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145)
사인루
아무도 모르게 복수를 하고 싶은 자여.
아무도 모르게 사무친 원한을 풀고 싶은 자여.
아무도 모르게 친구의 자리를 차지하고 싶은 자여.
아무도 모르게 연적을 처리하고 싶은 자여.
누구라도 상관없다.
설사 아무런 이유가 없더라도 괜찮다.
아무도 모르게 누군가의 죽음을 원하는 자는 모두 생사교로 가라. 그리고 청부를 넣어라.
그러면 그대가 원하는 걸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단, 그들이 원하는 걸 네가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들이 원하는 걸 내놓지 못할 경우엔 네 목숨으로 대신해야 한다는 걸 명심하라.
그들이 원하는 건 바로 금이다.
그것은 중원에 은밀하게 떠도는 소문이었다.
진위조차 확실하지 않지만 많은 이들은 생사교를 찾아 운남으로 가곤 했다.
생사교는 운남의 만불산 와불곡臥佛谷에 위치해 있었다. 와불곡은 바닥에 거대한 와불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깊이는 이십 장 정도고, 늘 운무에 휩싸여 있어 운무곡이라 불리기도 한다.
와불곡을 가로질러 쇠사슬과 동아줄로 만들어진 이십 장 길이의 다리가 있는데 그 다리가 바로 생사교였다.
휘익!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그러자 와불곡 상층부의 운무가 사라지면서 다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다리라고 하기엔 어폐가 있었다. 아래쪽에는 쇠사슬 하나가 길게 이어져 있고, 쇠사슬로부터 두 자 높이 좌우측에 동아줄이 길게 이어져 있다.
양쪽 손잡이로 사용되는 줄과 쇠사슬 하나만으로 이루어진 다리였다.
저 세 개의 줄이 누군가의 삶과 죽음을 결정한다는 생사교였다.
바람이 멈추자 생사교는 다시 운무 속으로 사라졌다.
희미한 불빛이 밝혀진 실내.
다섯 명이 둘러앉아 있었다.
정중앙에 앉은 사내는 오십 대 후반으로, 눈빛이 날카롭고 입술이 얇아 차가운 인상을 주는 자였다.
동영 무사 복장을 하고 있는 이자는 사인루 루주 사토佐藤였다.
사토는 오른편 앞에 앉은 사내에게 시선을 주었다.
코가 오뚝하고 눈이 좌우로 길게 찢어진 그는 사인루 이인자이자 제일막 수좌인 요시다吉田였다. 요시다의 허리춤에는 왜도 두 자루가 나란히 걸려 있었다.
“마왕을 없애는 일은 어떻게 됐느냐?”
시선이 마주치자 사토가 물었다.
“실패했습니다.”
요시다는 상체를 숙이며 대답했다.
“인사 이백 명을 동원하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실패했다는 거냐?”
“죄송합니다.”
요시다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출동 나갔던 인사들이 전부 죽어 어떤 상황인지 그도 알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실패한 사실 말고는 따로 보고할 게 없었다.
“아직 파악이 안 된 게냐?”
“수하들을 싸움이 있었던 장소로 파견했습니다. 조만간 결과가 나올 걸로 봅니다.”
“결과 같은 건 필요 없다. 앞으로 한 달을 주겠다, 요시다. 그 기간 안에 마왕과 네 머리 둘 중 하나를 내 앞으로 가져오도록 하라.”
“알겠습니다, 다이묘.”
요시다는 머리를 바닥에 찧었다.
“해산하라!”
사토는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세 명이 무릎 자세로 물러나더니 방에서 나갔다.
실내에는 사토와 사십 대 중반 사내 한 명만 남았다.
사내는 눈이 작고 입술이 얇으며 덩치가 작았다. 작은 눈은 끊임없이 반짝이며 사토의 눈치를 살폈다.
이자는 사토의 심복이자 제이막의 막주인 야마시타山下였다.
“본토 상황은 어떠냐?”
사토는 야미시타를 보며 물었다.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 같습니다.”
“통일을 앞두고 있던 그가 죽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를 따르던 자들이 많았습니다.”
“지금은 조용히 있지만 언제 들고일어날지 모른다는 말이냐?”
“네.”
“혼돈의 시대란 말이구나.”
“지금은 누가 관백關白이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오다아이織田愛를 살려 둬야 한다고 한 거냐?”
