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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가-126화 (126/524)

황금가 (126)

대륙황가의 소유자가 서천왕부임에도 불구하고 양측은 내왕이 거의 없었다. 그 사실을 비밀로 하기 위해서였다.

마왕은 대부분 외유를 가장해 대륙황가를 방문할 뿐, 공식적인 방문은 일절 없다.

다만 일 년에 한 번 대륙황가에 알리고 방문을 하는데, 결산 업무 보고를 받기 위해서다.

그 또한 서천왕부와 대륙황가 수뇌들만 알 뿐 나머지 가솔들은 전혀 모른다. 심지어 마왕의 외유마저도 비밀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륙황가가 서천왕부 소유라는 걸 알고 있는 이들이 얼마나 있습니까?”

금장생은 아수수에게 물었다.

지금 금장생은 외출하기 위해 옷을 입는 중이었다.

“공식적으로는 네 명만 알고 있어요.”

“저와 적씨 삼형제만 알고 있는 사실이란 말이군요.”

“네. 하지만 나도 알고 있어요.”

“말을 해 준 겁니까?”

“혼인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당신만 알고 있으시오.’라고 하더니 말해 주었어요.”

“풋!”

금장생은 피식 웃었다.

“왜요?”

“비밀이 풍문으로 변하는 가장 결정적인 말이 바로 ‘너만 알고 있어야 해.’라는 말이거든요.”

“호호호! 나도 그 말에는 동의해요.”

아수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이나 남편에게 말했다고 가정하면 최소한 열 명은 알고 있겠네요.”

“그렇겠네요.”

두 사람은 마주 보며 웃었다.

“그런데 지금 어디 가는 거죠?”

아침을 먹고 옷을 챙겨 입은 건 외출해야 한다는 아수수의 말 때문이었다.

“당신에게는 적씨 삼형제 말고도 가족이 있어요.”

“다른 가족이 있다고요?”

“네. 고모할머니가 아직 살아 계세요.”

“고모할머니라면 나이가 꽤 되셨을 텐데.”

“여든두 살이세요.”

“그렇군요. 그런데 그분이 어디 있다는 거죠?”

“우리 서천왕부는 일흔 살이 넘으면 현역에서 은퇴하여 장수원으로 가서 살아요.”

“그분이 거기 계세요?”

“네.”

“장수원에는 총 몇 분이 있는데요?”

“서른 분이 있어요.”

“그렇군요.”

금장생은 아수수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밖에는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마차에 오르자 바로 출발했다.

장수원은 북천장 북쪽 장수산이란 이름의 산 속에 위치한 커다란 목장 형태였다. 수만 평 초지에 수십 마리 말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초지 끝자락에는 은행나무 숲이 조성돼 있었는데, 그 안쪽에 건물 몇 채가 서 있었다.

장수원 건물인 모양이었다.

“이런 곳도 있네요.”

장수원은 전형적인 은퇴지의 모습이었다.

“멋지죠?”

“네.”

잠시 후 두 사람을 태운 마차는 좌우측에 은행나무가 서 있는 길로 들어섰다. 나무들은 상당히 컸다.

“은행나무들 수령이 가장 적은 게 오백 년이라고 해요.”

“장수원의 역사가 그만큼 깊다는 거네요?”

“네.”

“도착했습니다.”

그때 거석의 목소리가 들려오며 문이 열렸다.

금장생과 아수수는 마차에서 내렸다.

마차가 멈춰 선 곳은 아주 오래된 석조 건물 앞이었다. 그 건물은 커다란 은행나무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은행나무에서 떨어진 낙엽으로 주변은 온통 노랑 물결을 이루었다. 바닥도 푹신했다.

“좋네요.”

금장생은 싱긋 웃었다.

“여기 오면 마음이 포근해져요.”

“그럴 수밖에 없는 전경이잖습니까. 가시죠.”

“네.”

두 사람은 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따스한 기운이 두 사람을 맞았다. 대전 한가운데 놓인 화로에서 흘러나온 온기였다.

“어서 오십시오.”

노인 한 명이 금장생과 아수수를 맞았다.

“그동안 평안하셨습니까?”

금장생은 인사를 했다.

“……날 아십니까?”

노인은 금장생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모릅니다.”

“그런데 인사말이…….”

“전에는 알았을 거 아닙니까.”

