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가-142화 (142/524)

황금가 (142)

원흉들

외출에서 돌아온 금장생과 석보산은 실내를 치웠다.

천장에 있는 시체까지 합쳐 아홉 구를 지하실로 옮기고 바닥을 깨끗하게 닦았다. 그리고 관처기의 처소를 뒤졌다.

반 시진 정도 뒤진 끝에 비밀 공간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곳에는 관처기가 화가로부터 받았던 지시 사항과 미처 보고하지 못한 것들이 보관돼 있었다.

두 사람은 그것들을 꼼꼼하게 훑어보았다. 그리고 대륙황가에서 암약하는 적의 동향을 파악할 수 있었다.

“자, 이제 저자의 입에서 뭐가 나오는지 확인해 볼까요?”

금장생은 관처기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관처기의 동체가 둥실 떠올랐다.

“단주께서는 시비를 처리하고 오십시오. 그동안 저는 이자를 심문하도록 하겠습니다.”

금장생은 시체를 두었던 지하실로 가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석보산은 침대로 갔다. 그리고 잠들어 있는 시비를 깨웠다.

“다, 단주님, 죽을죄를 졌습니다.”

시비는 깨어나자마자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다.

“일어나서 옷을 입어라.”

“단주님.”

“지금은 널 죽일 생각이 없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마음이 바뀔지도 모른다.”

“아, 알겠어요.”

시비는 얼른 옷을 입었다.

“따라와라.”

시비가 옷을 입고 나자 석보산은 밖으로 나갔다.

“단주님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전 다만…….”

“알고 있다. 그리고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널 죽이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단주님.”

“단!”

석보산의 말투가 엄해졌다.

“마, 말씀하세요.”

“오늘 밤 본 건 전부 잊어야 할 게야.”

“알았어요. 죽을 때가지 입을 다물고 있을게요.”

“서둘러라!”

석보산의 걸음이 빨라졌다.

대륙황가 밖으로 나갔던 석보산이 돌아온 건 반 시진 후였다.

“크아악! 아아악! 다 말했습니다. 더 이상은…….”

“그런데 왜 저는 아직도 궁금한 게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관 총관. 이곳에서 내 궁금증을 풀어 줄 사람은 관 총관뿐입니다. 관 총관도 보았겠지만 오덕소, 양만기, 이척신, 안우현은 내 궁금증을 풀어 줄 형편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남은 사람은 관 총관뿐이지 않습니까. 이런, 그러고 보니 이쪽 다리가 조금 더 길군요. 이번엔 아프지 않게 잘 잘렸으면 좋겠습니다.”

“마, 말하겠습니다. 뭐든 질문만 하십시오.”

“아직 멀었군요.”

퍼억!

“크아아악! 말하겠습니다. 모두 말하겠습니다. 제 머릿속에 있는 걸 전부 끄집어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자, 자! 진정하세요. 그리고 아까처럼 두서없이 말하면 안 됩니다. 대화라는 건 말입니다, 특히 보고 같은 건 상대방이 알아듣기 쉽게 말하는 게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조금이라도 알아듣기 힘들면 아직 정신이 덜 든 걸로 간주하겠습니다.”

“무, 물론입니다.”

관처기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벌써 스무 번도 더 반복하고 있다. 이제는 어떤 게 더해졌는지 어떤 부분이 빠졌는지조차 알 수가 없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수십 번을 계속하다 보니 머릿속에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돼 있다는 점이었다.

벌컥!

그때 지하실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온 자는 석보산이었다.

관처기는 잠시 말을 끊었다.

“관 총관, 계속하십시오.”

“네, 네.”

관처기는 말을 이었다.

‘세상에!’

석보산은 기절할 지경이었다.

금장생 앞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자는 그가 아는 관처기가 아니었다. 고깃덩어리 하나가 꿈틀거렸다.

저 정도까지 망가지고도 살아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관처기의 이야기는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더 이상 할 말 없습니다. 이제…….”

“저도 그런 것 같습니다.”

