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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가-146화 (146/524)

황금가 (146)

높이가 이십 장에 달했지만 허공답보를 펼치는 금장생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런 대비도 없이 아래로 몸을 날린 사미염에게 위기가 닥쳤다. 그녀는 아직 허공답보 신법을 펼치는 수준에 이르지 못한 상태였다.

바닥이 보이자 사미염은 힘껏 장력을 발출했다. 반탄력으로 인해 내상을 입을 수도 있지만 떨어지는 속도를 늦추는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휙!

바로 그때 아래쪽에서 검은 물체가 솟구쳤다.

검은 물체는 올라오는 속도를 이용해 사미염의 허리를 안아 떨어지는 속도를 늦췄다.

그는 금장생이었다.

잠시 후 금장생과 사미염은 바닥으로 내려섰다.

“흠! 촉감이 아주 좋네요.”

사미염을 내려놓은 금장생은 싱긋 웃었다. 천이 워낙 얇아 맨살을 만진 기분이었다.

“야단 안 쳐요?”

사미염은 미안한 얼굴로 금장생을 보며 말했다.

“앞으로는 좀 더 주의할 거죠?”

“네.”

“그럼 됐어요. 그리고 이 녀석도 즐거웠거든요.”

금장생은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오른손이…….”

사미염은 말끝을 흐렸다.

그제야 왼 가슴에서 약간의 통증이 느껴졌다. 자신을 구할 때 겨드랑이 쪽으로 팔을 끼웠는데 그때 가슴을 움켜쥔 모양이었다.

“다음에 또 그렇게 무모하게 뛰어내리면 어디를 더듬을지 모릅니다.”

금장생의 시선이 사미염의 엉덩이 쪽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음흉하네요?”

사미염은 피식 웃었다.

시선은 엉덩이로 향하고 있지만 눈빛은 차분했다. 말과 달리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는 걸 뜻했다.

“저는 음흉한 게 아니라 본능에 충실한 겁니다.”

“마왕의 본능은 돈 쪽에 있는 걸로 아는데 아닌가요?”

“수컷 본능은 선천적인 거고 돈은 후천적으로 형성된 본능입니다.”

“요새 수컷 본능에 눈을 뜨고 있나 보죠?”

“우리 아버지 말이 부자로 살고 싶으면 가급적 여자를 멀리하라고 하셨는데, 요샌 쉽지 않네요.”

“내가 보기엔 당신 얼굴에 끼어 있는 게 도화살 같아요.”

“도화살?”

“우린 도화살을 여자를 밝히다가 복상사당하는 상이라고 불러요.”

“그러니까 제가 복상사당할 상이란 말입니까?”

“제 생각이에요. 그리고 많은 사내들이 바라는 상이기도 하고요.”

“나는 그들과 다릅니다.”

“어떻게 다른데요?”

“여자는 내 재산을 갉아먹는 사악한 존재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여자에게 선물 사 준 적 있어요?”

“지금까지 여자를 사귄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런 건 자랑이 아닌데.”

“창피할 것도 아니죠.”

“하긴.”

사미염은 어깨를 으쓱했다.

“이제 저 윗동네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할까요?”

금장생은 복면인 앞으로 갔다.

마혈과 아혈을 제압당한 사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로 금장생을 보았다.

사람이 많으면 사인루를 공격할 의도를 가지고 온 자라고 생각하겠지만 상대는 단 두 명이다. 그 인원으로 사인루를 공격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나는 지금부터 강기로 당신과 나를 감쌀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면, 당신이 아무리 비명을 내지른다고 해도 아무도 듣지 못할 거란 말입니다. 그리고…….”

금장생은 사내의 허리춤에 걸려 있는 장도와 단도를 풀어 허리에 찬 후 장도를 먼저 뽑았다.

도 손잡이 바로 위에는 설雪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소도도 마찬가지였다.

“사인루 자객들은 전부 이런 명검을 가지고 있는 겁니까?”

금장생은 감탄한 얼굴로 물었다.

사내가 가진 검은 동영에서도 명검가로 손꼽히는 무라마사 가문에서 만든 게 분명했다.

사내는 고개를 저었다.

금장생은 사내의 아혈을 풀어 주었다.

“그 검은 우리 집안에서 만든 거다.”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집안이라면 무라마사 가문?”

“무라마사를 어떻게…….”

사내는 의아한 얼굴로 금장생을 보았다.

무라마사는 동영에서 유명한 가문일 뿐, 중원 사람은 전혀 모른다. 그런데 앞에 있는 자는 검만 보고 무라마사 가문에서 만든 걸 알아차렸다.

그건 사인루 루주인 사토도 알아내지 못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중원인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사내는 도刀라고 하지 않고 검劍이라고 하였다.

중원인들의 시선에는 한쪽 날만 사용하는 왜검은 검이 아니라 도다.

