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125)
“이, 이건?”
제갈휴는 당황한 얼굴로 공문을 내려다보았다.
서천전에서 내려온 공문이었는데, 맨 아래쪽에 마왕의 직인이 찍혀 있었다.
공문에는 이미 제출한 입출금관리 대장을 확인한 결과 백만 냥이 누락됐다며, 당장 소명 자료를 제출하라고 돼 있었다.
“우리 장부만으로는 백만 냥이 누락된 걸 찾아낼 수 없습니다.”
제갈휴는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놈은 우리 장부뿐만이 아니라 대륙황가를 제외한 모든 사업체의 장부를 전부 확인했대.”
“그 장부를 검토해서 백만 냥을 횡령한 사실을 찾아냈다는 겁니까?”
“그런가 봐. 그런데 완벽하다고 하지 않았어?”
“구 할 이상 완벽한 건 맞습니다. 하지만…….”
“하지만이라는 건 무슨 뜻이지?”
“재무제표를 완벽하게 볼 줄 아는 전문가를 만나면 들킬 수밖에 없습니다.”
“그놈이 전문가라는 거야?”
“백만 냥을 찾아냈으니까 그렇다고 봐야겠죠.”
“이젠 어떻게 하지?”
똑! 똑! 똑!
바로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냐?”
적지영은 밖을 향해 소리쳤다.
“우립니다, 누님.”
“들어와!”
문이 열리고 적풍영과 적운영이 들어왔다.
그들의 손에도 제갈휴가 들고 있는 것과 같은 공문이 들려 있었다.
“너희도 그놈이 보낸 공문을 받은 게냐?”
적지영은 물었다.
“그럼 누님도?”
“누님도?”
두 사람의 시선이 제갈휴가 들고 있는 공문으로 향했다.
“얼마냐?”
“저는 칠십만 냥입니다.”
“저는 오십만 냥입니다.”
적풍영과 적운영이 차례로 대답했다.
“정확한 금액이냐?”
적지영은 적풍영을 보았다.
“네.”
적풍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이번엔 적운영을 보았다.
“네.”
적운영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놈이 우리에게 공문을 보냈다는 건 증거를 확보했다는 뜻이겠지?”
“증거도 없이 우리가 횡령했다고 주장하면 형제를 모함하는 것밖에 되지 않을 테니까요.”
적풍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횡령죄에 대한 처벌은 어떻게 되지?”
적지영의 시선이 적운영에게로 향했다.
“금액에 따라 다릅니다.”
“말해 봐.”
“십만 냥 이하의 작은 금액을 횡령할 경우 직위를 박탈하고 재산을 몰수한 후 벌을 내립니다. 투옥 기간은 삼 년에서 오 년 사입니다. 그리고 십만 냥 이상의 금액에 대해서는 직위 박탈과 재산 몰수, 무공 회수 후 추방입니다.”
“무공을 파훼하고 추방한다는 거냐?”
적지영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어졌다.
“네.”
“젠장!”
그녀는 욕설을 내뱉었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만일 횡령 사실이 공론화되면 어떻게 해 볼 수도 없이 당하고 말 게 분명했다.
“우리끼리 긴히 할 말이 있네.”
적풍영은 제갈휴를 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갈휴는 인사를 하고 방에서 나갔다.
적풍영은 제갈휴가 멀어지기를 기다렸다. 그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자 비로소 입을 열었다.
“없애야 합니다.”
“그래서 암흑오마를 보낸 거 아니냐. 하지만 암흑오마는 실패하고 말았다.”
“또 기회가 있습니다.”
“무슨 기회를 말하는 거냐?”
“승천비무가 열리기 전에 놈은 왕부를 나가게 됩니다.”
“어디로 간다는 거냐?”
“이때쯤 마왕은 상단으로 가서 업무 보고를 받습니다.”
“맞아, 상단이 있었지!”
그제야 떠오른 듯 적지영이 소리쳤다.
“맞습니다, 누님. 마왕은 매년 십일월 말이 되면 결산 업무 보고를 받기 위해 대륙황가로 갑니다. 그리고 여기서 대륙황가까지는 사흘이 걸립니다. 경공을 펼치면 시간을 절반으로 줄일 수 있겠지만, 설사 그렇다고 해도 반드시 도중에 하룻밤은 묵어야 합니다.”
“그때를 노려 놈을 없애면 된다는 거구나.”
“네.”
적풍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사인루 측에 놈에 대한 정보를 흘려라.”
“알겠습니다, 누님. 그런데…….”
적풍영은 말끝을 흐렸다.
“왜 그러느냐?”
“그가 너무 깊숙하게 들어온 게 아닌가 해서요.”
“그러니까 휴를 말하는 거냐?”
“네.”
적풍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적지영이 혼자 살기엔 너무 젊다는 것도 알고, 끌린 상대와 자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한다.
그런데 적지영은 제갈휴에게 너무 많은 걸 보여 주는 것 같았다,
“만일 내가 다시 혼인을 한다면 그 상대는 휴가 될 거다.”
“그와 혼인을 할 생각입니까?”
적풍영의 눈이 커졌다.
그는 단 한 번도 제갈휴를 매형으로 생각한 적이 없었다. 단순히 지나가는 바람 정도로 여겼다.
그런데 적지영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우리 사이의 혼인은 내가 아니라 그 사람이 결정할 문제야.”
“누, 누님!”
적풍영은 믿기지 않는 얼굴로 적지영을 불렀다.
“호, 혹시…….”
그녀가 마왕이 되려는 가장 큰 이유가 제갈휴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는 그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 삼십 대는 나이가 좀 많다는 게 큰 흠이 되지 않지만 내 나이가 되면 흠을 넘어 죄악이 돼. 그와 혼인을 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마왕은 돼야 해.”
