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130)
자객
십일월 중순 칼바람은 매서웠다.
북쪽에서 불어온 바람은 산등성이를 할퀴며 정상으로 빠르게 내달렸다. 바람이 불때마다 마른 억새풀은 서로 몸을 비벼 대며 써걱거렸다.
휙! 휙! 휙휙! 휙!
검은 옷을 입고 검은 복면을 쓴 자들이 빠른 속도로 산을 올랐다.
그들의 움직임은 워낙 은밀하여 이백 명이 몸을 날리는데도 소리가 거의 나지 않았다.
척!
선두에서 달리던 자가 오른팔을 번쩍 들었다.
그러자 복면인들은 일제히 그 자리에 납작 엎드렸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복면인들의 행동은 일사불란했다.
“일호!”
사내는 나직하게 소리쳤다.
“네!”
대답과 함께 복면 사내 한 명이 다가왔다.
“놈의 위치는 확인했느냐?”
“십 리 떨어진 곳에 있는 사목애란 절벽 아래쪽 동굴 속에 있습니다. 그런데 혼자가 아닙니다.”
“하면?”
“아수수란 계집과 백팔무영비 비주 사미염과 함께 있습니다.”
“백팔무영비 비주가 있다면 근처에 대원들도 있는 거 아니냐?”
“몇 번을 확인했습니다만 백팔무영비 대원들은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세 명이 전부란 말이냐?”
“현재까지 파악한 바론 그렇습니다.”
“설사 백팔무영비가 있다고 해도 문제 될 건 없지.”
그가 자객 이백 명을 데리고 온 건 사인루의 규칙 때문이다.
사인루는 청부 금액 만 냥당 한 명의 자객을 파견한다는 규칙이 있는데, 목표물의 신분에 따라 증가는 가능해도 줄이는 건 불가능하다.
이번 건은 원래 백 명의 자객의 배정돼야 한다. 하지만 목표물이 마가의 마왕이란 점이 재고돼 두 배인 이백 명이 파견되었다.
그 인원이 있으면 설사 백팔무영비 전원이 이곳에 와 있다고 해도 문제 될 게 없다는 게 수뇌의 생각이었다.
“가자!”
수뇌가 전방으로 폭사되었다.
휙! 휙휙! 휙!
이어 풀숲에 엎드려 있던 이들이 야조처럼 솟구쳐 어둠을 뚫고 날아갔다.
타닥! 탁탁! 타다닥!
모닥불 불빛이 동굴 안을 환하게 밝혔다.
모닥불 근처에는 아수수와 금장생이 피풍의를 요와 이불 삼아 누워 있고, 그들 건너편에서는 사미염이 책을 보고 있었다.
그녀가 읽고 있는 건 백팔살인류였다.
비급을 보던 사미염은 간혹 허리춤을 한 번씩 쓰다듬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 얻은 사류였다.
“끙!”
사미염은 얼굴을 찌푸렸다.
반 시진 전부터 볼일이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귀찮기도 하고 비급을 마저 읽으려는 욕심에 참았다. 그런데 한계에 도달한 것 같았다.
“안 먹고 안 싸면 얼마나 좋을까.”
그녀는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비급을 내려놓고 동굴을 나섰다.
밖으로 나온 사미염은 주위를 살폈다.
“이럴 땐 꼭 강아지가 된 기분이야.”
사미염은 왼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볼일 볼 장소를 열심히 찾아다니는 강아지가 떠올랐다.
잠시 후 그녀는 동굴이 보이지 않는 장소를 찾았다.
요대를 풀고 바지를 내렸다. 바지를 발목에 걸치고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주위를 살폈다.
그녀가 주위를 살피는 건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힘을 주었다.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자 아무도 없는데도 조금 부끄러웠다. 서둘러 끝내기 위해 힘을 주었다.
소리는 더 커졌다.
‘미리미리 봐 둘걸.’
미리 봐 둘 걸 공연히 참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부터는…….’
스아악!
갑자기 대기를 가르는 소리가 귀에 와 꽂혔다.
“헉!”
사미염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암기가 날아오는 소리가 분명했다.
아직 볼일은 진행 중이다. 어둠 속에 숨은 암습자는 결정적인 순간을 노렸던 게 분명했다.
턱!
사미염은 요대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바닥을 찼다.
아직 볼일이 끝난 게 아니지만, 목숨이 우선이었다.
허공으로 솟구치자 발목에 걸려 있던 바지는 저절로 빠져나갔다. 하지만 그것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아니, 그녀는 바지를 입지 않았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 다급했다.
