과 함께 자세를 풀었다.

그는 눈을 비볐다. 문득 옆이 너무 조용해 옆을 돌아보았다.

사미염이 가부좌를 한 채 전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걸 보면 뭔가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금장생의 예상대로였다.

사미염은 불상의 홍수 속에서 빛을 찾았다.

그녀가 찾아낸 빛은 장법이었다. 손동작이 특이한 불상 수백 개를 계속해서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삼매경으로 빠져든 것이다.

그녀를 바라보던 금장생은 다시 불상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도 역시 웃는 불상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는 다시 불상을 차례로 훑었다.

이번에는 얼굴만 보았다.

‘세 가지야.’

불상의 얼굴을 보다가 깨달은 점이었다.

세 가지라는 건 불상의 표정이었다. 웃는 표정, 슬픈 표정, 화난 표정이었다.

‘저건?’

금장생의 눈에 광채가 어렸다.

그는 다시 불상에 집중했다.

‘바로 그거야.’

그는 벌떡 일어났다.

일월 대사는 불상으로 바로 희로애락喜怒哀樂으로 대변되는 인간의 삶을 표현한 것이었다.

금장생은 다시 희喜에 해당하는 불상을 찾았다.

희로애락에서 희와 락은 비슷하지만 손과 발의 위치가 다르다. 희는 웃는 모습으로 기쁨을 표현하지만 락은 웃음과 춤이 함께 어우러진다.

금장생은 먼저 웃고 있는 불상만 보았다.

어디가 시작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웃고 있는 불상의 발과 팔 동작을 따라 했다.

처음엔 느렸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빨라졌다.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동작이 익숙해지자 이번엔 분노한 표정을 짓고 있는 불상의 동작을 따라 했다. 그 동작이 익숙해지자 이번엔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불상의 동작을 따라 했다.

놀랍게도 이천오백 개에 달하는 불상의 동작이 조금씩 다 달랐다.

금장생은 그것들을 차곡차곡 머릿속에 저장했다.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춤사위와 비슷한 동작을 하고 있는 불상을 따라 했다.

몸 내부에서 뭔가가 일어나는 듯한 느낌을 받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억!’

금장생은 질겁했다.

멀리 떨어진 산속 오두막에서 깜빡거리는 불빛 같았다. 그랬던 불빛이 순식간에 거대한 해일로 변해 온몸을 강타했다.

대비할 틈도 없었다.

금장생의 동작이 우뚝 멈췄다. 그러자 통제하기 힘들 정도로 강하게 몰아치던 기운이 거짓말처럼 스러졌다.

금장생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끔찍할 정도로 엄청난 기운이었다.

만일 그 기운이 완벽하게 일어났다면 온몸이 가루로 변해 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넘어야 할 산이다.

금장생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도 금장생은 실망하지 않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일만 개에 달하는 동작을 모두 따라 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연속 동작을 분할한 조각이 많아 실제로 일만 동작이 되진 않는다. 그렇다고 해도 동작의 수는 그 어떤 무공보다 많았다.

금장생은 쉬지 않고 동작을 반복했다. 동작에 집중하고 있는 그는 바로 옆에서 사미염이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사미염이 삼매경에서 빠져나온 건 두 시진 전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찾아낸 장법을 정리하며 금장생이 마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금장생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새 밤이 찾아왔다.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여 불상이 전혀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금장생은 팔다리를 휘두르며 뭔가를 했다.

‘화장실도 안 가나.’

그녀는 금장생을 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이곳으로 온 지 일곱 시진이나 지났다. 그런데도 금장생은 자리를 뜨지 않고 있다.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집중력이 아닐 수 없었다.

‘공연히 화장실 소리는 해 가지고.’

사미염은 얼굴을 찌푸리며 자리를 떴다. 문득 화장실을 떠올리자 갑자기 급해졌다.

동굴 아래쪽으로 가서 쪼그리고 앉았다.

차마 금장생 쪽을 보며 볼일을 볼 수가 없어 등을 졌다.

엉덩이가 고스란히 드러나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금장생을 흘끔 바라보고는 볼일을 봤다.

그 와중에도 금장생은 계속 불상을 바라보며 동작을 따라 했다.

‘온다!’

어느 순간 저 깊은 곳에서 일렁이는 작은 불꽃이 보였다. 그곳이 몸속인지 아니면 다른 곳인지 알 수는 없었다.

‘드디어!’

금장생의 얼굴에 기대감이 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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