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129)
대륙황가가 위치한 곳은 서안 남서쪽의 한중이었다.
대륙황가가 한중에 근거를 마련하게 된 건 지리적 요건 때문이었다.
중원의 젖줄이라 할 수 있는 거대한 강 두 개가 북쪽과 남쪽에서 동서로 흐르고 있는데, 북쪽 강은 황하고 남쪽 강은 장강이다. 한중은 그 두 강의 중간 지점에 위치해 있어 예로부터 교통의 요충지로 중요하게 평가되었다.
역사적으로도 한나라의 고조인 유방이 이곳에서 권토중래하여 한 제국을 세웠는데, 한나라의 한漢이 이곳 한중이란 이름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서안에서 한중으로 가기 위해서는 진령산맥이라는 거대한 산을 넘어야 한다.
금장생과 아수수는 남서쪽으로 향했다.
서안에서 한중으로 가는 길은 육로를 통해 사천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통로다. 길이 험난하다는 뜻으로 촉도난이라 부르지만, 유일한 길이다 보니 마을과 객잔이 발달해 있다.
하지만 진령산맥으로 들어서자 인가는 물론이고 객잔도 나오지 않았다.
세 사람은 계곡 입구에서 밤을 맞고 말았다.
“이 길은 처음입니까?”
금장생은 아수수를 보며 물었다.
“당신은 날 데리고 간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그랬군요. 아무튼 이렇게 된 거, 야영할 곳을 찾아보도록 하죠. 두 분은 여기 계십시오.”
금장생은 몸을 날렸다.
아수수와 사미염은 한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디까지 갔어?”
사미염은 물었다.
“뭐가?”
“둘 사이 말이야.”
“우린 서로 계약을 했을 뿐이야.”
“어떤 계약?”
“그는 대가를 받고 날 도와주기로 했어.”
“어떤 대간데?”
“돈이야.”
“얼마를 달라고 했는데?”
“자기가 알아서 가져가겠대.”
“어떻게 알아서 가져간다는 건데?”
“그건 나도 몰라. 아무튼 그가 조건을 수락한 건 대륙황가의 주인이 서천왕부라는 내 말 때문이었어.”
“그러니까 오직 돈 때문이라는 거네?”
“응.”
“그 말을 믿어?”
“처음엔 안 믿었는데 지금은 믿어.”
“왜?”
“그가 가장 좋아하는 게 돈이라는 걸 알았거든.”
“정말로 돈을 가장 좋아한다는 거야?”
“번쩍이는 금화와 함께하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대. 심지어는 여자와 돈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자신은 무조건 돈이래.”
“별종이네?”
“어째 실망스러운 얼굴이네?”
“나는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된 줄 알았거든.”
“나는 아직 그이를 사랑해.”
“하지만 죽었잖아. 죽은 사람의 추억을 붙들고 살기엔 너는 너무 젊고.”
“시간이 더 흐르면 모르지만 지금은 아냐.”
“그런데…….”
사미염은 아수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왜?”
“천장에 너희 둘을 감시하는 자들이 있었잖아.”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는데?”
“백팔무영비 비주가 나야. 그 정돈 알고 있어야지. 처음엔 너희는 감시하는 자들을 모르는 줄 알았어.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다 알고 있더라고.”
“지, 지금 어느 날 봤다고 그랬어?”
아수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지금 내가 궁금한 건 너희는 감시당한다는 걸 알면서도 행동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는 거야. 그건 곧 감시자들에 대해 일부러 모른 척했다는 걸 뜻해. 그런데 이번엔 어떻게 했느냐는 거지.”
“알고 싶은 게 정확하게 뭔데?”
“내가 알고 싶은 건 둘이 함께 목욕을 했느냐는 거지.”
“안 했어.”
아수수는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
사미염은 아수수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수수는 천성적으로 거짓말을 못한다. 아니, 거짓말을 하긴 하는데 표시가 금방 난다.
그녀가 거짓말을 하면 눈동자가 불안하게 좌우로 움직이고 콧구멍을 실룩실룩한다. 지금 그녀의 표정이 그랬다.
“지, 진짜라니까?”
“거짓말이 아니라면서 말은 왜 더듬는데?”
“네, 네가 자꾸 몰아붙이니까 그러지.”
“네가 그러니까 안 잤다는 말도 거짓말 같은데…….”
