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116)
지하실에 관문을 마련한 다른 전殿과 달리 동산 정상에 관문을 마련한 건 음공으로 마왕을 시험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른 전처럼 지하에서 음공을 펼치게 되면 지상에서 키우는 동물들이 떼죽음을 당하고 만다.
산 정상에는 특이한 구조물이 서 있었다.
분화구처럼 움푹 들어가 있었는데, 중앙에 한 자 높이의 단이 있고 그 단 주위로 높낮이가 다른 단 백여 개가 무질서하게 늘어서 있었다.
어떤 규칙이 있는 것 같기는 한데 금장생은 그 배열 규칙을 찾아낼 수 없었다.
“저기 가운데가 제자린가요?”
금장생은 한가운데 단을 가리켰다.
“네.”
사공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금전은 어쩌다가 음공을 익히게 된 겁니까?”
“마왕도 보셨겠지만 금전은 짐승을 기르는 곳입니다. 방목하던 짐승을 불러들일 때 주로 사용하는 게 악깁니다. 처음엔 무작정 두들겨서 불러들었는데 점점 발달하여 음률이 되고, 언제부터인가는 음률에 의지를 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음공이 발달한 거였군요.”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계단이 있는 줄 몰랐네요.”
사공령이 가는 곳에는 아래로 향하는 계단이 나 있었다.
금장생과 아수수는 사공령을 따라 내려갔다. 잠시 후 세 사람은 분지 중앙 단 앞에 멈춰 섰다.
“여기가 마왕의 자립니다.”
사공령은 단을 가리켰다.
“정보 같은 거 없습니까?”
금장생은 단 위로 앉으며 물었다.
“저희가 펼치는 음공은 희로애락 네 가지로 구성돼 있습니다.”
“견디지 못하면 어떻게 되죠?”
“다른 관문과 달리 금전제사문은 중간에 멈출 수가 없습니다. 견디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납니다.”
“너무 겁을 주시는 거 아닙니까?”
금장생은 겁먹은 듯한 얼굴로 말했다.
“사실을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그래도 계속하시겠습니까?”
“여기까지 올라온 수고가 아까워서라도 계속 가야지요.”
“알겠습니다.”
사공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주위를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계단 뒤편에서 악기를 든 자들이 걸어 나왔다.
“여자?”
금장생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악기를 하나씩 가지고 나온 악사들은 전부가 여자였다.
게다가 입은 옷도 속이 거의 비치는 나삼이었다. 악기로 교묘하게 중요 부위를 가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발적인 몸매를 다 숨길 수 없었다.
반면에 얼굴은 눈만 남기고 가린 상태였다.
“우리 팔전 중 두 곳의 전사가 여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한 곳은 이미 겪으신 철화사鐵花士고 나머지 한 곳은 우리 금전의 철음사鐵音士입니다.”
“그렇군요.”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철화사는 바늘을 암기로 사용했던 의전의 전사 집단 명칭이었다.
“행운이 함께하길 빌겠습니다.”
사공령은 포권을 취했다.
“힘들면 포기해도 돼요.”
아수수가 금장생을 보며 말했다.
“조금 전에 금노 말이 중간에 멈추는 건 불가능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악사들이야 멈추지 못하겠지만 당신은 빠져나올 수 있잖아요.”
“날 너무 과대평가하는 겁니다.”
“아니에요, 저는 그렇게 믿어요.”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눈을 감고 최근에 습득한 무공들을 떠올렸다.
그가 가장 먼저 떠올린 건 해신 석군왕의 해신마전이었다.
“시작하라!”
바로 그때 사공령의 외침이 들려왔다.
쿵!
누군가가 북을 친 모양이었다.
스스스! 스스스! 스스스!
“응?”
금장생은 이상한 느낌에 깜짝 놀라 눈을 떴다.
희미한 운무가 공간을 채우면서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진식이네.”
금장생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둥둥둥둥둥! 둥둥둥둥!
북소리가 빨라졌다. 그리고 다른 악기 소리가 합쳐졌다.
암기 소리가 공간을 꽉 채우면서 운무가 춤을 추었다.
“좋네.”
금장생은 자신도 모르게 활짝 웃었다.
마치 어린 시절 즐거웠던 때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게 희喜인 모양이네.”
음악을 듣고 있자니 마냥 행복했다.