“그렇습니다. 제가 아는 한 오다아이 님의 진짜 성은 아시카가足利입니다. 다이묘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본국에서는 아무리 강한 권력을 지녔다고 해도 아무나 쇼군으로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시카가 성씨를 가진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면 달라집니다.”
“쇼군에 오를 명분을 확보할 수 있다는 말이구나.”
“완전한 명분은 아니지만 적어도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요.”
“일리가 있구나.”
사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사토와 야마시타는 지하로 들어섰다.
눅눅한 습기와 퀴퀴한 냄새로 가득 찬 이곳은 사인루에서 운영하는 감옥이었다.
사인루는 청부하는 자가 죽음이 아니라 인질을 원했을 때, 잡아 온 자를 가두기 위해 감옥을 두고 있었다.
하지만 감옥에 손님이 든 건 손가락으로 꼽는다.
그런데 이번에는 손님이 있었다. 그것도 여자 손님이었다. 여자는 책을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이 다가가자 여자는 고개를 들었다.
갸름한 얼굴에 청초한 느낌의 미녀였다.
“왜 죽이지 않는 거지?”
차분한 목소리가 여자 입에서 흘러나왔다.
“지금 고민 중에 있습니다.”
“기다리는 나도 힘드니까 끝낼 것 같으면 서둘러 다오.”
“야마시타 말이 진짜 성은 아시카가라고 하던데 맞습니까?”
“과거는 잊은 지 오래다.”
“부정하지 않는 걸 보니 맞나 보군요.”
사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은 죽었느냐?”
“그분이라면…….”
“양부 말이다.”
“네.”
“그랬구나.”
“배신으로 쌓은 탑은 배신으로 붕괴되기 마련입니다.”
“나는 그분의 삶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양녀가 됐으니까 그분의 상황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겠지요. 아무튼 특별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으면 당신의 목을 베게 될 겁니다. 남은 시간이라도 편하게 지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십시오.”
“책이 필요하다.”
“알겠습니다. 더 필요한 건 없습니까?”
“없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사토는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떴다.
* * *
휙!
검은 옷을 입은 자가 생사교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차분은 눈빛으로 생사교를 바라보는 이자는 금장생이었다.
“어서 오세요.”
금장생 뒤편으로 야행복을 입고 복면을 쓴 사미염이 나타났다. 금장생은 몸을 돌려 사미염을 돌아보았다.
‘헐!’
내심 신음을 내뱉었다.
아무리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를 차단하기 위해 고안된 옷이 야행복이라고 하지만, 사미염이 입고 있는 건 정도가 심했다.
얼마나 얇은지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난 상태였다.
야행복 말고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는 듯, 옷 자국도 보이지 않았다.
문득 사미염에게 죽은 자는 모두 행복한 표정을 지을 것만 같았다. 야행복을 입은 그녀의 모습은 그만큼 농염했다.
“왜요?”
금장생의 시선이 자신의 몸에서 떠나지 않자 사미염은 물었다.
“그게 임무복인가요?”
“네. 이상해요?”
“제게 죽을 상대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면 사 비주를 고를 겁니다.”
“제 몸매 때문에요?”
“네.”
“그럼 복장은 성공적이네요.”
“성공적이라는 건 무슨 뜻이죠?”
“전직 자객의 시선을 잡아 줄 정도면 최고의 복장 아닌가요?”
“그렇긴 합니다만…….”
금장생은 할 말이 없었다.
자객에게 있어 결정적인 순간에 상대의 시선을 잡아끌 뭔가가 있다는 건 큰 장점으로 작용한다. 아마 사미염은 그걸 몸매로 택한 것 같았다.
상대를 죽이고 자신은 살기 위해 저런 복장을 했는데 거기에 대해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다.
“아무튼 제 눈은 즐겁습니다.”
“흥! 하여간 사내들이란.”
사미염은 금장생을 흘겨보았다.
“그보다 만불산은 어떤 산입니까?”
금장생은 화제를 돌렸다.
“우리가 확인한 바로는 만불산은 섬이었어요.”
“섬이라는 건 무슨 뜻입니까?”
“사방이 낭떠러지로 이루어져 있어서 일반인은 올라가는 건 물론이고 내려오는 것도 불가능해요.”
“하지만 우리 상대는 무인입니다.”
