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가-118화 (118/524)

황금가 (118)

“또 흥분한다.”

“흐음!”

금장생의 말에 역거성은 신음을 내뱉었다.

금장생의 말투는 지극히 공손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뭔가가 있었다.

“흥분을 가라앉히니까 얼마나 좋아요. 그리고 이건 순수한 궁금증인데 말입니다, 지난 사십 년 동안 내공이 금제된 상태였다면 지금처럼 강하지 않을 것 같은데, 혹시 그동안 내공이 금제된 것처럼 남들을 속이고 있었던 건가요?”

아무리 강한 무인이었다고 해도 사십 년 동안 내공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전과 같을 수가 없다.

그런데 저들에게서는 금제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어쩌면 지금까지 내공을 자유롭게 사용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린 처음부터 내공 금제 같은 건 당하지 않았다. 그리고 금원으로 들어간 것도 우리 의지였다.”

“혹시 금원으로 들어갈 때 제 조부님께, 허락이 있기 전까지는 나오지 않겠다고 맹세를 하지 않았나요?”

“……!”

역거성은 금장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랬군요. 그리고 아마 그런 생각도 했을 거예요. 짧으면 이삼 년, 길면 오 년이면 제 조부님이 용서해 줄 거라고요. 내 말이 맞죠?”

“맞다.”

역거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조부님은 당신들을 풀어 주지 않고 숨을 거둬 버렸어요. 물론 당신들에 대한 이야기는 자식들에게 했겠지요. 하지만 차기 마왕이 된 제 부친도 당신들을 풀어 줄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왜 그런지 아세요?”

“너는 그 이유를 아느냐?”

“당신네들 같으면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 친구면서 강호 거물이 다섯 명이나 찾아오면 반갑게 맞아 주겠습니까? 하루 이틀 머물렀다가 떠나는 게 아니고 어른으로 모셔야 한다면요.”

“우리가 부담이 된다는 말이구나.”

“부담 정도가 아니라 시어머니 다섯 명이 동시에 생기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아버지가 당신네들의 존재를 알았는지까지는 모르지만 설사 알았다고 해도 그대로 두었을 겁니다. 무공이 금제된 것도 아니고, 떠나고 싶으면 제 발로 떠날 테니까요. 그런데 당신네들은 금원을 나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왜 나가지 않았는지도 아느냐?”

“당연히 압니다.”

“말해 보아라.”

“당신네들은 금원에서 나가고 싶었지 마가에서 나가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사실 그 나이에 마가를 나가서 뭘 어떻게 하겠어요. 다른 문파를 찾아가 우리가 왕년에 암흑오마로 불렸던 사람인데 자리 하나 만들어 주지, 하고 부탁할 수도 없잖아요. 아무튼 당신네들은 좋든 궂든 마가에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화가 나는데도 꾹 참고 기다렸던 겁니다. 그런데 무려 사십 년 만에 적씨가 찾아온 거예요. 당신네들이 금원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게 했던 그 사람의 손자가 말이에요. 제 말이 맞나요?”

“맞다.”

“그는 당신네들을 아주 잘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마왕을 없애 주면 자유를 주겠다고 해요. 마왕이 가짜라는 증거를 대긴 했는데 그다지 신빙성이 있어 보이진 않았죠. 당신네들은 고민하는 척하죠. 그러면서 마가의 권력 다툼에 끼어들고 싶지 않는다거나, 가짜라는 증거가 너무 약하다는 둥,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면서 난색을 표했을 거예요. 내심으로 이번 기회를 놓치면 죽기 전에 금원을 나갈 수 없을 거라며 조바심을 내면서도 말이죠. 그러다가 결국엔 하겠다고 말하죠.”

“우, 우린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금원을 나올 수 있었다!”

천광오마 남천이 버럭 소리쳤다.

“아닙니다. 당신네들은 적씨의 허락 없이는 절대 금원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적씨가 우리를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당신네들을 막는 건 우리가 아니라 당신네들 자신입니다. 암흑오마의 명예 말입니다.”

역거성을 비롯한 네 명은 할 말이 없었다.

금장생의 말이 틀리지 않다.

그들이 금원을 떠나지 않았던 건 명예 때문이었다. 당당하게 복귀하고 싶었다.

마가의 원로로.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마왕의 허락이 반드시 필요했다.

“이제 여기서 날 죽이면 당신네들에게 청부했던 자들 중 한 명이 마왕이 될 테고, 당신네들은 마왕 측근이 돼 여생 동안 부귀영화를 누리며 명예를 간직한 채로 죽게 될 겁니다. 당신네들이 바라는 게 그거 아닌가요?”

짝! 짝! 짝! 짝!

역거성은 박수를 쳤다.

금장생의 말은 맞았다. 아니, 마치 지켜본 것처럼 정확하다.

“그 박수, 칭찬입니까?”

금장생은 물었다.

“몸은 어느 정도 회복됐느냐?”

역거성은 되물었다.

“제가 일부러 시간을 끌고 있다는 걸 아셨습니까?”