금장생은 관처기의 사혈을 눌렀다.

관처기는 나직한 비명과 함께 숨을 거뒀다.

“이겁니다.”

금장생은 종이 한 장을 석보산에게 내밀었다.

“이건 뭡니까?”

“관처기와 같은 배를 타고 있던 자들입니다.”

“백여 명이나 되는군요.”

“그 정도나 되니까 반란을 꿈꾸었겠지요.”

“이들은…….”

“모두 관처기와 처장들로부터 용돈을 받았던 자들입니다. 그동안 먹은 걸 모두 토해 내게 만드십시오. 그리고 전부 쫓아내십시오.”

“알겠습니다. 이제 그만 자리를 옮기시지요.”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업무에 대한 건 내일 하도록 합시다.”

금장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나머지 일 처리는 석보산이 알아서 할 거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석보산은 고개를 숙였다.

“참!”

계단 앞으로 간 금장생은 석보산을 돌아보았다.

“말씀하십시오.”

“황금전가 말입니다.”

“황금전가요?”

“그런 거대 상단이 하루아침에 망할 수도 있는 겁니까?”

“절대 불가능합니다.”

석보산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황금전가 멸문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어떤 방법입니까?”

“상당한 규모의 상단이 연합을 하는 겁니다.”

“이를테면?”

“상천금가, 진가장, 태양상인 등입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태연한 얼굴 표정과 달리 그의 심장은 요동쳤다. 드디어 황금전가를 멸망시킨 자들을 찾아낸 것이다.

석보산이 세 상단을 예로 들었지만, 단순한 예가 아니라 황금전가 멸문에 관여한 자들을 언급한 게 분명했다.

“아무래도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자리를 옮기는 건 어떻습니까?”

“그렇게 하시지요.”

두 사람은 지하실을 나와 석보산의 집무실로 자리를 옮겼다. 석보산은 곧바로 차를 내왔다.

“대륙황가는 관여하지 않았습니까?”

석보산이 자리에 앉자 금장생은 물었다.

“세 상단은 각자의 영역을 지켜 왔습니다. 누군가가 그 영역을 침범하면 지금까지 유지돼 왔던 질서가 무너지고 맙니다. 저는 물론이고 마왕도 그런 상황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랬군요.”

“그런데 황금전가 멸문은 왜?”

“나도 황금전가 멸문이 거대 상단들에 의해 저질러진 범죄라고 생각했거든요.”

“우리 대륙황가도 황금전가처럼 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신 겁니까?”

“관처기 같은 자들을 몇 년 동안 더 방치했더라면 대륙황가도 황금전가처럼 망하지 않았을까요?”

“그럴 가능성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석보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금장생의 말이 틀리지 않다. 만일 관처기와 아까 받은 명부에 적힌 자들이 모두 나서고 자신이 죽는다면, 대륙황가 또한 황금전가의 전철을 밟았을 게 분명했다.

“자료를 부탁하고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

“어떤 자료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과거 황금전가 소속이었던 중소 상단에 대한 자료가 필요합니다.”

“그건 왜?”

“곧 천왕지회가 열리지 않습니까. 화왕과 해왕, 혈왕의 약점 하나 정도는 쥐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그때 써먹기 위해?”

“써먹을지 여부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뭔가를 하나 정도는 쥐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요.”

“알겠습니다. 파악해서 보고서로 작성해 올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단주. 그런데…….”

“말씀하십시오.”

“중소 상단이 황금전가를 배신한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단주의 사망과, 느닷없이 발견된 빚입니다.”

“단주의 죽음과 빚이라는 건 무스 뜻이죠?”

“먼저 단주가 의문의 죽임을 당합니다. 그렇게 되면 이인자나 혹은 단주 아들이 상단을 맡게 됩니다. 그때 느닷없이 감당하기 힘든 빚 문서가 날아듭니다.”

“빚을 일정 부분 탕감해 주는 대신 황금전가에서 탈퇴하라고 요구한다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만일 그런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황금전가에 보고하지 않을까요?”

