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127)
뇌신
“당신도 함께 가요?”
금장생은 옷을 입으며 물었다.
그 앞 침대 위에는 태극선의와 암왕칠구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이번의 공식 일정은 저와의 여행이에요.”
“여행을 자주 갔어요?”
“그건 아니에요.”
“그런데 함께 여행을 간다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우린 아이가 없잖아요.”
“아이요? 그럼 고모할머니가…….”
“저것도 챙겨 가야 해요.”
아수수는 적순우가 준 약을 가리켰다.
“아이를 갖기 위한 여행이 되는 건가요?”
“맞아요. 하지만 진짜 목적은 대륙황가 방문이에요.”
그랬다.
금장생과 아수수가 옷을 챙겨 입고 있는 건 대륙황가를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승천비무 전 대륙황가를 방문하는 건 마왕의 비밀 일정 중 하나였다.
“그렇군요.”
금장생은 무복을 입고 태극선의를 걸쳤다. 이제 암왕칠구를 각 부분에 집어넣을 참이었다.
그가 가장 먼저 집어 든 건 뇌령雷靈이었다.
‘어?’
뇌령을 바라보던 금장생의 눈이 커졌다.
비석 모양의 뇌령에는 오호뇌령과 총소만령이란 글이 앞면과 뒷면에 새겨져 있다. 그런데 글에서 광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왜 그러세요?”
아수수가 금장생이 들고 있는 뇌령으로 시선을 주며 물었다.
“이거 어때요?”
금장생은 뇌령을 아수수에게 보여 주었다.
“이상한 점이 있냐고 묻는 건가요?”
“네.”
“비석 같아서 약간 찜찜한 걸 빼면 그다지…….”
“여기서 흘러나오는 광채가 안 보인다고요?”
금장생은 오호뇌령이란 글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바로 그때였다.
휘이익!
손가락을 통해 강한 기운이 흘러들어 오는 것 같더니 금장생 눈앞에 새카만 공간이 나타났다.
‘어?’
금장생의 눈이 커졌다.
스아악!
갑자기 바람이 불어와 금장생의 몸을 검은 공간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금장생은 끌려들어 가지 않으려고 힘을 써 보았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다.
‘여긴?’
금장생은 좌우를 둘러보았다.
새카만 어둠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파앗!
갑자기 그 앞에서 푸른 광채가 솟구쳤다. 마치 따라오라는 것처럼 광채는 길게 이어지며 통로를 형성했다.
금장생은 광채로 이루어진 통로를 걸어갔다.
잠시 후 그는 특이한 장소에 이르렀다.
하늘은 시퍼런 뇌전으로 가득 차 있고, 쩍쩍 갈라진 바닥에서도 푸른 광채가 솟구쳐 나왔다.
푸아악! 푸아악! 푸아악!
수십 줄기의 뇌전이 지면을 향해 내리꽂혔다.
스아악!
그 순간 푸른 뇌전의 하늘이 열리는 것 같더니 뭔가가 튀어나왔다.
길이가 십 장에 달하고 온몸이 번들거리는 광채로 뒤덮인 그것은 뇌룡이었다.
그런데 뇌룡만 나오는 게 아니었다.
용에 이어 거대한 덩치의 사내가 나왔다.
오른손에 뇌창雷槍을 들고 갑옷을 입고 투구를 썼는데, 키는 얼마 전 철전제일문에서 보았던 마신만큼 컸다.
그는 금장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누구십니까?’
시선이 마주치자 금장생은 머릿속으로 물었다.
하지만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시선이 부딪친 순간 의사가 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뇌신雷神이다.
놀랍게도 사념이 전해져 왔다.
‘뇌신이라고요?’
―아직 멀었다.
‘뭐가 멀었다는 겁니까?’
―아직 멀었다.
“상공!”
갑자기 아수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검은 공간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상공!”
아수수는 금장생을 흔들어 깨웠다.
뇌령에 손가락을 대던 금장생이 갑자기 정신을 잃은 사람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숨도 쉬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
금장생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뇌령을 보았다. 그리고 손가락을 뗐다가 다시 붙여 보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검은 공간이 나타나지 않았다.
“왜 그래요?”