이런저런 상황을 종합할 때 눈앞 사내는 동영에 대해 아주 잘 아는, 아니 속속들이 아는 자가 분명하다.

“내게도 무라마사가에서 만든 검이 두 자루 있습니다.”

“동영인은 아닌 것 같은데…….”

“내가 이 녀석의 현 주인입니다.”

금장생은 왼손 주먹을 사내 앞으로 내밀었다.

“……!”

처음 사내는 의아한 얼굴만 했을 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 그건…….”

하지만 잠시 후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사내는 몸을 일으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마혈이 제압당한 상태라 움직이지 못했다.

“그, 그분의 후예십니까?”

사내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쩌다 그렇게 됐습니다.”

“그분은…….”

“그분을 아십니까?”

“그분께 황천을 드린 분이 아버님이셨습니다. 일생 동안 만든 검 중 최고의 명검이라고 말씀하신 기억이 납니다. 그 후로 그분의 검을 여러 번 갈아 드리기도 하고, 한번은 부러져서 수리를 해 드린 적도 있고요. 평생을 그분과 함께하기로 했는데…….”

사내는 말끝을 흐렸다.

“태양과 함께하셨습니다. 물고기에게 육신을 공양하고 싶다는 유언을 하셔서 그렇게 해 드렸고요.”

“바다에서 돌아가셨군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누구십니까?”

“마왕입니다.”

“마왕이시면?”

사내의 눈이 커졌다.

“치졸한 복수를 하려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설마 두 분이서…….”

“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에 몇 명이 있는지 아십니까?”

“그걸 알고 싶어서 대협을……. 참, 이름이 뭡니까?”

“용처럼 되라고 류龍라 지어 주셨는데 미꾸라지로 살고 있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사내에게서는 적대감을 찾아볼 수 없었다.

금장생은 지풍을 쏘아 마혈을 풀어 주었다.

류는 복면을 벗었다. 그러자 선하게 생긴 얼굴이 나타났다.

나이는 오십 대 중반 정도로 보였다.

“사인루에 당신과 같은 사람이 몇 명이나 있습니까?”

“저와 같은 사람이라면…….”

“이걸 아직 기억하고 있는 사람 말입니다.”

“사백 명은 됩니다.”

“총인원은 어떻게 됩니까?”

“사인루 자객 수는 돌아오지 않은 이백 명을 포함해서 일천 명입니다.”

“만일 말입니다, 내가 공격을 시작하기 전에 그들에게 지켜보기만 하라고 하면 그렇게 할까요?”

“그건…….”

류는 말끝을 흐렸다.

“내가 죽었을 때를 대비하지 않을 수 없다는 거군요.”

“우리가 지켜보기만 한 상태에서 대인이 실패하면 우린 할복을 강요당할 겁니다.”

“그렇겠지요. 하지만 나는 지금부터 뇌섬류의 전수자와 마왕으로서 무자비한 살겁을 저지를 겁니다. 내게 대항하는 자들은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하고 뇌섬류의 제물이 될 겁니다. 알아서 요령껏 살아남으라고 전하세요.”

“전하라는 말은…….”

“이건 잠시 빌리겠습니다.”

금장생은 장도를 가볍게 쳤다.

“가도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류는 믿기지 않는 얼굴로 물었다.

“류 당신이 내 생각과 달리 사인루 루주에게 보고를 한다고 해도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늘 이곳에 있는 자들은 전부 죽습니다.”

금장생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살기를 뿜어내며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것보다 더 섬뜩했다.

“알겠습니다.”

류는 금장생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저쪽에 보면 절벽 중간에 동굴이 있습니다. 거기가 사인루로 들어가는 출굽니다. 그럼.”

류는 복면을 집어 들고 바닥을 찼다.

잠시 후 류의 모습이 운무 속으로 사라졌다.

금장생은 류가 사라진 허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가 고개를 돌린 건 오른 볼에 와 닿는 따가운 느낌 때문이었다.

사미염이 의미를 알 수 없는 모호한 눈빛으로 이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궁금한 게 있는 눈친데요?”

“제게 말해 주지 않겠지요?”

“내가 그 친구를 살려 준 거나 동영에 대해 잘 아는 것, 그리고 동영 무공을 아는 것 등은 마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아울러 마가에 눈곱만큼의 피해도 없을 거라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말해 줄 수 없다는 거네요?”

“네.”

“그런데도 궁금해 죽겠는데 어떡하죠?”

“그러다 정말 죽는 수가 있습니다.”

“헹!”

사미염은 금장생을 흘겨보았다.

“혹시 먹을 거…… 없겠네요.”

금장생은 사미염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음식 같은 걸 넣어 다닐 수 있는 그런 옷이 아니었다.

금장생은 자신의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뭔가를 한 움큼 꺼냈다. 그건 바로 육포였다.