“허허허! 그렇군요. 아무튼 기억을 못 하다고 하니까 다시 소개할 수밖에 없겠습니다그려. 나는 마자홍입니다, 마왕.”

“반갑습니다. 그런데 마광추 대협과는 어떻게 되는 사이입니까?”

“마광추?”

“네.”

“내가 마광추의 아버지라는 걸 어떻게 아셨소?”

“두 분이 많이 닮았습니다.”

“그 녀석과 내가 닮았다고요?”

“네.”

“설마요. 그 못생긴 녀석과 제가 닮았다는 건 나도 못생겼다는 건데. 그건 욕입니다, 욕. 아니, 모욕입니다, 마왕.”

“하하하! 영감님이 마광추 그 친구보다 조금 낫습니다.”

금장생은 웃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마왕.”

“그 영감탱이와는 말을 섞지 않는 게 좋습니다, 마왕.”

약간은 차가운 듯한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

금장생은 고개를 돌렸다.

궁장을 입은 노파 두 명이 이편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노파란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걸음걸이가 당당했다.

오른편 차가운 인상의 노인은 적천영의 고모할머니인 적순우였다.

적순우는 성격이 불같고,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무기를 뽑아 공격할 정도로 성격이 급했다. 혈파파血婆婆라는 별호가 달리 생겨난 게 아니었다.

적순우 옆에는 키가 상당히 큰 노파가 서 있었는데 그녀의 특징은 검은 머리였다. 온화한 인상의 이 노파는 살후殺后라는 별호로 불렸던 사사봉이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고모할머니.”

아수수가 백발 노파를 향해 먼저 인사를 했다.

“그래, 오랜만이구나. 그런데 둘만 온 거냐?”

적순우는 뭔가를 찾는 것처럼 아수수와 금장생 뒤를 살폈다.

“네?”

아수수의 눈이 커졌다.

“저번에 왔을 때 다음에 올 때는 내 종손자와 함께 오기로 약속하지 않았느냐?”

“아! 네. 그러니까…….”

아수수는 말끝을 흐렸다. 이제야 적순우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달은 탓이었다.

“노력은 하고 있는 게냐?”

“그, 그게, 이이가 실종되는 바람에…….”

“그동안 줄곧 따로 잤다는 말이구나.”

“네.”

“하면 요즘은 두 배로 노력하고 있겠구나.”

“그, 그렇습니다, 고모할머니.”

아수수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자, 자! 서서 이러지 말고 앉자고.”

사사봉이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먼저 절부터 받으십시오, 할머니.”

금장생이 적순우를 보며 말했다.

“절?”

“네.”

금장생은 아수수를 보았다. 그리고 적순우를 향해 절을 올렸다.

“그래, 그동안 고생 많았다.”

적순우는 절을 하고 일어난 금장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기억을 잃지 않았느냐는 말을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잘 아는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차차 알아 가면 되겠지요. 그러다가 운이 좋으면 기억을 찾을지도 모르고요.”

“그, 그래.”

적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고모할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어떤 겁니까?”

“음식?”

“네.”

“보내 주지 않아도 된다.”

적순우는 금장생이 음식을 보내려는 의도인 줄 알았다.

“보내 드리려고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럼?”

“수수에게 좀 먹이려고 그럽니다.”

“네 안사람에게 먹인다고?”

적순우와 사사봉의 눈이 커졌다.

“그래야 수수도 두 분처럼 곱게 나이를 먹을 것 아닙니까?”

“뭐라고?”

“두 분을 처음 봤을 때 아가씨들이 장수원에 왜 있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 아가씨?”

적순우는 황당한 얼굴로 금장생을 보았다.

“제가 유부남만 아니었다면 두 분께 좋은 찻집에 가서 차 한잔하자고 했을 겁니다.”

“호호호! 하하하!”

“호호호!”

적순우와 사사봉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들어가자꾸나.”

적순우는 금장생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네 사람은 차를 앞에 두고 앉았다.

“어디 편찮은 데는 없으십니까?”

금장생은 두 사람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온몸이 쑤시고 아프구나.”

적순우가 대답했다.

“바로 약을 지어 오겠습니다. 증상을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내 병은 약으로 치료가 불가능하단다.”

“그럼?”

“종손자만 보면 바로 낫는 병이란다.”