“무인이 내려올 수 있는 곳도 많지 않아요. 총 다섯 군데 정도였는데, 그곳은 백팔무영비가 지키고 있어요. 그런데…….”
“말씀하세요.”
“정말 혼자 들어갈 거예요?”
“네.”
“그건 안 돼요.”
사미염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왜요?”
“저 안에는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알 수 없어요. 그런 곳에 마왕을 혼자 들여보낼 수 없어요. 만일 혼자 들여보냈다가 무슨 일이라고 생기면 그 책임은 고스란히 제가 떠안게 돼요.”
“그래서 함께 들어가자는 건가요?”
“네.”
“그럼 그렇게 해요.”
금장생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히려 놀란 사람은 사미염이었다.
그녀는 금장생이 극구 못 들어오게 할 거라 생각하고, 자신이 함께 가야 할 이유까지 준비해 두었다. 그런데 금장생이 군말 없이 함께 가자고 해 버리자 순간 허탈해졌다.
“내가 말려도 따라 들어올 거 아닌가요?”
“맞아요.”
“그래서 함께 가자고 한 거예요. 뭐가 잘못됐어요?”
“아뇨.”
사미염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시작해 볼까요?”
금장생은 이곳으로 오기 전에 마을에서 산 붉은색 연을 들어 올렸다. 바람은 만불산 쪽으로 불었다.
금장생은 연을 들어 바람에 날렸다. 바람을 탄 연은 금세 하늘 높이 올라갔다.
“어떻게 하실 거죠?”
사미염이 물었다.
“이 연을 올리면 만불산에서 청부를 받을 사람이 나온다고 하더군요.”
“그자를 잡을 건가요?”
“모르는 장소로 갈 때에는 안내인을 대동하는 게 위험을 줄이는 가장 좋은 방법이잖습니까.”
“저는 숨을게요.”
사미염은 은신술을 펼쳐 허공으로 녹아들어 갔다.
“이번엔 안 벗어요?”
전에는 완벽한 은신술을 위해 옷을 벗었던 기억이 떠올라 물었다.
“그땐 야행복을 입지 않았잖아요. 그리고 지금은 그때처럼 다급한 상황도 아니고요.”
“아쉽네요.”
사미염의 기척이 사라지자 금장생은 연으로 시선을 주었다.
줄을 다 풀어 더 이상 풀어 줄 줄이 없었다.
“기다리기만 하면 되겠지.”
금장생은 천리지청술을 펼쳐 주변을 살폈다.
잠시 후 누군가 다리를 건너오는 기척이 감지되었다.
―오고 있습니다.
금장생은 사미염에게 전음을 보냈다.
―알고 있어요.
사미염의 대답이 들려왔다.
스윽!
곧 금장생 앞에 검은 옷에 복면을 걸친 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내는 금장생과 삼 장 떨어진 곳에서 쇠사슬 위에 선 채였다.
“적연을 올린 사람이 그댄가?”
사내는 물었다.
“그렇습니다.”
“어떤 청부를 하고 싶은가?”
“한 조직을 없애려면 금액이 어느 정도 들어가는지 알고 싶습니다.”
“어떤 조직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자객 단쳅니다.”
“자객 단체?”
사내의 몸이 움찔했다.
자신이 속한 조직도 자객 단체이기 때문이었다.
“그렇습니다.”
“단체 이름을 말할 수 있는가?”
“네.”
“말하라. 그럼 가격을 알려 주겠다.”
“내가 없애고 싶은 자객 단체는 사인루란 곳입니다.”
파앗!
금장생의 신형이 전방으로 폭사되었다.
“헉!”
사내의 입에서 비명이 비어져 나왔다.
사내는 재빨리 쇠사슬을 차고 날아올랐다. 그리고 곧바로 허리춤을 더듬었다.
사내가 꺼낸 건 무기가 아니라 호각이었다. 안쪽에 침입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보다 한발 빠른 게 있었다.
퍽!
미약한 소성이 그의 마혈에서 흘러나오고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사내의 마혈을 향해 지풍을 쏜 사람은 사미염이었다.
마혈을 눌린 사내는 아래로 추락했다.
척!
금장생은 사내를 잡아챘다. 그리고 다리 아래로 추락했다.
“앗!”
금장생이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지자 사미염은 질겁했다.
그녀는 곧바로 금장생을 쫓아 생사교 아래로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