휙! 휙휙!
그녀가 허공으로 솟구치자 세 명이 동시에 날아올랐다.
“차앗!”
허공에 우뚝 멈춘 사미염은 기합과 함께 사류를 휘두르며 회전했다.
스악! 스악! 스악!
반 장 길이의 사류가 푸른 광채를 남겼다.
툭! 툭툭!
세 구의 시체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하지만 비명은 전혀 없었다.
‘자객! 그것도 특급이다.’
사미염은 내심 중얼거렸다.
검이 몸을 가르고 지나갔는데도 비명을 지르지 않는 자는 혹독한 자객 수업을 거친 자들뿐이다.
사미염은 바닥으로 내려섰다.
파앗! 파앗! 파앗! 파앗! 파앗!
이번에는 다섯 명이었다.
좌우측에 한 명씩, 앞에 한 명, 그리고 뒤에 두 명이었다.
“살殺!”
사미염의 입에서 나직한 외침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녀의 신형이 전방으로 폭사되었다.
반 장을 나아가기도 전에 청색 광망이 그물막처럼 펼쳐졌다.
후두둑!
비릿한 피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휙!
뒤로 공중제비를 돌면서 두 번째 초식을 펼쳤다.
“혼魂!”
또다시 청색 광망이 허공을 갈가리 찢었다.
그 안에 있던 자객들 또한 다르지 않았다. 온몸이 난자되어 죽었다.
하지만 다른 자객들이 그랬던 것처럼 비명은 남기지 않았다.
슈아악! 슈아악!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좌우측에서 들려왔다.
‘이런!’
사미염의 얼굴이 굳었다.
양쪽을 다 막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피할 공간도 없었다.
―오른쪽!
바로 그때 귓전으로 금장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을 듣는 순간 사미염은 오른편을 향해 사류를 찔러 넣었다.
푹!
사류가 상대의 몸을 뚫고 들어가는 순간 내공을 쏟아부었다.
퍽!
자객의 몸이 폭죽처럼 터졌다.
푹!
그 순간 뒤편에서 뭔가가 파고들어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미염은 고개를 돌렸다. 금장생의 손에는 작은 검이 들려 있고, 그 검 끝에서 솟구친 검강이 자객이 목으로 파고들어 가 있었다.
턱 밑에서 파고들어 간 검강은 뒷목을 뚫고 나와 있었다. 찔리면 순식간에 숨이 끊어지는 치명적인 부위였다.
턱!
사미염은 뒤로 물러나 금장생의 등에 기댔다. 그러고는 비로소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 숨을 멈춘 채 공격과 방어를 했던 거다.
“어떤 자들인지 아세요?”
금장생은 천천히 야수감각도를 끌어 올리며 물었다.
자객을 상대할 때 가장 좋은 무공이 바로 야수마존의 야수감각도였다.
야수감각도가 극에 이르자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자들의 기척이 감지되었다. 그런데 그 수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주위를 뒤덮은 살기로 보건대, 최소한 두 배는 돼야 한다.
“인사들이네.”
금장생은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죽은 시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왜도 두 자루가 날아왔다.
장도와 단도였다.
척!
장도는 오른손으로 쥐고 단도는 요대에 사선으로 꽂았다. 그리고 들고 있던 단검은 원래 자리로 집어넣었다.
“그거 사용할 줄 알아요?”
사미염은 물었다.
“나보다 더 잘 사용하는 사람도 별로 없을 겁니다.”
금장생은 왜도를 사선으로 내렸다. 그리고 나직하게 말했다.
“옵니다!”
허공에 몸을 은신한 자객 열 명이 이편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열 명이 오고 있다는 건, 감지하지 못한 자들까지 합치면 스무 명이란 뜻이 된다.
―제 다리를 잡아 주세요.
사미염은 바닥을 찼다.
그녀의 신형이 허공으로 떠오른 순간, 금장생은 발목을 잡았다.
―돌려요.
“핫!”
금장생은 기합과 함께 사미염을 돌렸다.
휘이익!
“류流!”
사미염의 입에서 나직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녀의 사류가 허공에 수많은 광채를 남겼다.
서걱! 서걱! 서걱!
살이 베이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휙!
금장생은 사미염을 허공으로 던져 올렸다. 그리고 전방으로 쏘아졌다.
손에 들린 왜도가 좌측과 우측에 푸른 뇌전을 부려 놓았다. 뇌전은 가공할 속도로 허공을 부쉈다.