어느새 그는 들꽃이 한껏 피어난 들판을 뛰놀고 있었다.
저만치 옷 한 벌로 사계절을 버티는 아버지가 있고, 그 옆에는 언제 보아도 포근한 어머니가 웃고 있다. 두 형들은 크게 웃으며 이쪽으로 저쪽으로 달리고 있다.
“집중하면 안 되는데.”
환상이라는 걸 알면서도 빠져나오기가 싫었다. 좀 더 오랫동안 머물고 싶었다.
“하하하! 하하하!”
금장생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는 계속 환상 속을 거닐었다.
둥둥둥둥! 둥둥둥둥둥!
음악이 바뀐 건 한 식경 정도 지닌 후였다.
“윽!”
금장생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느닷없이 고문 현장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여러 명이 한 명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처음엔 온몸이 붉어졌다. 그리고 붉어진 부분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고문하는 자들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뼈란 뼈는 전부 부러뜨렸다.
그들이 몽둥이로 후려칠 때마다 뼈 부러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크아악!”
금장생은 비명을 내질렀다.
두들겨 맞는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다.
“누구에게 배웠는지 말해라!”
“……!”
“말하지 않으면 죽는다! 아니, 죽이지 않는다. 하지만 너는 제발 죽여 달라고 부탁하게 될 것이다!”
퍽! 퍽퍽! 퍽퍽퍽!
“아아악! 으아악!”
쩍 벌어진 입에서 피가 울컥울컥 넘어왔다.
“죽여 버린다! 죽여 버리겠다! 죽인다!”
그의 전신에서 가공할 살기가 쏟아져 나왔다.
퍽! 퍽퍽! 퍽퍽퍽! 퍽퍽!
“말하라!”
“네놈에게 뇌섬류를 전수해 준 자가 누구냐?”
“말하라!”
“모른다.”
“모르면 죽는다!”
퍽! 퍽퍽퍽!
“아아악! 으아악! 죽여라! 죽여라! 죽이란 말이다!”
“죽이지 않는다. 네가 털어놓을 때가지 죽이지 않는다. 이놈은 손톱과 발톱을 전부 뽑아라!”
“크아악! 아악!”
금장생의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 비명과 함께 움찔움찔 떨었다.
그의 양 손가락은 앉아 있는 바위를 죽어라 움켜쥐고 있었다.
내공도 끌어 올리지 못하는 상태인 듯, 바위 바닥을 후벼 판 손가락 끝은 피투성이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의 손은 계속해서 바닥을 긁었다.
금장생의 비명은 진식 외부에 있는 사공령과 아수수에게까지 들릴 정도로 컸다.
두 사람은 계단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건?”
사공령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왜 그러세요?”
아수수 역시 사공령과 다르지 않았다.
비명이 들려오는 시점부터 그녀의 얼굴은 잔뜩 굳었다.
“사실 마왕에게 겁을 주긴 했지만 희로애락은 저렇게까지 힘든 음공이 아닙니다.”
“그게 무슨 소리죠?”
“평탄한 삶을 산 사람은 희로애喜怒哀까지는 문제없이 넘길 수 있습니다. 다만 락樂은 색色을 시험하는 관문이라 약간 어려울 줄 알았는데…….”
“시작부터 꼬였다는 건가요?”
“지금 연주되고 있는 음악은 놉怒니다. 저렇게까지 영향을 받을 줄은…….”
“저분은 마왕이 된 후로 늘 암살의 위협에 시달려 왔어요. 평탄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는 없죠.”
“그렇다고 해도 저건 너무 심합니다. 저 정도 반응은 완전히 밑바닥까지 가 본 사람에게서만 나올 수 있습니다. 마왕을 발견한 곳이 낙양의 빈민가라고 하셨습니까?”
“네.”
“아무래도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나 봅니다.”
“그렇다고 해도 저건…….”
“사실 희로애락은 짐승을 부리기 위해 작곡된 거라 내공이 강하다고 해서 막아 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한번 빠져들게 되면 내공을 끌어 올릴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견뎌 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멈추는 건 불가능한가요?”
“그럼 실패로 끝나게 됩니다.”
“크아악! 으아아악!”
가슴을 후벼 파는 듯한 비명이 쉬지 않고 흘러나왔다.