적지영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맙소사!”
“세상에!”
적풍영과 적운영의 입이 쩍 벌어졌다.
설사 제갈휴에게 그 정도로까지 깊이 빠져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하지만…….”
“나 피곤해.”
적지영은 적풍영의 말을 잘랐다.
“아, 알겠습니다.”
적풍영과 적운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형님!
적운영은 전음으로 적풍영을 불렀다.
―그건 절대 안 된다.
적풍영은 고개를 저었다.
누님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제갈휴를 매형으로 부를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저도 형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상관은 누님 한 명으로 족합니다. 더 이상은 안 됩니다.
―하면?
―누님에겐 미안하지만 제거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급하게 처리하면 누님은 가장 먼저 우리를 의심할 거다.
―지금 당장은 형님과 제 의견이 같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제거는 시간을 두고 천천히 해야 합니다. 누님이 전혀 의심하지 않게요.
―그래야지.
적풍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그 시각, 적풍영과 적운영으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은 제갈휴는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었다.
그는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는데, 그 앞에는 희뿌연 운무가 일렁이고 있었다.
“어떻게 돼 가고 있느냐?”
운무 속에서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적지영은 현 마왕을 가짜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증거는 있느냐?”
“발 크기가 다르다는 것 말고는 따로 없습니다.”
“발 크기?”
“현재 마왕의 발 크기가 전 마왕보다 작다고 합니다.”
“확신한다는 거냐?”
“네.”
“네 생각은 어떠냐? 그 계집의 말이 사실인 것 같으냐?”
“네.”
“네가 조사한 자는 단순히 마가의 가주 마왕이 아니라 우리 여덟 가문의 수장인 팔왕이란 걸 명심해라.”
“알고 있습니다.”
“그럼 그를 가짜라고 했을 때 미칠 파급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겠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가짜라고 하겠느냐?”
“몇 번을 물어도 제 대답은 바뀌지 않습니다. 이런저런 사실을 종합해 볼 때 그자는 가짜가 분명합니다. 문제는…….”
“증거가 없다는 거냐?”
“몰아붙일 방법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 방법은 실패하면 역풍을 맞을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어떤 방법이냐.”
“그건…….”
제갈휴는 전음을 펼쳐 보고했다.
“흠! 그렇구나. 그 계집은 어느 정도 포섭했느냐?”
“그녀가 마왕이 되는 걸 간절히 바라는 이유는 제게 당당하게 청혼을 하기 위해섭니다.”
“그러니까 가짜 마왕만 없으면 그 계집이 마왕에 등극하게 될 테고, 그럼 네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는 거구나.”
“그렇습니다.”
“그 계집이 가짜 마왕을 없애기 위해 사인루에 청부를 했다고 했느냐?”
“그렇습니다.”
“사인루가 성공할 거라고 보느냐?”
“그건…….”
“하긴 네가 알 수 없겠지.”
“조만간 사인루 자객들이 마왕을 공격할 겁니다.”
“조만간이라면 언제를 말하는 거냐?”
“마왕은 십일월 말이 되면 한해 결산 업무 보고를 받기 위해 대륙황가로 갑니다.”
“사인루 자객들도 그때를 노리겠구나.”
“그렇습니다.”
“알았다. 그렇게 보고를 하도록 하마. 특이한 상황이 발생하면 지체하지 말고 곧바로 보고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수고해라.”
아지랑이처럼 일렁거리던 운무가 한순간에 모습을 감췄다.
제갈휴는 운무가 사라진 곳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지금은 당신이 상관이지만, 내가 이곳의 주인이 되는 그날 우리 처지는 바뀔 겁니다. 정반대로 말입니다.”
제갈휴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옷을 벗고 욕조로 들어가 꼼꼼하게 몸을 씻었다. 그런 다음 몸을 닦고 최음제 성분이 들어 있는 액을 적지영이 특별히 좋아하는 위치에 발랐다.
그리고 적지영이 가장 좋아하는 옷으로 갈아입고 방을 나섰다.
그로부터 한 식경 후, 제갈휴는 적지영의 방 앞에 도착하여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적지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갈휴는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적지영 또한 씻은 지 얼마 되지 않는 듯 장미 향이 풍겨 나왔다.
“아까 기분 나쁘지 않았어?”
적지영은 제갈휴의 가슴 속으로 손을 집어넣으며 물었다.
“아까라면…….”
제갈휴는 모른 척 물었다.
“풍영이 나가 있어 달라고 했잖아.”
“아!”
그제야 생각난 듯 제갈휴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적지영은 제갈휴의 요대를 풀었다. 그러자 바지가 흘러내렸다.
“아!”
적지영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제갈휴는 바지 안에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였다.
적지영의 시선이 제갈휴의 하체에 고정돼 떠나질 않았다.
“나는 지영 네 형제가 아니잖아. 그 정도는 얼마든지 참을 수 있어. 참! 말 놔도 되지?”
제갈휴는 적지영의 어깨로 손을 올리며 말했다.
“되, 되고말고요.”
고개를 끄덕이는 적지영의 숨결이 점점 가팔라졌다.
제갈휴가 반말을 하는 것만으로 그녀는 성적인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제갈휴의 반말에 그녀는 공대를 했다.
“진작부터 그렇게 하고 싶었어.”
제갈휴는 적지영의 어깨를 눌렀다. 그러자 적지영은 제갈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제 곧 우리 세상이 올 거야, 지영. 우리 둘만의 세상이.”
제갈휴는 적지영의 머리를 앞으로 끌어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