“알고 있었다.”

“그럼 먼저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겠군요. 회복할 시간을 주신 답례로 들개 밥이 되도록 방치하지 않겠습니다. 여기가 명당자리는 아니지만 자손들에게 해가 갈 정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척!

금장생은 왼편 다리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발끝에 힘을 주고 뒤꿈치를 좌우로 돌려 땅을 약간 팠다.

파앗! 파앗! 파앗! 파앗!

그 순간 이제 네 명으로 바뀐 암흑오마가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십 장 높이까지 솟구친 네 명은 금장생과 사공령을 포위하는 형태로 내려섰다.

그런데 네 사람 사이의 간격이 맞지 않았다.

혈해이마 마일청과 철검사마 고적일 사이의 거리가 다른 이들이 늘어선 것보다 두 배나 더 길었다.

그 사실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자는 역거성이었다.

“이건……!”

역거성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자신을 비롯한 암흑오마는 과거 싸울 때 오행합벽진을 펼치곤 했다.

오행합벽진은 한 사람이 일정 방위를 점하고 따로따로 공격하다가 동시에 협공을 할 때 최고의 효과를 발휘한다. 그런데 우문순의 자리가 비어 허점이 생기고 만 것이다.

“저놈이 그걸 계산하고 거왕을 없앴다는 건가?”

역거성은 금장생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금장생은 여전히 같은 자세를 하고 있었다.

―작전을 바꿔야겠네.

역거성은 마일청에게 전음을 보냈다.

―어떻게 말인가?

―거왕이 없어서 과거의 공격 방식대로 할 수가 없네. 각자 빈틈을 노려 공격해야 하네. 그리고 우리 목표는 저 여자가 아니라 마왕이라는 걸 명심하게.

―여자를 공격하다가도 기회가 생기면 저놈을 없애라는 건가?

―그러네.

―알았네. 천광에게는 내가 말하겠네.

―그럼 철검에게는 내가 말하지.

두 사람은 고적일과 남천에게 전음을 보냈다.

전음을 받은 고적일과 남천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하세.

파앗! 파앗! 파앗! 파앗!

역거성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네 사람은 동시에 바닥을 찼다.

네 사람은 가공할 속도로 금장생과 사공령의 주위를 돌았다. 그들의 움직임이 잔상을 남길 정도로 빨라지자 암흑오마는 사라지고 검은색의 선이 생겨났다.

슥!

사공령은 자리를 이동하여 금장생 뒤로 섰다.

“몸은 어때요?”

사공령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지금 반쪽이 아닌 완전한 마왕이 되고 있는 중인데 여기서 개죽음당할 수는 없잖습니까.”

“자신 있다는 말로 받아들여도 되겠군요.”

“궁금한 게 있습니다. 아까 내게 음공을 펼쳤던 철음사 대원들은 나이가 어떻게 됩니까?”

“나이는 왜…….”

“제발 이십 대나 삼십 대 초반이라고 말해 주세요.”

“그러니까 그건 왜…….”

“사십 대나 오십 대라면 제가 너무 초라해질 것 같아서 그러지 왜겠습니까?”

“그러니까…… 풋!”

사공령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금장생의 말은 곧 철음사 대원의 알몸을 보고 성욕을 느꼈다는 뜻이었다.

“몇 살입니까?”

“최소한 마마보다는 더 먹었을 겁니다.”

“그건 사깁니다.”

“호호호!”

사공령은 자신이 포위당했다는 사실도 잊고 웃음을 터뜨렸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타하!”

천광오마 남천이 기합과 함께 사공령에게로 폭사되었다.

그의 움직임은 너무 빨라, 사공령이 도저히 피할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차앗!”

이어 두 번째 기합이 터져 나왔다.

이번에 기합을 내지른 자는 철검사마 고적일이었다.

그자가 노리는 대상은 금장생이었다.

턱!

금장생은 왼팔을 뒤로 돌려 사공령의 등 쪽 요대를 잡았다. 그리고 허공으로 던져 올렸다.

언제 뽑아 들었는지 그의 오른손에는 혈잔이 들려 있었다.

그는 사공령을 집어 던짐과 동시에 몸을 띄우며 혈잔으로 뒤편을 횡으로 그었다.

순간 허공에 붉은 선이 나타났다.

차앙!

날카로운 쇳소리가 터져 나왔다.

혈잔을 통해 반탄력이 쏟아져 들어왔다.

금장생은 반탄력을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힘을 이용해서 자신의 허리를 중심으로 거꾸로 공중제비를 돌았다.

공중제비를 돈 그의 발밑으로 검 한 자루가 스치고 지나갔다. 한발 늦게 공격을 시작했던 철검사마 고적일이었다.

고적일은 자신의 공격이 실패하자 시선을 들어 금장생을 보았다.

그때 금장생은 공중제비를 절반 정도 돈 상태였다. 즉, 다리는 조금 전 머리가 있던 위치에 가 있고 머리는 다리가 있던 위치에 가 있었다.

