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가-151화 (151/524)

황금가 (151)

그녀가 사부의 조카라는 사실 때문에 혈왕이라는 걸 깜빡 잊었다.

팔왕가는 서로 견제를 하고 있고, 혈왕 정도 되면 마왕의 행적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게 분명하다. 그런 사람에게 칠 년 전 동영에서 죽은 사부 이야기를 했으니 가짜라는 사실이 탄로 날 수밖에 없다.

―내가 당신이 가짜라는 걸 알아차린 건, 당신이 숙부의 임종을 지켰다는 그 칠 년 전에 팔왕이 모종의 일로 회합을 가졌기 때문이에요. 그 회합에는 마왕도 참여했어요. 그랬던 사람이 동영에서 숙부를 만나 뇌섬류를 배웠다는 건 말이 되지 않잖아요. 그리고 당신이 가짜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해도 말할 사람이 없어요. 누군가에게 말해서 이익을 볼 것도 없고요. 그러니까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돼요.

금장생의 몸에서 진득한 살기가 흘러나오는데도 오다아이는 태연했다.

―믿어도 되나요?

금장생은 물었다.

―나는 중원은 물론이고 동영에도 의탁할 곳이 없어요.

―믿겠습니다.

금장생은 기운을 풀었다.

―그럼 당신은 조금 전 도죠 아저씨에게 말한 장생이란 친구이겠군요.

―맞습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류 아저씨가 당신이 발도뇌섬류를 펼쳤다고 하던데…….

―최근에 완성했습니다.

―몇 회까지 가능하죠?

―모릅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다시 조각에 집중했다.

그는 더 이상 오다아이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다.

오다아이는 다른 사람도 아닌 혈왕이다. 죽일 이유도 없지만, 도망치려고 한다면 잡을 수 없을 테니까.

인장 하나를 조각하는 데 반 시진 정도가 걸렸다.

조각을 끝낸 후 표면을 보았다. 복잡한 선만 있을 뿐 글자처럼 보이지 않았다.

“인주가…….”

인주를 찾으면서 창밖을 보았다. 오다아이는 자리를 떴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인주를 찾아와 종이에 찍었다.

그러자 네 개의 글자가 나타났다.

갑골문자로 새긴 그것은 ‘황금장생’이었다. 인주로 찍었을 때만 나타나는 글이었다.

글자를 확인한 다음 종이를 뒤집었다.

“좋네.”

만족스러운 듯 그의 표정이 풀어졌다.

글자는 앞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뒤편에도 글자가 나타났는데 그것은 ‘황금전가’였다.

찍었을 때 앞과 뒤가 전혀 다른 글자가 나오는 기술을 역서易書라고 하는데, 조선의 기술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어떤 물건을 만들어 내는 손기술은 조선이 최고였다.

“이런 인장은 절대 모사가 불가능하지.”

금장생은 남은 촛대로 꼭 같은 인장을 하나 더 만들었다. 그런 다음 손으로 쥐는 부분을 조각했다.

이번에 조각한 건 두꺼비 모양이었다.

“여기에 금박을 입히면 금두꺼비가 되겠네.”

금장생은 빙긋 웃었다.

그는 인장을 챙겨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비급을 베껴 쓰고 있는 사람은 류와 마나부, 오다아이 세 사람이었다.

금장생은 한편에 앉아 기다렸다.

잠시 후 류가 먼저 허리를 폈다. 이어 마나부와 오다아이가 붓을 내려놓았다.

“끝났습니까?”

금장생은 물었다.

“네.”

“이거 받으세요.”

금장생은 인장 하나를 류에게 내밀었다.

“이건 뭡니까?”

류가 물었다.

“돈은 중원전장에 맡길 겁니다. 찾을 때 이걸 찍어 주면 될 겁니다.”

“알겠습니다.”

“이곳 어딘가에 만불상이 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고 하던데, 사실입니까?”

문득 생각나 물었다.

“저 절벽 중간에 보면 동굴이 하나 있습니다. 그 동굴을 지나면 여기와 비슷한 분지가 나타나는데 그곳에 만불상이 있습니다.”

“나는 거기 좀 다녀오겠습니다.”

류 일행에게 정리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

“알겠습니다.”

류는 고개를 숙였다.

금장생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일 층으로 가자 앉아 있던 자객들이 일어났다.

“쉬세요.”

금장생은 손을 들어 다시 앉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자객들은 어정쩡한 자세로 계속 서 있었다.

밖도 마찬가지였다. 금장생은 자객들 사이를 빠르게 지나갔다.

잠시 후 그는 절벽 앞에 당도했다.

“지금부터 시체를 묻는다!”

멀리서 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휙!

금장생은 바닥을 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동굴 입구에 도착했다.

