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가-128화 (128/524)

황금가 (128)

무혼은 유리관 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유리관 안에는 검은 옷을 입은 시체가 들어 있었다.

시실 처음엔 그 친구의 말을 믿지 않았다.

‘계약하겠다!’라고 외치기만 하면 다른 세상에서 새로운 신분으로 살 수 있다는 말을 믿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런데 그의 말은 사실로 드러났고, 훗날 ‘그랜드 크로스’라는 위대한 역사로 기록된, 갈릭 드 무혼 황제의 전설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 전설 역시 삼천 년 역사 속으로 묻혔고, 마족에게 영혼을 팔았던 자신은 그녀들의 노력으로 부활했다.

“빌어먹을!”

무혼의 입에서 욕설이 비어져 나왔다.

두 번째 삶은, 아니 세 번째 삶은 무혼으로 살았던 중원에서의 삶보다 더 힘들었다.

망가진 육체를 다시 만들고 무공을 익혔다. 그리고 잊혔던 역사를 되살리고 영광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무혼은 품속에서 곱게 접힌 종이를 꺼냈다. 번들거리는 광채가 날 정도로 손때가 묻은 그것은 편지였다.

무혼은 편지를 펼쳤다.

수백 번도 더 보았던 글씨체가 나타났다.

자기야!

훗!

제겐 여전히 어색한 단어네요.

하지만 꼭 한번 불러 보고 싶었답니다.

아니, 마음속으로는 수백 번도 더 불렀을 겁니다.

당신이, 이 편지를 보게 될지 어떨지 모릅니다.

아마 십중팔구는 보지 못하겠지요.

하지만 쓰고 싶습니다.

차가운 동체 말고는 남길 게 없어 그런가 봅니다.

5천 년 하고도 35년.

당신을 만나기 전 제가 살아온 세월입니다.

하지만, 그 5천 년의 세월보다 당신과 함께하였던 5년의 세월이 더욱 길었습니다.

지겨웠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공간에서 하루하루 당신을 기다렸던 세월이 길었다는 의미입니다.

5천 년 이상의 세월을 홀로 살았다는 의미입니다.

5년을 5천 년처럼 산 사람은 아마 저밖에 없을 겁니다.

당신을 만나 그렇게 살았습니다.

당신 덕분에 5년을 5천 년처럼 살았습니다.

님이시여.

떠남을 슬퍼하지 마세요.

숙명으로 만났기에 헤어짐이 더욱 애달프지만, 우리의 삶에서 헤어짐은 한 단편에 불과할 뿐입니다.

당신의 영혼이 나를 기억하고.

내 영혼 속에 당신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그 흔적은 너무도 선명하여 신조차도 지우지 못할 겁니다.

신을 뛰어넘는 유일한 마법이 그것입니다.

그 마법을 당신과 나는 익혔습니다.

샤이칸드리아 대륙에 펼쳤습니다.

많은 것들이 떠오릅니다.

샤먼 마을에서 당신과 함께 보았던 에메랄드빛 바다가.

당신과 함께 보았던 레드문이 기억납니다.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웠던 폭풍의 바다 속 전경이.

당신과 함께 달렸던 마룬 성국이.

추억으로 자리한 수많은 나날이.

제 영혼에 켜켜이 쌓여 있습니다.

그러한 추억과 함께 가기에 전, 외롭지 않습니다.

아니, 외로울 시간조차 없을 겁니다.

당신과 함께 쌓았던 그 추억을 다 펼쳐 보려면.

5천 년의 세월로도 부족할 겁니다.

부디, 천천히 오시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아스로부터

무혼의 눈가가 촉촉이 젖었다.

샤이칸드리아 대륙 시간으로는 삼천 년이 흘렀다. 그때의 무혼과 얼굴과 몸은 바뀌었지만 여전히 아스가 그립다.

“크로노마스!”

무혼의 전신에서 진득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그 살기가 얼마나 강한지 팔꿈치로 짚고 있던 탁자가 가루로 흩어졌다.

부활한 건 자신만이 아니었다.

같은 운명을 타고난 도플갱어인 크로노마스도 어둠을 뚫고 부활했다. 그리고 놈은 아스의 영혼을 거머쥐었다.

‘지금은 네놈의 말을 듣겠다, 크로노마스. 하지만 반드시 찾을 것이다. 그래서…….’