“보고를 했을 겁니다.”

“그런데?”

“전서구나 혹은 전령이 황금전가 본산에 도달하지 못했을 겁니다.”

“중간에 차단당했을 거란 말이군요.”

“그랬을 겁니다. 결국 그들은 황금전가로부터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채권자에게 굴복하고 맙니다.”

“채권 증서는 진짭니까?”

“모든 증서가 진짜일 리는 없겠지요. 아마도 팔 할에서 구 할은 가짜 증서였을 겁니다.”

“하지만 돈을 빌린 자가 죽어 버렸으니까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없었겠군요.”

“그랬을 겁니다.”

“우리 중소 상단의 관리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모든 자금 흐름을 철저하게 파악하고 있습니다. 오백만 냥이 잘못 계상됐다는 것도 그렇게 해서 알아냈습니다.”

“만일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우리도 당했을 수도 있겠군요.”

“그렇습니다.”

“혹시 채권 증서 가진 거 있습니까?”

“채권 증서요?”

“가짜 채권 증서 말입니다.”

“몇 개 가지고 있을 겁니다.”

“보고 싶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석보산은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종이 다섯 장을 가지고 나왔다.

금장생은 채권 증서를 펼쳤다.

채권 증서는 보통 작성하는 차용증과는 차원이 달랐다. 몇 번의 확인 작업을 거치도록 돼 있기 때문에 인장 하나에도 많은 의미가 담긴다.

예를 들어 일월日月이란 글이 새겨진 인장을 사용한다면, 해를 나타내는 일日은 찍었을 때 선명하게 나오고 달과 밤을 나타내는 월月은 희미하게 나온다.

“이건 황금전가가 자금을 회수해 간 문서군요.”

“아마 그런 문서들이 중소 상인들이 떠나게 한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겁니다.”

“이 문서의 진위는 확인해 봤습니까?”

“진본이라는 감정 결과가 나왔습니다.”

“황금전가에서 자금을 회수해 갔고, 그 돈을 돌려주지 않아서 빚을 졌다는 말이 되는군요.”

“그렇습니다.”

석보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대륙황가의 대응은 어떻습니까?”

“직인을 분리했습니다.”

“어떻게요?”

“상단의 대표 직인과 자금운용 직인을 다르게 사용합니다. 그리고 자금운용 직인은 육 개월마다 바꾸고 있고, 결재를 할 때는 반드시 대표 직인과 함께 찍고 있습니다.”

“둘 중 하나만 없어도 가짜가 되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잘하고 있군요.”

“제가 할 일입니다.”

“서역으로 떠났던 상행은 어떤 상황입니까?”

“세 달 있으면 도착할 겁니다. 그럼 우리 상단은 다시 정상을 되찾을 거고요.”

“그런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

금장생은 대륙황가의 상황을 물었다.

“제가 없는 사이에 관처기가 대규모 투자를 했습니다. 그 투자에는 중소 상단 스무 군데가 함께했는데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그 바람에 오백만 냥을 날리고 오백만 냥은 빚을 지게 됐고요.”

“총 천만 냥을 날렸다는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혹시 대륙황가가 가지고 있는 채권 문서도 가짜 아닙니까?”

문득 떠오르는 게 있어 물었다.

“가짜라고요?”

“조금 전 단주께서는 황금전가 증서는 전문가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정교하게 위조됐다고 하였습니다.”

금장생은 황금전가에서 자금을 회수해 갔다는 증서를 들어 보였다.

“황금전가 소속 중소 상단의 상단주는 다 죽었지만 우리 대륙황가 중소 상단주는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본인들 입으로 투자 실패라고 시인했습니다.”

“그들의 중심에 관처기가 있었지요. 불과 한 시진 전까지만 해도 관처기는 단주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었고요.”

“맙소사!”

석보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걸 생각 못 했다. 지금까지 믿었던 관처기가 배신자로 밝혀졌으니 모든 걸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 한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석보산은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