여느 동굴이나 다름없는 평범한 동굴이었다.

그는 동굴을 따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동굴의 길이는 십 장 정도였다.

“와아!”

금장생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만불상이 있다는 전설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동굴 출구 밖은 절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분지였다. 그 분지 모든 절벽에 불상이 조각돼 있었다. 크기도 다양하고 자세도 모두 달랐다.

“어떻게…….”

금장생은 동굴을 나가 절벽 가장자리를 따라 걸었다.

불상은 정교했다. 옷 구김은 물론이고 얼굴 표정까지 모두 새겨져 있었다. 더욱 놀라운 건 모든 불상의 표정이 다르다는 사실이었다.

“백팔번뇌를 벗어나지 못한 부처님이란 건가. 아니면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일만 개의 번뇌를 다스려야 한다는 건가?”

금장생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누가 어떤 목적으로 불상을 새겼는지 모르지만 엄청난 작품임에 분명했다.

“아!”

뒤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금장생은 고개를 돌렸다. 복면을 벗은 사미염이 놀란 눈으로 절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간의 힘이란 대단하죠?”

금장생은 말했다.

“네.”

사미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는 존재인 것 같아요.”

“그 말엔 나도 동의해요.”

“여기네요.”

금장생은 걸음을 멈췄다.

“여기요? 아!”

사미염은 탄성을 내뱉었다.

두 불상 사이에 동굴처럼 보이는 공간이 있었다. 금장생은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거요.”

사미염은 자신의 복면으로 싼 물체를 금장생 앞으로 내밀었다.

“뭐죠?”

“마왕이 원했던 거요.”

“내가 원했던 건…….”

금장생은 복면을 펼쳤다.

“아!”

그의 얼굴에 활짝 미소가 어렸다. 복면으로 싼 건 야명주였다.

야명주의 광채가 주변을 환하게 밝혔다.

금장생은 야명주를 들고 동굴로 들어갔다.

동굴은 원형 형태였는데 폭이 일 장 반 정도 되었다. 높이는 일 장가량이었다.

“저 사람인가 봐요.”

사미염은 오른편을 가리켰다.

그녀가 가리킨 곳에는 백골 한 구가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오래전 사람인가 보네요.”

금장생은 백골 옆으로 갔다. 살이 썩어 없어질 정도면 몇백 년은 족히 흘렀을 게 분명하다.

금장생은 백골 주위를 살폈다.

백골의 오른편에는 녹색의 불장이 놓여 있었다. 불장 표면에는 뭔가가 새겨져 있는 것 같은데 먼지가 많이 끼어 잘 보이지 않았다.

금장생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그가 녹색의 불장을 먼저 집은 건 돈을 우선시하는 본능 때문이었다. 값이 나가게 보이는 불장은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거 돈 좀…….”

지잉!

입으로 바람을 불어 먼지를 털어 내려는 순간 그러쥔 불장을 통해 뭔가가 몸 안으로 들어왔다.

“앗!”

금장생은 불장을 떨치기 위해 손을 폈다.

하지만 손바닥에 붙어 버린 것처럼 불장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사이에도 알 수 없는 기운은 금장생의 몸 안으로 유입되었다.

잠시 후 불장이 힘을 잃고 떨어졌다.

불장이 떨어진 곳은 백골 위였다.

퍼억!

백골과 불장은 동시에 가루로 흩어졌다.

“이런!”

금장생은 안타까운 얼굴로 바닥을 보았다.

자신의 실수로 유골이 가루로 변한 것 같아 공연히 미안했다.

“아미타불!”

그는 합장을 했다.

고개를 숙인 그의 눈에 석판 하나가 들어왔다. 글이 새겨져 있는 석판이었다.

금장생은 석판을 잡고 벽에 기대앉았다. 야명주를 앞에 놓고 석판을 읽었다.

나 일월이 남긴다.

내 본명은 헌원소야다. 내가 굳이 속세의 이름을 밝힌 건 지금부터 한 사람에 대해 말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어?”

금장생은 깜짝 놀랐다.

세 번째 듣는 이름이다.

각기 시대가 다르고 이 사람과도 같은 시대를 산 것 같지가 않지만, 계속해서 같은 이름을 듣자 기분이 이상했다.

더불어 속세의 이름이라 했다는 건 출가한 사람이란 뜻이었다.

“왜 그래요?”

사미염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헌원소야라는 이름을 전에 들어 본 적이 있어서 그래요.”

“헌원소야요?”

“네.”

“헌원소야는 화왕의 이름인데요?”

“그래요?”

금장생은 깜짝 놀랐다.