무혼은 벌떡 일어났다.

스윽!

그때 어둠을 뚫고 누군가가 다가왔다.

그는 수왕가의 수장인 백리장광이었다.

백리장광은 무혼 앞으로 와 고개를 숙였다.

“다녀왔습니다.”

“어떤 상황이냐?”

“제가 떠날 때와 별다른 변화가 없었습니다.”

“여전히 춘추오팬가 하는 자들은 중원의 주인을 자처하고 있고, 팔왕가는 암중에서 활동하고 있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마맹의 후예는 찾지 못했느냐?”

“청부를 넣어 놨습니다. 후예가 있다면 반드시 걸려들게 돼 있습니다.”

“아니다, 내 생각은 다르다.”

“뭐가 다르단 말씀이십니까?”

“지금 너와 내가 있는 이곳을 누가 만들었다고 생각하느냐?”

“초창기 때 중원으로 넘어왔던 선조들이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누군가가 우연히 이곳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건…….”

“더구나 그잔 이곳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발견한 게 아니라 알던 장소란 말입니까?”

“내 생각은 그렇다. 그리고 맹주 철무황을 죽인 것 또한 그들의 생각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구마에게 맹주 말고 다른 상관이 있었단 말입니까?”

“아무리 이인자라고 해도 수장을 없앤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백리장광. 더구나 그 상관이 문도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사람이라면 더욱 어렵다. 그런데 구마는 맹주를 살해하고도 자리를 보존했을 뿐 아니라, 구마 중 네 명이 이곳에서 죽었다. 보통 그 정도면 조직이 와해된다. 하지만 그들은 쟁천비무에까지 참가했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그럼 대공 전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 생각은, 마맹은 어떤 거대 조직의 하수인에 불과했다는 거다.”

“그렇다면 거대 조직은 아직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겠군요.”

“삼천 년이 흐른 샤이칸드리아 대륙에서는 불가능하겠지만 삼백 년밖에 흐르지 않은 이곳 중원에서는 가능하다고 본다.”

“그 점을 주의하면서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팔왕가는 십 년에 한 번씩 천왕지회를 연다고 하였고, 올해도 열린다고 하였느냐?”

“그렇습니다.”

“만일 말이다, 내가 해왕 자격으로 참석하여 팔왕이 되면 나를 따를 거라 보느냐?”

“어떤 일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거라 봅니다.”

“만일 중원을 상대로 전쟁을 한다면?”

“그렇다면 무조건 지지하지는 않을 겁니다.”

“본인들에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찬성하지 않을 거다?”

“팔왕가는, 지금은 많이 변질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우리와의 전쟁을 통해 성장한 가문들입니다. 게다가 그들의 선조는 우리의 노예였습니다. 마왕보다 더 강한 화왕이나 제가 팔왕이 되지 못했던 건, 알게 모르게 그런 이유가 작용한 걸로 봅니다.”

“나머지 왕들이 너와 화왕이 방문자들의 후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거냐?”

“공식적으로 밝힌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너나 화왕 그자 근처에 숨겨 둔 첩자들을 통해 정보를 입수했을 거란 말이구나.”

“그렇습니다.”

“화왕은 어떤 자냐?”

“그게…….”

백리장광을 말끝을 흐렸다.

“첩자를 심지 않은 거냐?”

“심었습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태어난 곳도 모르고, 부모가 누군지, 어디서 성장했는지, 어떤 경로를 통해 무인이 됐는지, 어떤 무공을 익혔는지, 심지어 나이가 몇 살인지조차도 모릅니다.”

“드러난 게 아무것도 없지만 확실한 건 절대 강자라는 것과 방문자의 후예라는 사실뿐이란 말이구나.”

“그렇습니다.”

백리장광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우선 팔왕가를 접수하도록 한다.”

무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곳은 전지기지로 삼는다. 대륙에서 넘어온 병사들은 먼저 이곳에서 중원에 대한 교육을 받고 그다음에 낙양으로 가기로 한다. 바타르!”

무혼은 뒤편을 향해 소리쳤다.

“불렀느냐?”

모자와 상하의가 하나로 이어진 특이한 옷을 걸친 자가 무혼 옆으로 다가왔다.

샤이칸드리아 대륙에서는 그 옷을 로브라고 부르고, 모자는 로브 후드라고 불렀다. 사내는 로브 후드를 깊게 눌러써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알아보았느냐?”

