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124)
일자 손금
마왕이 팔전의 여덟 관문을 통과했다는 소식이 서천왕부 전역으로 전해지긴 했지만 파급력은 크지 않았다. 팔전의 비밀에 대해 아는 자들이 거의 없었던 탓이다.
심지어 팔전에 대해 아는 자들 중 몇몇은 마왕이 굳이 관문을 통과하여 무공 자랑을 할 필요가 있느냐고 하기도 했다.
“실망스러운 결과네요.”
금장생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 건너편에는 아수수가 앉아 있었다.
“당연한 결과예요.”
“왜요?”
“내가內家, 즉 서천왕부 사람들에게 마을은 양민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에 불과하거든요.”
“팔전의 존재를 몰랐다는 건가요?”
“네.”
“양민에 불과한 자들이 만든 관문이 얼마나 대단하겠느냐는 생각을 하겠군요.”
“그래요.”
아수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적지영 일행은 좀 다르지 않을까요?”
“그들은 많이 긴장하고 있을 거예요. 어쩌면 이번 승천비무 때 승부수를 띄울 수도 있고요.”
“승부수라면 뭘 말하는 거죠?”
“승천비무의 마지막은 늘 새로운 마왕의 인사로 끝이 나요.”
“새로운 마왕이라는 건 무슨 뜻이죠?”
“복종 의식을 치러야 한다는 거예요.”
“복종 의식은 뭐죠?”
“마지막 날에 가솔들은 앞으로 십 년 동안 자신들을 다스릴 새로운 마왕을 인정하고 존경하겠다는 복종 의식을 치르게 돼요. 그때 마왕은 가솔들에게 ‘내가 새로운 마왕이 되는데 반대하는 사람은 지금 말하시오!’라는 질문을 하게 되는데…….”
“그때 마왕에게 도전을 할 거란 말인가요?”
“네.”
“그런데 왜 시작할 때 닷새 동안에 도전하지 않고 마지막 날에 도전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시작할 때 도전을 해서 마왕이 바뀌기라도 하면 축제가 엉망으로 돼 버리고 말잖아요.”
“새로운 마왕이 되자마자 축제를 망쳤다는 비난을 면키 어렵다는 뜻이군요.”
“그리고 마지막에 도전해야 극적인 상황을 연출할 수 있잖아요.”
“일리가 있네요. 그런데 지금까지 마왕에게 도전한 전례가 있었어요?”
“그런 가솔이 있었다면 다섯 명이 팔전의 관문으로 들어갔을 리가 없겠지요.”
“단 한 번도 없었다는 말이군요.”
“네.”
“그런데도 도전을 할 거란 건가요?”
“과거에는 명분이 없었지만 이번엔 확실한 명분이 있잖아요.”
“기억을 잃은 가주에게 마가를 맡길 수 없다는 말이군요.”
“맞아요.”
“누가 도전할 거라고 보세요?”
“셋 중 무공이 가장 강한 자는 장남인 적풍영이에요.”
“마왕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적지영 아닌가요?”
“먼저 적풍영이 도전해서 마왕 자리를 차지한 다음 적지영에게 넘겨줄 거예요. 아니면 차례로 도전을 하든가요.”
“그렇군요.”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처에 약 바를 시간이에요.”
암흑일마 역거성의 검탄강기에 당한 부상에 대한 말이었다.
“다 낫지 않았나요?”
금장생은 일어나 옷을 벗으며 말했다.
“다친 지 며칠이나 됐다고 그래요?”
아수수는 눈을 흘겼다.
“누울 때마다 아파서 그러죠.”
금장생은 그 자리에 엎드렸다.
그의 몸에는 천이 친친 감겨 있었다.
아수수는 먼저 물과 수건을 준비했다. 그리고 금창약과 천을 가져와서는 가위로 금장생의 상처를 싸고 있던 천을 잘랐다.
더 이상 진물이 나오지 않은 덕분에 천은 쉽게 떨어졌다.
“벌써 딱지가 생겼어요.”
아수수는 상처를 살짝 찔러 보았다.
금장생은 전날만 해도 움찔움찔했는데 오늘은 아무지 않은 듯 반응이 없었다.
“거의 다 나은 거네요.”
“그런 것 같아요.”
아수수는 수건을 물에 적셔 상처 주변을 닦았다. 상처 때문에 목욕을 할 수 없어 당분간은 이런 식으로 닦아 줄 수밖에 없었다.
엉덩이까지 다 닦고 나자 금장생이 일어나 앉았다.
“일어서세요.”
금장생은 시키는 대로 했다.
아수수는 수건을 다시 물에 적셔 목 아래쪽을 닦았다. 가슴을 닦고 겨드랑이를 닦고 배를 닦았다.
그리고 다시 물에 헹궜다. 이어 배꼽 아래를 닦았다.
그녀의 손이 잠시 멈춘 곳은 성기 앞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성기를 쥐고 들어 올렸다.
금장생은 고개를 돌려 버렸다.