사미염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나중에 깨달은 거지만 적천영이 아수수를 택한 건 저런 천진난만함 때문이었다. 서른다섯 살을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수수는 여전히 여린 감성의 소유자였다.
“감시자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목욕은 함께 했지만. 정말로 잠은 안 잤어.”
“그럴 줄 알았어.”
사미염은 빙긋 웃었다.
“정말이야. 믿어 줘.”
“알아, 네가 거짓말을 못한다는 거. 그러니까 믿어 줄게.”
사미염은 뒤편 바위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물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참이야?”
적천영 본인이 아니라면 언젠가는 떠날 게 분명하다. 가짜가 떠나고 난 후 아수수가 어떻게 할 건지 알고 싶었다.
“마가는 최초로 여자를 마왕으로 모시게 될 겁니다.”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금장생이 다가왔다.
‘기절하겠군.’
사미염은 경악했다.
그녀는 아수수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귀는 열어 두었다. 금장생이 다가오면 대화를 멈추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금장생이 바로 앞까지 다가온 것이다.
‘자객술이야. 그리고 중원 무공도 아니고.’
그녀는 내심 중얼거렸다.
중원을 제외한 변방에서 최강의 자객술을 보유한 곳은 동영이다.
‘설마 혈가 무인?’
그녀가 아는 한 동영 최강 무공을 보유한 단체는 혈가다.
‘그건 차차 알아보면 될 테고.’
“가솔들이 여자 마왕을 인정할 거라고 보세요?”
사미염은 금장생을 보며 물었다.
“마가를 이끌어 갈 사람이 한 사람뿐이라면 선택의 여지가 없지 않겠습니까.”
“마가를 이끌어 갈 사람이 한 사람뿐이라는 건 무슨 뜻이죠?”
“적씨 성을 가진 사람은 장수원의 적순우 할머니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곧 적지영 일행을 다 죽이겠다는 거네요?”
“길은 깨끗한 게 좋잖아요.”
“그들을 다 죽이면 적씨 전통이 깨지게 되고, 다른 성씨들이 마왕이 되겠다고 할 수도 있어요.”
“사 비주가 수수 옆에 서 있으면 감히 그런 마음을 먹는 자들은 절대 나오지 않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내가 도와줄 거라고 생각하는가 보죠?”
“네.”
“내가 수수를 도와줘야 할 이유가 있다고 보세요?”
“두 분은 서로가 유일한 친구인 걸로 압니다.”
“그 유일한 친구에게 난 사랑하는 정인을 빼앗겼어요.”
“빼앗긴 게 아니라 적천영 그 사람이 수수를 선택했지요.”
“어찌 됐든 결과는 같아요. 나는 극심한 상실감으로 인해 머리가 다 빠졌고, 뼈가 앙상하게 드러날 정도로 살이 빠졌어요. 만일 두 분 할머니가 없었더라면 나는 죽었을 거예요.”
“이제 두 사람이 갈라설 수밖에 없었던 원인을 제공했던 사람이 없어졌으니까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 있잖아요.”
“그게 가능할 거라고 보세요?”
“아직 서로를 사랑하니까 충분히 가능할 거라고 봅니다. 그리고 물건 하나가 더해지면 두 분의 우정은 더욱 돈독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금장생은 아수수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아수수는 사미염 앞으로 살인마후 사예린의 백팔살인류百八殺人流와 연검 사류死流를 내려놓았다.
“이게…… 뭐지?”
사미염은 의아한 얼굴로 비급과 연검을 보았다.
무공과 무기라는 건 그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걸 왜 자신에게 주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비급 제목을 봐.”
아수수가 말했다.
“제목이라고?”
사미염은 비급 첫 장을 넘겼다.
백팔살인류.
사미염은 고개를 갸웃했다. 많이 들어 본 무공 이름이었다. 그런데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이 연검 이름은 사류야.”
아수수가 연검을 가리키며 말했다.
“사류라면…… 헉!”
사미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류라는 말을 듣자 비로소 백팔살인류란 무공이 생각났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가문이 배출한 가장 위대한 무인인 살인마후 사예린 선조의 무공이었다.
“정말 그분 게 맞아?”
사미염은 믿기지 않는 얼굴로 물었다.
“사예린 그분, 관문에 도전하지 않았어?”
“우리 가문에도 그분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아. 다만 최강의 무공을 창안한 무인으로만 기록돼 있어.”
“너희 가문도 마찬가지구나.”