아수수는 물었다.
“아, 아닙니다.”
금장생은 얼른 손을 뗐다.
뇌신이 말한 것처럼 아직 먼 모양이었다.
그는 뇌령을 심장 앞주머니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나머지 법기도 원래 자리로 집어넣었다.
“나는 뭔 일 난지 알았어요.”
“제게 무슨 일 있었어요?”
“움직이지도 않고 숨도 쉬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랬군요.”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물었다.
“옷은 다 입었어요?”
“네. 저것만 챙기면 돼요.”
아수수는 적순우가 준 약을 가리켰다.
금장생은 약을 궤짝 안에 집어넣고 걸머졌다. 궤짝 안에는 두 사람의 옷가지를 비롯하여 여행용품이 들어 있었다.
가벼운 것들 위주로 집어넣어 별로 무겁지는 않았다.
“가요.”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왔다.
서천전 앞에는 거석을 비롯한 왕부삼웅과 사마영이 서 있었다.
“짐 이리 주십시오.”
거석은 금장생이 지고 있는 궤짝을 내려 어깨에 걸머졌다.
“할 말 있습니다.”
금장생은 네 사람을 보며 말했다.
“먼저 마차에 오르십시오.”
거석은 마차를 가리켰다.
“이번 여행은…….”
―정문 앞에서 이야기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금장생이 이야기를 하려고 하자 아수수가 전음을 보냈다.
―그게 낫겠네요.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차에 올랐다.
마차는 빠르게 달렸다.
조금 전 겪었던 일에 대해 생각하는 사이, 마차는 정문에 당도했다.
금장생과 아수수는 마차에서 내렸다.
“다녀오십시오.”
“잘 다녀오십시오.”
네 사람은 금장생과 아수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어?”
금장생은 의아한 얼굴로 네 사람을 보았다.
함께 가겠다고 떼를 써야 정상적인 상황이다. 그래서 설득할 핑계도 몇 가지 만들어 왔다.
그런데 둘만 가겠다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잘 다녀오라고 고개를 숙인다.
“왜 그러십니까?”
뇌웅 유공이 물었다.
“함께 가겠다고 법석을 떨어야 하지 않나 해서요.”
“원래는 마왕께서 따라오지 말라고 명령을 내린다고 해도 쫓아갈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장수원 원주님께서, 따라갔다가 소주님이 생기지 않으면 우리 책임이라고 하시는 바람에…….”
“고모할머니를 만났어요?”
“원주님을 만난 게 아니라 어떤 분이 전해 주는 말을 들었습니다.”
“누구로부터 들었다는…….”
아수수가 금장생의 옆구리를 찔렀다.
금장생은 아수수를 돌아보았다.
아수수는 턱으로 길을 가리켰다.
“알았습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짐을 받아 들고는 길을 향해 걸어갔다.
두 사람이 멀어지는데도 거석 일행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무슨 꿍꿍이속이 있는 거 아닐까요?”
금장생은 불안한 얼굴로 아수수를 돌아보며 물었다.
“우리가 마음먹으면 저들을 떨쳐 내는 건 일도 아니잖아요.”
“그렇긴 합니다만.”
“가기나 해요.”
“알았습니다.”
두 사람은 부지런히 걸었다.
거석 일행이 따라오지 않은 이유를 알게 된 건 서천왕부를 벗어나 관도로 들어선 후였다.
커다란 바위 옆에서 무복을 걸친 여자가 걸어 나왔다.
“어?”
아수수는 놀란 눈으로 여자를 보았다.
그녀는 바로 백팔무영비 비주 암화 사미염이었다.
“네가 여긴…….”
“내가 호위를 서기로 했어.”
“우린 우리 몸 정도는 충분히…….”
―저자가 마왕보다 더 강하다고 생각되진 않는데, 내가 잘못 생각한 거야?
사미염은 전음으로 물었다.
‘헉!’
아수수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사미염이 금장생이 가짜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왜 그러십니까?
아수수의 변화를 알아챈 금장생이 전음으로 물었다.
그런데 그의 입술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펼친 건 전음보다 한 차원 높은 혜광심어였다.
너무 큰 충격을 받은 아수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저 여자가 제 정체를 알아차린 겁니까?