의식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데도 그것만큼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아수수가 성기를 쥐는 순간 그녀의 알몸과 함께 관계를 가졌던 광경이 떠올랐다. 아무런 자극을 주지 않고 잡고만 있을 뿐인데도 그의 성기는 서서히 경도를 높였다.
갑자기 손안이 충만해지자 아수수는 움찔했다.
하지만 그녀가 움찔한 건 아주 짧은 시간에 불과했다. 이내 무시하고 몸을 닦았다.
“죽여야 할 것 같습니다.”
“네?”
아수수는 금장생을 올려다보았다.
“감시하는 자들 말입니다.”
“전에도 말했지만…….”
“죽여 버리면 또 보내겠지만 생포해서 율장에 넘기면 쉽게 보내지 못할 겁니다.”
“율장에서 첩자들을 심문하는 걸 공개해 버린다는 건가요?”
“네.”
“전에 한 명을 생포한 적이 있는데, 심문을 시작하기도 전에 자결하고 말았어요.”
“잡히면 바로 자결하도록 세뇌됐다는 거네요?”
“네. 다 끝났어요. 다시 엎드리세…….”
아수수는 말끝을 흐렸다. 금장생은 엎드리는 게 불가능한 상태였다.
“앉겠습니다.”
금장생은 쪼그려 앉아서 상체를 구부렸다.
“풋!”
아수수는 피식 웃었다.
“날 이렇게 만든 사람이 부인인데 웃으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나는 닦아 주려고 한 죄밖에 없다고요. 혹시 머릿속으로 야한 생각을 한 거 아니에요?”
아수수는 금창약을 발라 주며 말했다.
“제 머릿속은 명경지수처럼 맑았습니다. 음흉한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고요.”
“제가 알기론 음흉한 생각을 하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짧은 시간에 완벽하게 발기한다는 건 불가능해요. 당신은 분명 야한 생각을 했어요. 설마 그 상대가 저는 아니겠죠?”
“윽!”
금장생은 나직하게 비명을 질렀다.
“비명으로 위기를 모면하시려고요?”
“정말 아프단 말입니다.”
“등은 다 끝났으니까 엎드리기나 하세요.”
“이거 참 마왕 체면이…….”
금장생은 엉덩이를 쳐들고 어정쩡하게 엎드렸다. 항문 옆에 난 상처를 바르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엉덩이를 바싹 쳐들고 다리를 벌리자 그의 하체는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처음도 아닌데 너무 부끄러워하는 거 아닌가요?”
“나는 부인처럼 얼굴 가죽이 두껍지 않아서 그런 겁니다.”
“제 낯가죽이 두껍나요?”
“두꺼운 건 아닌데 늙은 닭의 살처럼 질깁니다.”
딱!
“악!”
금장생은 비명을 내지르면서 고개를 처박았다. 그리고 두 손을 사타구니 안쪽으로 집어넣고 고환을 감쌌다.
아수수가 손가락을 오므려 고환 아래쪽을 튕겨 버린 것이다.
“아무리 내 피부가 나이티가 난다고 해도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겁니다, 서방님.”
아수수는 금장생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다고 그렇게 세게 때리면……,”
금장생은 눈물을 찔끔 흘리며 일어났다.
“이제 천은 더 이상 감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금장생이 등을 들이대자 아수수가 말했다.
“며칠만 있으면 편히 잘 수 있겠네요.”
금장생은 옷을 입었다.
“뭐 할 거예요?”
옷을 입고 나자 아수수가 물었다.
“난 일하러 갈 겁니다.”
금장생은 아수수를 보았다.
“전 저녁 준비할게요.”
“저녁 준비를 직접 해요?”
“당신 식사는 내가 준비했어요.”
“그랬군요. 이따 저녁때 봐요.”
금장생은 방을 나와 집무실로 향했다.
그의 집무실 탁자 위에는 두툼한 장부 쉰 권이 놓여 있었다. 각 천장에서 올라온 입출금관리 대장이었다.
각 천장당 열 권씩이었다.
금장생은 먼저 동천장과 북천장 장부를 살폈다.
열 권을 채 보기도 전에 식사 준비가 끝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금장생은 집무실을 나왔다.
식당은 집무실 아래층이었다.
오롯이 마왕과 아수수만을 위한 공간인 듯, 시종이나 시녀도 없었다.
식탁 위에는 음식이 푸짐하게 차려져 있었다.
“와아!”
금장생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이 많은 음식을 혼자 차릴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정말로 혼자 다 한 건가요?”
“상화가 옆에서 거들긴 했지만 대부분 제가 다 했어요.”
“대단하네요.”
금장생은 활짝 웃었다.
집을 나온 지 팔 년이 되어 간다. 그 세월 동안 식당 요리사가 해 주는 밥만 먹었다. 어머니 손길이 느껴지는 밥은 단 한 번도 먹지 못했다.