현재의 헌원소야와 세 명의 헌원소야가 다른 사람임이 분명한데도 이상하게 같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는 재빨리 귀안을 끌어 올렸다. 혹시 헌원소야라는 사람의 귀신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주변에 귀신은 없었다.

“몰랐어요?”

사미염은 되물었다.

“팔왕가의 왕에 대해서는 아는 게 전혀 없습니다.”

“수수가 가르쳐 주지 않았어요?”

“네.”

“미친것! 잠만 자지 말고 그런 거나 말해 줄 것이지는.”

사미염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뭐라고요?”

“아, 아니에요. 그런데 이 사람의 이름이 헌원소야예요?”

“법명은 일월이고 속명이 헌원소야라고 하네요.”

“지금 일월 대사라고 했어요?”

사미염의 눈이 커졌다.

“어떤 사람인지 아세요?”

“중원 불교의 시조라고 불리는 분이에요. 천이백 년 전 사람이고요.”

“천이백 년 전이면 불교가 들어오기 전 아닌가요?”

금장생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고대사를 많이 안다고 자부한다. 물론 불교를 체계적으로 공부하지 않아 정확한 건 모르지만, 그가 아는 한 불교 전래는 사미염이 말한 것보다 훨씬 후였다.

“북위 시대를 말하는 거예요?”

“네.”

“그건 황실로부터 인정을 받은 때를 말하는 거고, 민간에는 공식적인 것보다 훨씬 이전에 들어와 있었다고 해요.”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런데 일월 대사는 불교를 들여왔을 뿐 아니라 최강의 절대자이기도 했다는 전설이 함께 내려오고 있어요.”

“무인이었단 말이군요?”

“네.”

“그래서…….”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최강의 절대자였는지 그것까지는 알 수 없지만 일월 대사가 무인이었다는 건 사실인 것 같았다.

동굴 밖에서 본 불상들을 만든 도구는 석공이 사용하는 정과 망치가 아니라 날카로운 물건, 즉 검이나 도였다. 그것들을 이용해서 조각을 하려면 무공이 절대자의 경지에 오른 상태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금장생은 다시 석판으로 시선을 주었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건 십 대 후반, 천축에서였다.

그때 나는 아직 출가 전이었다. 한창 불경에 심취하여 천축 최대 사찰인 태화사 장경각에서 살았다. 그때 그곳으로 찾아온 이방인이 있었다.

그는 이름도 알려 주지 않았다.

아니, 이름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는 장경각 안에 있는 경전을 모두 다 읽은 내가 감탄할 정도로 폭넓은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건 그가 무공의 절대자였다는 사실이다.

나는 무공을 익히진 않았지만 많은 무공 이론을 두루 섭렵한 상태였다. 경전 토론으로 끝을 본 우리는 무공 이론에 대한 토론을 시작했다.

무공에 대해서는 그가 나보다 더 해박했다. 하지만 나는 그가 나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다.

나는 그 어렵다는 경전도 한 번 보면 완벽하게 암기하고 이해하는 천재적인 머리의 소유자였다. 며칠만 더 시간을 주면 그가 익힌 무공보다 더 강한 무공을 창안해 낼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끝내 그의 무공을 깨트리지 못했다.

태화사에서 이 년을 머문 그는 중원으로 간다며 길을 떠났다.

천축 말고도 중원이란 커다란 세상이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그래서 무공을 익히며 그가 간다고 하였던 중원을 꿈꿨다.

하지만 좀처럼 중원에 갈 기회가 생기지 않았다.

그렇게 사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세월 동안 나는 태화사를 떠나지 않았다.

그랬던 나에게 기회가 왔다. 중원으로 가서 사찰을 설립하라는 주지 스님의 명이 떨어진 것이다.

훌륭한 스님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간 건 중원으로 가는 길이 너무 험하여 무공을 완성한 나 말고는 갈 사람이 없었던 탓이다.

그때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이 바로 나와 토론을 했던 남자였다. 하지만 그가 살아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나와 토론을 벌였던 그 사내는 사십 대 중반이었다. 그로부터 사십 년이 흘렀으니까 팔십 중반의 나이다. 무인의 수명이 양민보다 더 길다고 하지만 살아 있다고 장담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랬는데 그를 이곳에서 다시 만났다.

그를 본 첫 느낌은 반가움이 아니라 두려움이었다.

사십 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그의 얼굴은 처음 만났을 때 그대로였다. 사십 년의 세월이 그를 비껴간 것이다.

주안과를 복용해도 세월이 흐르면 주름이 늘어나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의 얼굴은 눈곱만큼도 변한 게 없었다.

게다가 그의 내부에는 숨 쉬기조차 힘든 가공할 마기가 꿈틀대고 있었다.

나는 도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혹시 잠마潛魔를 아느냐고 되물었다.

“절대삼마!”

금장생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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