아수수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사실 그녀는 금장생의 과거를 전혀 모른다. 자객으로 보이는 자들이 찾아오긴 했지만, 귀티가 나는 얼굴로만 보면 큰 고생을 한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데 사공령의 말로는 별것 아닌 음공에 허물어지고 만 것이다.
“아아악! 아아악! 죽여라! 날 죽이란 말이다. 제발 죽여 줘. 제발! 제발 누군가 날 좀 죽여 주란 말이다, 제발!”
“더 이상 안 되겠어요. 그만, 그만해요.”
아수수는 엉엉 울면서 귀를 틀어막았다.
더 이상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금장생이 내지른 비명은 상상을 통해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그가 실제로 겪은 일이었다.
“알겠습니…….”
“엉엉! 어허헝! 엉엉!”
느닷없이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노怒가 지나간 것 같습니다.”
“네?”
“울고 있다는 건 애哀에 접어들었다는 뜻입니다.”
“애는 어렵지 않나요?”
“쉽진 않겠지만 노보다는 나을 겁니다. 문제는 애哀가 아니라 락樂입니다.”
사공령의 말대로였다.
탈진할 때까지 우는 걸로 끝났다.
그런데 음악이 바뀌면서 놀라운 광경이 나타났다.
사방에서 여자들이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그들은 속이 비치는 나삼을 입고 면사로 얼굴을 가린 채였다.
금장생은 여자들의 춤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헉!”
춤에 취해 있던 금장생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느닷없이 내기가 외부로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환상 속 여자들이 추는 춤은 유혹이 아니라 죽음의 춤이었다.
금장생은 황망히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내기를 끌어 올렸다.
“이럴 수가?”
그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어떻게 된 일인지 내기가 끌어 올려지지 않았다.
‘안 돼!’
그는 얼른 심호흡을 해 몸 내부를 안정시켰다.
그러자 빠져나가는 내기의 양이 줄어들었다.
‘현혹되지 않아야 하는 거네.’
해법은 찾았지만 그렇게 한다는 게 쉽지 않았다.
여자들의 춤은 점점 노골적으로 변했고, 맨살이 드러나는 부위도 많아졌다. 그럴 때마다 금장생의 호흡은 더욱 거칠어졌다.
“우엑!”
자신과의 싸움은 결국 내상으로 이어졌다.
금장생은 쉴 새 없이 피를 토했다. 턱과 가슴이 피투성이로 변해 갔다.
그리고 한 식경 후 드디어 음악이 끝이 났다.
“제길!”
금장생은 풀썩 쓰러졌다.
“끝났습니다.”
휙!
사공령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수수는 몸을 날렸다.
그사이 진식이 해제되고 전경이 드러났다.
악기를 연주하던 여자들은 대부분 알몸이었다. 다만 면사는 그대로 쓰고 있었다.
금장생이 환상 속에서 보았던 여자들이 바로 악사들이었다.
악사들 대부분은 입가에 피를 흘리고 있었다.
음공을 펼치다가 내상을 입은 탓이었다.
그녀들은 그 자리에서 가부좌를 하고는 소주천을 했다. 그렇게라도 응급처치를 해 두어야 내상이 심해지는 걸 막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들이 소주천으로 응급처치를 하고 있는 사이 사공령과 아수수가 내려왔다.
사공령은 악사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잠시 후 하나둘 눈을 떴다.
“괜찮은 게냐?”
사공령은 물었다.
“네.”
악사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옷을 입고 도열하도록 해라.”
“네.”
악사들은 벗어 두었던 옷을 입고 단에서 내려와 줄을 맞춰 섰다.
“상공!”
아수수는 금장생의 맥문으로 내기를 주입하면서 불렀다.
금장생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 눈물이 주렁주렁 맺혔다. 금장생의 몰골 때문이었다.
손가락 끝은 온통 피투성이고, 대부분의 손톱은 절반 이상 부러져 살이 드러나 있었다. 입과 턱과 가슴은 피로 흥건하게 젖어 악전고투의 흔적이 역력했다.
“끝났습니까?”
금장생은 눈을 뜨며 물었다.
“네.”
“다행이군요.”
금장생은 아래로 내려와 사공령 앞에 섰다.
“철음사 사주 사공령,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마왕.”
사공령은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인사드립니다, 마왕!”
이어 철음사 대원 일백 명이 허리를 숙이며 소리쳤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끔찍한 경험이었습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