털썩! 털썩! 털썩! 털썩!
부서진 공간이 원상태로 복구되자 자객들이 통나무처럼 넘어갔다.
자객들이 죽어 나간 공간으로 사미염이 내려섰다.
그녀는 내려서자마자 다리를 좌우로 벌려 자세를 낮췄다. 그리고 상체를 뒤로 젖히고 사류를 찔러 올렸다.
푹!
사류가 자객 한 명의 회음혈로 파고들어 갔다.
“타하!”
금장생의 왜도가 사선으로 허공을 갈랐다.
공간이 쩍 갈라지며 피가 쏟아져 나왔다.
금장생은 왜도를 걷어 올리면서 앞으로 넘어질 것처럼 상체를 숙이더니 쭉 찔러 넣었다.
지면을 향한 그의 시야에 사미염의 하체가 들어왔다.
발가벗은 상태였지만, 알아차릴 상황이 아니었다.
―사 비주, 내 뒤편입니다.
그리고 사미염에게 전음을 보냈다.
약간 세우고 있던 사미염의 상체가 완전히 드러누웠다.
두 다리를 좌우로 활짝 벌린 상태에서도 등이 바닥에 닿을 정도로 그녀의 몸은 유연했다.
하지만 바닥에 등을 댄 건 아니었다. 그녀의 엉덩이와 등은 바닥에서 한 치 정도 떨어진 상태였다.
머리가 금장생 두 다리 사이로 들어갔다. 머리는 뒤로 젖혀 금장생 뒤편을 노려보았다.
그런 그녀의 눈에 일렁이는 있는 공간이 비쳤다. 은신한 채 달려오는 자객이었다.
그녀의 오른손이 뒤편으로 향했다.
팔은 머리 위로 향했지만 사류는 아직 구부러진 상태였다.
그녀가 팔을 쭉 내뻗는 순간 구부려져 있던 사류가 튕기듯 펴졌다.
푹!
사류 끝이 하공으로 파고들었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서 피가 쭉 솟구쳤다. 이윽고 드러난 자는 단전이 피로 범벅인 자객이었다.
사미염은 사류를 뽑아냄과 동시에 벌리고 있던 다리를 오므려 금장생의 목을 감았다.
금장생은 상체를 힘껏 들었다. 그러자 사미염의 신형도 들어 올려졌다.
그녀는 마치 전갈처럼 상체를 세운 채 전방을 향해 사류를 휘둘렀다.
“살혼류!”
그녀 전방이 푸른 광채에 휩싸였다.
스악! 스악! 스악! 스악!
그리고 다섯 명의 자객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객들의 전신은 난자된 상태였다.
사미염은 한 발을 오므려 금장생의 어깨를 짚었다.
―원래 그렇게 싸워요?
금장생의 전음이 들렸다.
―내가 좀 거칠게 싸우는 편이에요.
―내가 말하는 건 그게 아닌데.
―그럼 뭐죠?
다시 사류에 내공을 주입하며 물었다.
―원래 그렇게 벗고 싸우냐고요.
‘버, 벗고?’
사미염은 오른손으로 슬쩍 하체를 만져 보았다.
매끈한 맨살이 만져졌다.
‘이런 빌어먹을!’
그녀는 당황하여 비틀거렸다.
그 순간 일 장 떨어진 곳에서 세 명이 왜도와 하나가 돼 공격해 왔다.
―뒤로.
금장생의 전음이 들려오기가 무섭게 상체를 뒤로 젖혀, 발바닥은 바닥에 붙이고 몸은 거의 누운 상태의 철판교 수법을 펼쳤다.
그 순간 붉은 광채가 조금 전 그녀가 있던 공간을 훑었다.
퍽! 퍽! 퍽!
붉은 광채는 자객 세 명의 몸을 뚫었다.
푸스스! 푸스스!
가공할 광경이었다.
붉은 광채를 맞은 자객 세 명은 순식간에 가루로 흩어졌다.
‘엄청나네.’
사미염은 혀를 내둘렀다.
붉은 광채에 그런 엄청난 힘이 내포돼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놀란 건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금장생 또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방금 그가 펼친 건 혈잔이었다. 단 육 성의 힘으로 펼쳤을 뿐인데 자객 세 명을 가루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스윽! 스윽! 스윽!
갑자기 자객들의 기척이 사라졌다.
“좀 쉴 모양입니다.”
금장생은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붉은색 비수가 손안으로 빨려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