“샤이칸드리아 대륙보다 마나양이 적게 분포돼 있어 이동 마법진 설치는 불가능하다.”

“이곳에도 진식이라는 게 있다. 진식으로 풍운조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하였다.”

중원의 진식도 천 년 이상 유지되는 것도 있다고 하였다. 그런 진식이 구축되는 곳이면 이동 마법진도 충분히 구축 가능할 것 같았다.

“이동 마법진은 마법 중에서 가장 마나 소모가 많고 고차원적인 마법 중 하나다. 중원의 진식 같은 것과 비교하는 건 무리다.”

“안 된다는 말이구나.”

“그렇다.”

“만일 마나석처럼 마나가 고도로 농축된 물체를 사용하면 어떻게 되느냐?”

“이동 마법진 하나 정도는 어떻게 가능할지도 모른다.”

“이곳에서 낙양 진가장까지 이동 마법진을 설치할 생각인데 가능할 거라고 보느냐?”

“우리가 가진 마나석을 전부 사용한다면 간신히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완전한 성능은 보장 못 한다.”

“그렇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바로 시작해라.”

“알았다.”

바타르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할 말 있느냐?”

바타르는 고개를 돌려 무혼을 보았다.

“이건 개인적인 질문인데 저 시체…… 복구 가능할까?”

무혼은 유리관 안에 누워 있는 자신의 몸을 가리켰다.

“저 몸으로 돌아가고 싶은 거냐?”

“가능하다면.”

“암흑오라로 복구는 가능할 거다. 하지만 영혼을 옮기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일단 복구만 해 주면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하겠다.”

“큰 기대는 하지 마라.”

“고맙다.”

“천만에.”

바타르는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

무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제 가실 겁니까?”

백리장광이 무혼을 보며 물었다.

“먼저 이곳에 맞게 몸을 만든 다음에 떠나야지.”

무혼은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그가 도착한 곳은 살아남기 위해 발악했던 그 석옥이었다. 석옥 벽에는 이화태양강, 빙극천월강, 선풍마강, 반쪽의 양극신공이 적혀 있었다.

그는 손을 쭉 내밀었다. 손바닥에서 새하얀 광채가 흘러나오 벽면으로 스며들어 갔다.

푸스스!

이어 가루가 떨어지고 글이 사라졌다.

석옥을 나온 무혼은 다시 걸었다.

그리고 얼마 후 도착한 곳은 커다란 건물 안이었다.

무혼은 내부를 둘러보았다. 과거에 이곳을 지나쳐 지하로 들어갔던 기억이 났다.

그는 첩지가 쌓여 있는 한가운데 탁자로 갔다.

그곳에서 몇 장의 첩지를 보았다. 그중 한 장을 집어 들었다.

구 년 전 데려온 무혼은 전대 맹주의 피를 이었음이 밝혀졌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내 이야기였네.”

무혼은 피식 웃었다. 그것 말고도 몇 장이 더 있었다.

“마신체라…… 본래 몸으로 돌아갈 이유가 더 확실해졌군.”

그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처음엔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을 목적으로 원래 몸을 돌아가려 했다. 그런데 지금은 무혼의 정체성이 아니라 마신체라는 체질 때문에 반드시 본래 몸을 되찾을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아직 돌아갈 방법을 모른다.

“대륙과 중원을 다 뒤지면 나오겠지.”

그는 내부를 가로질러 아래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갔다.

“이건?”

무혼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사실 그의 양극신공은 완벽한 상태가 아니었다. 타인의 육신에 기생한 상태라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갈릭의 육신으로 들어갔을 때 아무런 부작용이 없었던 건 도플갱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육신은 다르다. 그 결과 양극신공은 구 성의 경지밖에 이르지 못했다.

이곳에 있는 빙한담이나 열양천을 이용하면 좀 더 높은 경지까지 끌어 올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들어왔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열양천과 빙한담은 이미 평범한 우물로 변해 있었다. 누군가가 두 샘의 정수를 뽑아 가 버렸다는 뜻이다.

“내 무덤을 만들어 준 잔가 보네.”

무혼은 물속에 손을 집어넣어 보았다.

약간 차갑기는 했지만 그건 계절 탓이지 빙한담이라 그런 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지.”

무혼은 그 자리에 가부좌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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