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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가-115화 (115/524)

황금가 (115)

통로 앞은 옹기를 만들 때 사용하는 흙더미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공터였다.

그곳에는 옹촌의 촌장 창해를 비롯한 노인 백여 명이 서 있었다.

“마왕을 뵙니다!”

가장 먼저 창해가 크게 소리쳤다.

“마왕을 뵙습니다!”

이어 창해 뒤편에 서 있던 노인들이 소리치며 고개를 숙였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이제 인사도 끝났으니까 입을 걸 좀 가져다주는 게 어떻습니까?”

금장생은 창해를 보며 말했다.

“마마께 연락을 했으니까 바로 올 겁니다.”

“상공!”

창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수수가 달려왔다.

금장생에게 옷을 내밀려던 그녀의 손이 우뚝 멈췄다.

“왜 그러십니까?”

금장생은 물었다.

“먼저 씻어야 할 것 같아요.”

“씻어요?”

금장생은 자신의 몸을 살펴보았다.

“끙!”

아수수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화로 안에 있던 그을음이 묻은 상태에서 땀을 흘리는 바람에 온몸이 검게 변해 있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마왕!”

금장생과 아수수는 창해를 따라갔다.

안내받은 방은 옹기의 재료인 황토로 만든 황토방이었다.

방 가운데에는 커다란 옹기 두 개가 욕조처럼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 안에는 물이 가득 차 있었는데, 이미 데워 놓은 듯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이틀 동안 한숨도 못 잔 것 같은데 씻고 좀 쉬십시오. 피로를 푸는 덴 황토물 목욕과 황토방 취침이 최곱니다.”

“감사합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옹기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들어가자 바닥에 가라앉았던 황토가 올라오면서 흙탕물로 변했다.

“먼저 황토물에 한 식경 동안 몸을 담그고 깨끗한 물로 행군 후 황토방에 누우시면 됩니다.”

창해는 목욕하는 법까지 가르쳐 주었다.

“옹노 피부가 좋은 이유가 황토물 때문인가 보군요.”

금장생은 몸에 묻은 그을음 자국을 벅벅 문지르며 말했다.

옹노의 피부가 좋다는 건 빈말이 아니었다. 나이를 상당히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옹노의 피부는 어린아이처럼 좋았다.

“잘 아시는군요. 등도 엉망이니까 그건 마마님께 닦아 달라고 하십시오. 그리고 잘 때도 맨몸으로 자야 효과가 배가됩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창해는 밖으로 나가서 문을 닫았다.

“등 밀어 드려요?”

아수수가 금장생 곁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이거 조두가 필요 없네요. 황토 가루로 박박 문지르면 다 닦여요.”

“아무튼…….”

아수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옷을 벗고 옹기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여긴 서천전 침실이 아닌데…….”

“나도 옹노처럼 고운 피부를 갖고 싶어서 그래요. 그리고 당신 때문에 거의 잠을 못 자서 피곤하고요.”

“그렇다고 벗고 들어오는 건……?”

“목욕은 벗고 하는 거잖아요. 잡아먹지 않을 테니까 등이나 대세요.”

“알았습니다.”

금장생은 돌아앉았다.

아수수는 바닥에 가라앉은 황토를 떠 금장생의 등을 박박 문질렀다.

“신기하네요.”

아수수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금장생의 말처럼 조두를 바른 것처럼 그을음이 닦여 나갔다. 게다가 피부도 부드러워진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등에 묻은 그을음은 금세 닦여 나갔다.

“서 봐요.”

“네?”

“아직 안 닦인 곳이 있나 보게요.”

금장생은 몸을 일으켰다.

아수수는 꼼꼼하게 살피다가 검은 자국이 남아 있으면 닦아 주었다.

“다 된 것 같아요.”

다 씻고 나자 금장생은 황토로 머리를 감았다. 그리고 욕조 벽에 머리를 기대고 누웠다.

그사이 아수수도 몸을 씻고 머리를 감은 후 금장생 옆 옹기 욕조 벽에 머리를 기대고 누웠다.

“황토가 몸에 좋다는 건 맞나 봐요.”

몸이 개운해지는 것 같은 기분에 아수수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요.”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관문은 조금만 쉬었다가 하세요.”

“안 그래도 그럴 참입니다.”

“혈월마검은 철노에게 줬어요.”

“광검 육잔능이 선조 맞대요?”

“맞는데 족보에서 지워 버렸대요.”

“왜요?”