그런데 아수수가 밥을 해 준 것이다.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음식이 입에 맞으려나 모르겠어요. 앉으세요.”
“맞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금장생은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아수수가 술 한 잔을 따라 주었다. 방 안 가득 퍼져 나갈 정도로 주향은 진했다.
“아직 상처가 다 낫지 않았으니까 많이 마시진 말고 딱 한 잔만 하세요.”
“부인도 한잔하세요.”
금장생은 아수수의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그리고 앞접시에 음식을 덜어 앞에 놓은 후 젓가락으로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아수수는 긴장한 얼굴로 금장생을 보았다.
금장생은 눈을 지그시 감고 음식 맛을 음미했다.
이윽고 오른손이 앞으로 나오더니 엄지가 척 올라갔다.
“최곱니다.”
금장생은 활짝 웃었다.
“휴우! 다행이다.”
그제야 아수수의 얼굴에도 안도의 빛이 떠올랐다.
“건배할까요?”
금장생은 술잔을 들었다.
“좋아요.”
아수수는 환하게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미래를 위하여!”
“위하여!”
두 사람은 술잔을 비웠다.
금장생은 천천히 음식을 먹었다.
그는 앞접시가 비면 다시 음식을 덜었다. 그런 금장생의 모습을 아수수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식사 예절은 그 사람에 대해 많은 걸 알려 준다.
보통 집에서는 앞접시를 사용하지 않는다. 앞접시를 사용할 정도로 식탁이 크지 않을 뿐더러 차려진 음식도 많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자들은 다르다. 그들은 두 개 혹은 세 개의 앞접시를 두고 먹고 싶은 음식을 덜어서 먹는다.
앞접시를 여러 개 두는 이유는 국물 요리나 튀김 요리는 한 접시에 담으면 먹기 곤란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통 집안에서 자란 이들은 젓가락 옆에 놓인 접시가 어떤 용도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금장생은 아주 자연스럽게 앞접시를 사용하고 있다. 게다가 먹는 모습이 경박하지 않다.
그건 제법 산다는 집에서 교육을 받고 자랐다는 걸 뜻한다.
“양, 맛, 분위기 중 어떤 걸 가장 좋아하세요?”
“흠! 저는 양이나 맛보다는 분위기를 더 따집니다.”
“그럴 줄 알았어요.”
아수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한 질문은 음식점에 대한 거였다.
그런데 그는 뜬금없는 질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음식점에 대하 물었다는 걸 알아차리고 분위기라고 대답했다.
식사 예절만으로 보면 금장생은 최상류층 집안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게 분명하다.
“하지만 오늘은 양을 더 따질 겁니다.”
“왜요?”
“음식이 너무 맛있거든요.”
“호호호!”
아수수는 크게 웃었다.
“제가 먹는 모습이 좀 지저분하더라도 이해해 주세요.”
지금까지와 달리 금장생은 빠른 속도로 음식을 입으로 가져갔다. 거의 흡입하는 수준이었다.
음식은 빠르게 줄어들었다.
식사를 시작하고 반 시진이 지났을 때 식탁 위에는 빈 접시와 뼈다귀만 남았다.
“정말 다 먹었네요.”
아수수는 어이없는 얼굴로 말했다.
그녀가 준비한 음식은 칠 인분이 넘는다.
그 칠 인분 중 그녀가 먹은 건 일 인분도 되지 않는다. 음식을 하면서 맛을 본다며 집어먹은 게 많아 이미 배가 불렀던 탓이다.
그렇다면 육 인분이 넘는 음식을 금장생 혼자 다 먹어 치웠다는 게 된다.
“보통 땐 많이 먹지 않는데, 어쩌다가 한번 꽂히면 무자비하게 먹거든요.”
“무자비하게?”
“과거에 저를 알았던 많은 이들이 저를 ‘소’라고 불렀습니다.”
“소요?”
“한 번에 많이 먹고 나중에 되새김질한다고요.”
“호호호! 일리가 있는 말이네요.”
아수수는 활짝 웃었다.
“그런데 너무 안 먹는 거 아니에요?”
“저는 물만 먹어도 살이 찌는 체질이라는 거 알잖아요.”
“살이 찔까 봐 먹고 싶은 걸 못 먹는 거예요?”
“젊은 시절엔 덜했는데 나이를 먹으니까…….”
“내가 보기엔 많이 쳐준다고 해도 이십 대 중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자신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거 아닌가요?”
“피이!”
아수수는 입술을 내밀었다. 하지만 얼굴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빈말이라는 걸 알지만 젊다는 말을 들으니까 기분이 좋았다.
“자! 한 잔 더 해요.”
금장생은 아수수의 술잔을 채워 주었다.
“오늘 밤에도 일할 건가요?”
“벌여 놓은 게 있으니까 마무리 지어야지요.”
“안 자고 기다릴지도 몰라요.”
“가능하면 일찍 들어가도록 해 보겠습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 후로 두 사람은 한 시진 동안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아수수는 침실로, 금장생은 집무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