아수수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모할머니께 말했을까요?
이번에 아수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금장생의 몸에서 서늘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살인멸구를 할 생각이라면 포기하는 게 좋아.
사미염은 아수수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전음을 보냈다.
아수수는 오른손을 살짝 들어 금장생에게 하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고는 사미염을 살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사미염이 의심스러워 한번 찔러본 건지, 아니면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한 건지에 대한 확인이다.
‘확신이야.’
아수수는 갈등 어린 시선으로 사미염을 보았다.
사미염과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다. 비록 동시에 같은 사내를 사랑하면서 멀어지긴 했지만, 서로의 성격은 누구보다 잘 안다.
사미염은 추측이 아니라 가짜라는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처리는 내가 하죠.”
아수수의 내심을 읽어 낸 금장생의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붉은색 검을 꺼냈다.
“날 우습게…… 헉!”
사미염의 눈이 커졌다.
조금 전만 해도 금장생은 그저 그런 무인이었다. 아니, 마왕보다 더 약했으면 약했지 강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돼 있다. 온몸을 내리누르는 압력에 숨조차 쉬기 힘들 지경이었다.
“수수!”
금장생은 아수수를 불렀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면 한 번 펼치는 데 오 갑자의 공력이 필요하다는 혈잔의 위력을 처음으로 확인해 볼 참이었다.
“휴우!”
아수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말했다.
“아니에요. 아무리 야망에 눈이 멀었다고 해도 가장 친한 친구를 없앨 수는 없어요.”
“배신은 늘 가장 믿었던 사람에게 당하는 법입니다. 그리고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은 아예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금장생은 여전히 기운을 거두지 않으며 말했다.
“제 유일한 친구예요.”
“알았습니다.”
금장생은 기운을 거둬들였다.
“휴우!”
이번에는 사미염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녀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어떻게 알았지?”
아수수는 사미염을 보며 물었다.
“손금.”
“손금?”
“마왕의 손금이 일자라는 걸 몰랐어?”
“알고 있었어. 하지만 그이는 다른 사람과 비슷하게 그리고 다녔어. 내 기억으로는 일자 손금이란 사실을 누군가에게 들킨 적이 한 번도 없었어.”
“마왕이 가짜 손금을 그리기 시작한 게 나 때문이었다면 해명이 될까?”
“미염 너 때문이었다고?”
“맞아. 내가 마왕의 일자 손금에 대해 알게 된 건 어릴 때였어. 그때 나는 한창 자객 수업 중이었어. 마왕은 이복누나와 형들에게 구박을 받고 다녔고. 그는 내게 일자 손금을 보여 주며 언젠가는 그것 때문에 누나와 형들에게 괴롭힘을 당할 게 분명하다고 하소연을 했어. 그때는 나는 구박을 덜 당하려면 능력을 숨겨야 한다고 하였고, 자신을 숨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남들이 알아차릴 수 있는 특징을 없애는 거라는 자객 이론을 설명해 주었어. 그 후로 그는 절대 일자 손금을 내보이지 않았어.”
“그랬구나.”
아수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왕은…….”
“그이가 남긴 마지막 흔적을 찾았어. 시신이라도 찾을 생각에 북망산으로 갔다가 저분을 만났어.”
아수수는 눈빛으로 금장생을 가리켰다.
사실대로 말하고 협조해 달라고 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은데…….”
금장생은 얼굴을 찌푸렸다.
“날 그렇게 죽이고 싶어요?”
사미염은 금장생을 노려보았다.
“제가 가장 싫어하는 건 이도 저도 아닌 상황이거든요. 사 소저 때문에 마음 졸이고 사느니 깔끔하게 정리하고 편하게 자는 게 더 좋습니다.”
“나는 뭐 꿔다 놓은 보릿자룬 줄 아세요?”
“제가 마음먹으면 설사 신이라고 해도 죽습니다, 소저. 절대 살아날 수 없습니다.”
부르르!
속삭이듯 말하는 금장생의 말에 사미염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그녀는 금장생을 쏘아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당신…… 자객이군요?”
하지만 금장생은 대답이 없었다.
다만 긍정인지 부정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한 미소만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