문득 육전수가 떠올랐다.
그의 가문에서도 광검 육잔능이 관문에 도전한 사실을 비밀에 부쳤다. 그런데 사미염의 가문도 그렇게 한 모양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아, 아냐.”
아수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이걸 얻은 장소가…….”
“이 사람이 팔전에 도전했다는 건 알지?”
“아니.”
사미염은 고개를 저었다.
“서천왕부 사람들은 대부분 알고 있는데 너는 아직 모르는 모양이네.”
“그 소문이 장수원까지는 들어오지 않았어.”
“그래서 고모할머니가 그 부분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으셨던 거였구나.”
“그 사실을 알았다면 기뻐했을 텐데.”
사미염은 다음 장을 볼 요량으로 책장을 들췄다.
이제 넘기기만 하면 백팔살인류의 내용이 나올 것이다.
“그걸 넘기기 전에 약속부터 해야 합니다.”
금장생의 말이 그녀의 손을 막았다.
사미염은 고개를 들어 금장생을 보았다.
“그분은 구백오십 년 전 사람입니다. 소유권을 주장하기엔 너무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니까 이걸 보기 위해서는 수수에게 고개를 숙여야 한다는 건가요?”
“거래는 확실히 해야 한다는 게 제 신좁니다.”
“수수와 난 친구예요.”
“공과 사만 구분한다면 친구라도 주종 관계를 맺지 말라는 법이 없다고 봅니다만.”
사미염은 백팔살인류와 아수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나는…….”
“이건 거랩니다, 수수. 거래에는 절대 감정이 개입돼서는 안 됩니다. 감정적으로, 즉흥적으로 맺은 거래는 반드시 깨지게 돼 있습니다. 거래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이성적인 상태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거고, 서로에게 얼마나 득이 되느냐 하는 겁니다.”
금장생이 아수수의 말을 잘랐다.
“내가 수수의 종이 되면 무슨 이익이 있죠?”
사미염이 물었다.
“사 비주가 얻을 건 백팔살인류와 사류, 그리고 장차 마가의 이인자 자립니다.”
“이인자?”
사미염의 시선이 아수수에게로 향했다.
이인자 자리라면 손해 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속을 터놓을 사람이 없어.”
아수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도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사미염이 말했다.
“말하세요.”
“아뇨. 내 조건은 나중에 말할게요.”
“들어주기 어려운 조건이면…….”
“절대 그런 건 아니에요. 그리고 그 조건을 이행할 사람은 수수가 아니라 당신이에요.”
“나라고요?”
“네.”
“장례를 지내는 것 말고는 특별히 해 줄 만한 게 없는 사람이 난데.”
금장생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뭐라고요?”
“아닙니다. 세 가지만 빼면 들어 드리겠습니다.”
“말하세요.”
“첫째 돈을 달라는 것, 둘째 제 목숨을 달라는 것, 셋째 제 행동에 제약을 줄 수 있는 거라면 어떤 것도 안 됩니다.”
“그런 건 없을 거예요.”
“좋습니다. 그럼 거래는 성립됐습니다. 미리 말씀드리자면, 백팔살인류는 수수도 암기하고 있습니다.”
“그랬군요. 그럼 당신은?”
“그걸 비급으로 꾸민 사람이 접니다.”
“혹시 다 익히 거 아니에요?”
“설마요. 제가 무슨 천재라고 그 어려운 걸 다 익히겠습니까.”
금장생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그는 백팔살인류를 거의 완벽할 정도로 익히고 있었다. 그건 백팔살인류의 주인인 사예린의 귀신이 전수해 준 덕분이었다.
사예린은 글로 기술하기 힘든 부분까지 전부 말해 주었다.
물론 자기 후예에게 전해 달라고 그랬겠지만, 금장생은 그런 것들은 비급에 적지 않았다.
“그런데 왜 다 익혔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드는 거죠?”
“내가 다 익혔다면 사 비주는 한번 보면 완성할 수 있을 겁니다. 그보다 이제 의식을 치러야죠?”
“알았어요.”
사미염은 곧바로 아수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맹세를 했다.
“살인사가殺人司家 가주 사미염은 아수수 마왕께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합니다. 이 맹세는 마왕이 저를 내치지 않는 이상 제가 죽을 때까지 지켜질 겁니다.”
“고마워요, 사 가주. 이 은혜 절대 잊지 않을게요.”
아수수는 사미염의 손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