“마왕의 부하가 됐다는 게 그 이유래요.”

“그들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네요. 관문으로 들어간 것도 몰랐대요?”

“네.”

“그렇군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살인마후 사예린의 후예는 짐작 가는 사람이 있어요.”

“누군데요?”

“우리 서천왕부에는 백팔무영비라고 부르는 자객 조직이 있어요.”

“그럼 그들 속에?”

“백팔무영비 비주 이름이 사미염이에요.”

“서천왕부의 유일한 사씬가요?”

“마을까지 확장하던 더 있을지도 모르지만 안에서는 유일한 사미염이 사씨예요.”

“서로 잘 아는 사인가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왠지 잘 아는 사일 것 같다는 기분이 들어서요.”

“잘 아는 사이가 아니라 연적이었어요.”

“연적?”

“당신을 놔두고 경쟁했어요. 결국 당신의 선택은 나였고요.”

“혼인한 후로 전혀 만나지 않았어요?”

“아뇨. 가끔 술도 함께 마시곤 해요.”

“둘이?”

“네.”

“술에 독이라도 타면 어떻게 하려고요.”

“독을 타는 것보다 첩실 자리라도 달라고 하는 게 훨씬 나은 방법일걸요.”

“그럼 그것 때문에?”

“그녀의 내심은 나도 몰라요. 내심이 어떻든 간에 그녀와 나는 어느새 친구가 됐어요. 나이도 같거든요.”

“몇 살인데요?”

“제 나이 몰라요?”

“네.”

“서른다섯 살이에요. 생일은 십이월 말이고요.”

“그랬군요.”

“나이 많이 먹었죠?”

“생각보다 많습니다.”

“생각보다 많다는 건 무슨 뜻이죠?”

“몸매만으로는 이십 대 후반으로 보았거든요.”

“풋!”

금장생의 말에 아수수는 피식 웃었다. 입에 발린 소리라는 게 확연하게 느껴졌다.

“왜요?”

“거짓말을 못하는 것까지 닮은 것 같아서요.”

“그는 거짓말을 했을지 모르지만 전 아닙니다. 그리고 전 저쪽으로 넘어가겠습니다.”

금장생은 옆 욕조로 넘어갔다. 그리고 머리를 헹구고 몸을 씻었다. 곧 아수수도 따라 넘어와 몸과 머리에 묻은 황토를 씻어 냈다.

“검군자 마백의 후예로 짐작 가는 사람 있나요?”

다시 등을 기대고 누우며 물었다.

“가장 먼저 당신에게 술을 주었던 그 마광추요.”

아수수도 금장생처럼 누웠다.

조금 전 욕조와 달리 이 욕조 물은 맑아서 속이 다 비치는데도 두 사람은 별로 개의치 않는 듯 가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럼 천붕도마 광유의 후예는?”

“서천비고를 관리하는 자들의 수장인 묵지도墨紙刀 광인효 대협이 가장 유력해요.”

“지도紙刀이긴 하지만 그도 도刀를 무기로 사용하네요?”

“그래서 그를 가장 유력하다고 한 거예요.”

“그럼 다섯 분의 후예는 전부 찾은 셈인가요?”

“확인 작업이 남긴 했지만 그런 것 같아요.”

“그럼 다섯 분의 무공을 적어 줄게요.”

금장생은 욕실에서 나갔다. 그리고 수건으로 머리와 몸을 닦았다.

다 닦고 나서 커다란 수건 한 장을 펼쳤다.

그러자 욕조 안에 있던 아수수가 일어나 왔다. 수건으로 몸을 감싸고 묶은 후 작은 수건으로 얼굴과 머리를 닦았다.

그녀는 옷을 입을 생각도 하지 않고 수건만 걸친 채 한편에 엎드렸다.

“되게 따뜻해요.”

그녀는 배시시 웃었다.

“그래도 최소한 속옷이라도 입으세요.”

금장생은 지필묵을 준비했다. 그리고 귀신들로부터 들은 무공을 적었다.

다섯 개를 다 적고 나자 한 시진이 훌쩍 지났다.

“다 적은 거예요?”

“네. 이제 당신은 이걸 다 암기하세요.”

“이걸 왜 내가 암기해야 하는 거죠?”

“나름 마가 무공을 이겼다고 자부하는 자들의 무공이거든요.”

“저보고 익히라는 건가요?”

“네.”

“한두 개도 아니고 다섯 개를 어떻게…….”