“드실래요?”

금장생은 사미염을 보며 물었다.

“그걸 가지고 누구 입에 풀칠해요.”

“굳이 배부르게 먹을 필요 없습니다. 싸움이 끝날 때까지 버틸 수만 있으면 됩니다. 그리고 이게 전부가 아닙니다.”

“더 있어요?”

“물론이지요.”

금장생은 각 주머니를 뒤졌다.

주머니 안으로 집어넣었던 손을 꺼낼 때마다 육포가 한 움큼씩 나왔다.

“이 정도면 나 혼자라면 닷새를 버티고, 사 비주와 둘이면 사흘을 버팁니다.”

육포 한 움큼을 사미염에게 건네고 나머진 다시 본래 자리로 집어넣었다.

“철저하네요.”

“자객이잖아요.”

금장생은 싱긋 웃었다.

“그럼 자객이면서 아무것도 준비 안 한 나는 뭐가 되는데요?”

“사 비주는 생존 능력을 적어도 나보다는 한 가지를 더 가지고 있잖습니까?”

“내 몸을 말하는 건가요?”

“아무리 악한 자라고 해도 그런 엄청난 몸매를 지닌 여자를 단칼에 죽이진 못합니다. 자신도 모르게 한껏 달아오른 수컷의 본능을 식힌 후에 죽여도 늦지 않다고 합리화하게 되죠. 그런 다음 사 비주의 옷을 벗기고 입을 맞추려 들겠죠. 그럼 사비주의 입안에 있는 독이나 혹은 가슴 그리고 은밀한 곳에 발라 놓은 독에 중독돼 죽임을 당하겠지요.”

“어떻게 나보다 내 몸에 대해서 더 잘 알죠?”

사미염은 멍한 얼굴로 금장생을 보았다.

금장생의 말은 한마디도 틀리지 않다.

자신은 임무를 나갈 때면 입안과 가슴, 그리고 은밀한 곳에 극독을 발라 놓고 다닌다. 오직 입으로 흡입했을 때만 중독되고 피부로는 스며들지 못하는 독이다.

암살에 실패하고 사로잡혔을 때 자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다.

그런데 금장생은 자기가 독약을 발라 준 것처럼 완벽하게 알고 있었다.

“자객이잖아요.”

금장생은 조금 전에 했던 말을 반복했다. 그리고 육포를 잘게 찢어 하나씩 입안으로 던져 놓고 정성 들여 씹었다.

처음엔 노린내가 나다가 이내 육즙이 나오면서 고소한 맛으로 바뀌었다.

덩어리가 없게 완벽하게 씹은 후 한 번에 넘겼다. 그리고 다시 육포를 입으로 던져 넣었다.

“원래 그렇게 먹어요?”

“어떻게 먹는데요?”

“잘게 찢어서 입안에서 죽이 될 때까지 씹다가 삼키잖아요.”

“제가 그랬나요?”

“네.”

“죽이 될 때가지 씹는다라…… 으으!”

금장생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왜요?”

“상상해 버렸습니다.”

“상상?”

“입안에서 죽이 된 육포를 상상했단 말입니다.”

“입안에서 죽이 된 육포는 어떤 모습인데요?”

“술을 많이 마시고 토했을 때 나온 것들과 흡사합니다.”

“욱!”

사미염은 얼른 입을 막았다. 상상을 하자마자 토할 것만 같았다.

“휴우!”

속이 가라앉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육포를 씹어 먹었다.

하지만 이내 먹는 걸 포기하고 말았다. 자꾸만 토사물이 떠올라 먹을 수가 없었다.

“주세요.”

금장생은 손을 내밀었다.

사미염은 남은 육포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물었다.

“왜 시간을 끌고 있는 거죠?”

“류가 동료들에게 알릴 동안 기다리는 겁니다.”

“만일 동료들에게 알리지 않고 루주에게 보고해 버리면 더 힘들어지는 거 아닌가요?”

“류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힘들어지는 건 없습니다. 한 십여 명 정도는 소리 없이 없앨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 후엔 조직적으로 대항하는 팔백 명과 싸워야 합니다. 반면에 류가 약속을 지키면 우린 사백 명의 방관자를 얻게 됩니다.”

“방관자 사백 명이라는 건 무슨 뜻이죠?”

“류와 같은 부류라는 뜻입니다. 나를 공격할 의사는 없지만 훗날이 걱정되는 자들은 적극적으로 공격에 가담하지 않을 겁니다. 즉, 공격하는 시늉만 할 거라는 거죠. 그러다가 우리에게 승산이 있다는 확신이 들면 우리 편이 될 겁니다.”

“그렇군요.”

사미염은 고개를 끄덕였다.

주도면밀한 사내. 그리고 여자보다 돈을 더 사랑하는 사내.

그녀가 금장생에 대해 내린 평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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