“걱정 마십시오, 고모할머니. 지금보다 두 배, 세 배 노력해서 내년엔 반드시 종손자를 안겨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약속할 수 있겠느냐?”

“절 믿으십시오, 고모할머니.”

금장생은 자신 있는 얼굴로 말했다.

“미염아, 내 방에 가면 보자기에 싸 놓은 게 있을 거야. 그거 가지고 나와라!”

적순우는 안쪽을 향해 소리쳤다.

“미염이가 여기 있어요?”

아수수는 놀란 얼굴로 물었다.

“얼마 전부터 여기 와서 우리 밥을 해 주고 있구나.”

“밥을 해 줘요?”

아수수의 눈이 더욱 커졌다.

그녀가 아는 사미염은 밥 같은 걸 할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그렇구나.”

적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키가 큰 여자가 보자기로 싼 뭔가를 들고 나왔다.

수수하게 차려입은 옷만으로는 가려지지 않을 정도로 미인이었다.

이 여자가 백팔무영비 비주 암화暗花 사미염이었다.

사미염이 이곳에 자주 놀러 오는 건 사사봉이 바로 그녀의 할머니이기 때문이었다.

“오랜만이에요, 두 분.”

사미염은 아수수와 금장생을 보며 묵례를 했다.

“오랜만이야.”

아수수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미염이 너도 앉아라.”

사미염이 보자기를 올려놓자 적순우가 말했다.

“네.”

사미염은 사사봉 옆으로 앉았다.

“이건 내가 준비한 선물이다.”

적순우는 보자기를 금장생 앞으로 밀었다.

“선물요?”

금장생은 의아한 얼굴로 적순우를 보았다.

“그 약을 먹고 여섯 달 안에 아기가 들어서지 않으면 약값을 돌려주겠다고 하더구나.”

“그, 그러니까 이게…….”

“두 사람이 다 복용해야 한다고 하더구나. 남男이라고 쓰인 건 네가 먹고 여女라는 글씨가 씌어 있는 건 아가가 먹으면 된다.”

“굳이 이런 약이 없어도…….”

금장생의 얼굴이 슬쩍 일그러졌다.

“의원 말이 사내는 마흔 살이 넘으면 성욕이 감퇴하고, 자식을 낳을 수 있는 기능 또한 급격하게 떨어진다고 하더구나. 아이를 갖고 싶으면 가급적 일을 줄이고 휴식을 많이 취하면서 둘만의 시간을 많이 가지라는 말도 덧붙이더구나.”

“전 아직…….”

“알았습니다, 고모할머니. 매일 복용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복용 시간이 따로 있는지요.”

아수수가 금장생의 말을 잘랐다.

“잠자기 반 시진 전에 복용하면 된다.”

“알았어요. 꼭 복용할게요.”

“소우라고 지었다.”

“네?”

느닷없는 적순우의 말에 아수수의 눈이 커졌다.

“내 종손자 이름 말이다.”

“버, 벌써 이름을 지어 놓으셨어요?”

“내가 소우라는 이름을 지은 건 십 년 전이다.”

“세상에…….”

아수수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녀는 적순우가 그렇게까지 종손자를 기다리고 있는 줄은 몰랐다.

“적정 마십시오, 할머니. 피땀 나게 노력해서 반드시 소우를 안겨 드리겠습니다.”

금장생은 자신 있게 말했다.

“킥!”

듣고 있던 사미염이 피식 웃었다.

피땀 나게 노력하겠다고 말하는 금장생의 얼굴이 너무 진지했던 탓이다.

마치 전쟁에 나가서 반드시 승리하고 돌아오겠다고 말하는 장수 얼굴 같았다.

“참! 우리 아직 인사 전이죠? 전 적천영입니다.”

금장생은 사미염에게 손을 내밀었다.

“저는 사미염이에요. 여기 있는 이분의 손녀고요.”

사미염은 사사봉을 가리켰다. 그리고 금장생의 손을 잡기 위해 오른손을 내밀었다.

‘응?’

손을 잡기 직전 금장생의 손바닥을 본 사미염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 아니에요.”

사미염은 고개를 저으며 금장생의 손을 잡았다.

금장생의 손을 잡고 있는 사미염의 머릿속에 손바닥 하나가 떠올랐다. 그건 손바닥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일자 손금을 가진 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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