“일단 익혀 놓고 필요한 것만 취하면 되잖습니까. 특히 백팔살인류는 반드시 익히세요. 꼭 그 무공이 아니더라도 익히고 있는 무공에 많은 도움을 주는 거니까요.”

“알았어요. 일단 암기부터 할게요.”

“전 이제 자야겠습니다.”

금장생은 눈을 감았다.

일각도 채 지나지 않아 금장생의 코에서 고른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고생했어요.”

아수수는 금장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금장생이 적어 준 무공을 암기하기 시작했다.

다섯 권을 전부 암기하는 건 많은 노력과 시간을 요구했다. 평소 머리가 좋다고 자부하는 그녀였지만 암기만 하는 데 두 시진이 걸렸다.

암기가 끝나자 자신의 장포 안주머니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금장생 옆으로 가서 잠을 청했다.

그녀 역시 금세 잠이 들었다.

그가 잠에서 깨어난 건 저녁 무렵이었다.

“이런?”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벌거벗은 아수수를 껴안고 있었다. 몸에 감았던 수건이 풀어지는 바람에 알몸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이러다 자고 말지.’

서로를 대하는 게 너무 자연스러워 알몸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이러다가 정말로 자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냐. 여잔 한 번이면 돼. 다시는…… 절대 아냐.’

금장생은 고개를 거칠게 흔들었다. 그리고 아수수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일어났어요?”

하지만 그가 움직이자마자 아수수가 눈을 떴다.

“옷을 입고 잤어야 했는데 깜박했네요.”

아수수는 제 몸을 내려다보고는 수건으로 얼른 가렸다.

“나가서 밥 먹죠.”

“네.”

두 사람은 서둘러 옷을 입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 옹촌에서 준비한 식사를 하고 팔전의 세 번째 마을을 의촌으로 갔다.

의촌의 시험은 바늘 암기였다.

비단이 널려 있는 공간에서 소리 없이 날아오는 바늘을 피하거나 막아 내야만 관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물론 암기술을 익혀야만 방어가 가능했다.

자객 출신인 금장생에게 어쩌면 암기는 가장 쉬운 관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암기술을 익힌 그는 아주 쉽게 의전제삼문을 통과하고 의촌의 촌장 어설아로부터 마왕으로 인정받았다.

네 번째로 그가 향한 곳은 가금류를 기르는 금전이었다.

금전의 촌장은 사공령으로, 여자였다.

사공령에 대한 금장생의 첫 느낌은 눈빛이 맑다는 점이었다, 나이를 먹다 보면 눈빛이 혼탁해지기 마련인데 사공령은 여전히 어린아이 눈 같았다.

“욕심을 버리면 저처럼 됩니다.”

비결이 뭐냐고 묻자 돌아온 대답이었다.

“다른 욕심은 다 버릴 수 있는데 한 가지만은 안 됩니다.”

“그게 뭡니까?”

사공령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돈입니다.”

“돈요?”

“제 행복 지수를 높이는 건 쌓여 가는 돈입니다.”

“마왕께서는 아주 부자인 걸로 알고 있는데 아닙니까?”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돈이 아니질 않습니까? 마누라에게 보석도 사 줘야 하고 가솔들도 먹여야 하잖아요. 그건 내 돈이 아니라 내 손을 거쳐 가는 다른 사람의 돈이지요.”

“그러니까 마왕께서는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돈이 좋다는 말이군요.”

“네.”

금장생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쓸 곳이라도 있습니까?”

“아뇨.”

금장생은 고개를 저었다.

“그냥 돈 자체가 좋다는 거군요.”

“맞습니다.”

“그렇다면 눈동자가 맑아지는 건 틀린 것 같습니다. 이 나이 먹도록 살아오면서 배운 게 있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게 돈이라는 사실입니다.”

“사실 그래서 저도 취미를 바꿔 보려고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그런데 안 되더군요.”

“그럴 땐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어떤 건데요?”

“생긴 대로 사는 겁니다.”

“생긴 대로?”

“네.”

“충고 감사합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호호호!”

듣고 있던 아수수는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을 저렇게 진지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웃겼다.

“우린 장난하는 거 아닙니다, 수수.”

“마왕 말씀이 맞습니다. 우린 지금 진지한 토론 중입니다, 마마.”

“농담이 아니었다고요?”

아수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그렇다니까요.”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됐어요. 그보다, 아직 멀었나요?”

아수수는 웃으며 사공령에게 물었다.

“저깁니다.”

사공령은 정상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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