몸을 쫙 편 건 아니었지만 하늘을 보며 누운 상태였다.

“하아!”

고적일은 기합과 함께 검을 힘껏 걷어 올렸다.

그의 검 끝에서 일 장 길이의 검광이 쭉 튀어나왔다.

그 순간 금장생은 누운 상태에서 아래로 늘어뜨리고 있던 왼손 주먹을 쥐었다. 그의 왼팔이 향한 곳은 고적일의 뒷목이었다.

그사이 고적일의 검은 금장생의 발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죽음을!”

금장생은 두 다리를 벌리면서 나직하게 외쳤다.

슉!

그러자 건틀릿에서 혈반 하나가 고적일의 뒷목으로 파고들었다.

“커억!”

고적일의 동작이 우뚝 멈췄다.

그의 뒷목을 뚫고 들어간 혈반은 몸 내부를 부수면서 항문을 뚫고 나왔다.

그때 고적일의 검은 금장생 사타구니 바로 앞에서 멈춰 있었다.

만일 금장생이 반 초만 늦었어도 당한 쪽은 그가 됐을 것이다.

털썩!

고적일이 검을 놓치며 풀썩 쓰러졌다.

그사이 금장생은 완전히 공중제비를 넘었다. 그리고 바닥에 내려서는 순간 두 다리를 좌우로 벌리며 자세를 낮췄다.

스악!

강한 바람과 함께 검강이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천광오마 남천이 펼친 검강이었다.

검강에 잘린 머리카락 몇 올이 바람에 휘날렸다.

허공을 잘라 가던 남천의 검이 허공에서 우뚝 멈췄다. 그리고 맹렬하게 아래로 떨어졌다.

남천의 검이 노리는 곳은 금장생의 정수리였다.

금장생의 시선이 남천의 머리 위로 향했다.

사공령의 퉁소가 남천의 정수리 위에 있었다.

그리고 남천 뒤에는 마일청이 있었다.

남천은 사공령에게 맡기고 마일청은 그가 잡아야 한다.

문제는 저 위에 있는 역거성이다. 남천과 마일청을 공격하면 나면 역거성의 공격을 피할 수가 없게 된다.

‘지금 기회를 놓치면 우리가 당할 수도 있다.’

금장생은 태극선의를 믿기로 했다.

슉!

결심을 굳힌 순간 혈잔이 금장생의 손을 떠났다.

남천은 훌쩍 뛰어올랐다. 그러자 혈잔은 그의 두 다리 사이로 지나갔다.

마치 단전을 향해 던진 혈잔을 남천이 피해 낸 것처럼 보였다.

남천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이겼…….”

푸욱!

“커억!”

남천의 입에서 비명이 비어져 나왔다.

“윽!”

그리고 또 다른 비명이 남천 뒤에서도 흘러나왔다.

“이건…….”

남천은 어이없는 얼굴로 전면을 보았다.

조금 전 금장생이 허공으로 던져 올린 사공령이 차가운 얼굴로 이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천의 머리에 퉁소를 박아 넣은 사람은 그녀였다.

털썩!

남천은 그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그러자 남천 뒤편의 전경이 드러났다. 거기엔 혈해이마 마일청이 어이없는 얼굴을 한 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단전에서는 피가 콸콸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금장생이 던진 혈잔이 파고든 자리였다.

“우엑!”

금장생은 피를 토하면서 몸을 날렸다.

역거성이 펼친 검탄강기가 그를 향해 유성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바닥에 내려서자마자 곧바로 뒹굴었다. 그리고 공벌레처럼 몸을 웅크렸다.

퍽! 퍼퍽퍽! 퍽!

금장생의 전신에서 둔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커억!”

그의 입에서 쥐어짜는 듯한 비명이 비어져 나왔다.

“타하!”

자신의 공격이 성공했다고 확신한 역거성은 마지막 일격을 가하기 위해 검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금장생의 등을 친 검탄강기의 수는 그가 확인한 것만 해도 일곱 개였다.

파앗!

그 순간 웅크리고 있던 금장생이 튀어 나갔다. 그의 신형의 움직임은 그야말로 전광석화였다.

“헉!”

역거성은 급하게 검을 휘둘렀다.

퍽퍽퍽! 퍽퍽퍽!

하지만 그의 검보다 금장생의 손이 더 빨랐다. 수십 개의 손바닥이 역거성의 전신에 자국을 남겼다.

푸스스! 푸스스!

역거성의 몸 이곳저곳에 구멍이 뚫렸다. 구멍은 손바닥 모양이었다.

“마, 마수魔手!”

역거성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금장생이 펼친 무공은 양극마신만마권의 최강 무공인 마수였다.

“빌어먹을…….”

역거성은 무릎을 꿇었다. 그는 서 있을 힘이 없었다.

“내 생각도 그렇소.”

금장생은 역거성의 검을 빼앗았다. 그리고 사정없이 휘둘렀다.

“크악!”

둥실!

처절한 비명과 함께 역거성의 머리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아이고, 죽겠네.”

금장생은 그 자리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