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113)
처음엔 약간 불안했다. 하지만 마신은 이내 안정을 되찾았다.
물이 흐르듯 부드럽게 전방으로 나아갔다.
―가시는 길 행운이 함께하기를!
석군왕의 귀신은 멀어지는 마신을 보며 합장을 했다.
파앗!
그가 고개를 숙이는 순간 뒤편이 환해지며 후광이 어렸다.
비단 석군왕의 귀신에게서만 그런 게 아니었다. 다른 귀신들의 뒤도 환해졌다.
귀신들은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걸어가면서도 그들은 고개를 돌려 멀어지는 마신을 보았다.
곧 귀신들은 광채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파앗! 파앗!
마신의 움직임은 가공했다. 순식간에 관문의 끝에 도착했다.
끝에는 커다란 문이 있었다.
금장생은 곧바로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마신의 오른팔이 시뻘겋게 변했다.
그건 적수마신만마공상의 무공인 적수였다.
손바닥 형상의 시뻘건 장력이 전방으로 쏘아져 갔다.
퍽!
가공할 기운과 달리 소리는 아주 작았다. 마치 파리채로 파리를 잡을 때 나는 소리와 비슷했다.
하지만 위력은 가공했다. 거대한 철문이 순식간에 가루로 흩어졌다.
“당신을 어떻게 데리고 다니죠?”
관문을 나서며 금장생은 물었다.
―밖으로 나가서 돌아가 있으라고 명령하면 된다.
“알았습니다.”
금장생은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돌아가라는 명령을 내렸다.
솔직히 명령을 내리면서도 마신이 어디론가 갈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스윽!
“어?”
금장생은 깜짝 놀랐다.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마신의 모습이 허공으로 녹아들어 가 버린 것이다.
내기를 끌어 올려 천리지청술을 펼쳤지만 마신의 흔적은 감지되지 않았다.
“거기 있습니까?”
금장생은 마신이 은신술 종류의 어떤 방법으로 몸을 숨긴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마신은 대답이 없었다.
이번에는 머릿속으로 물었다. 이번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신은 대답이 없었다.
“나오세요.”
금장생은 나직하게 말했다.
웅!
그러자 대기가 왜곡되는 듯하더니 마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디 있었던 겁니까?”
금장생은 마신을 보며 물었다.
―모른다.
“흠!”
금장생은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마신이 어떤 방법으로 모습을 감추는지, 어떻게 다시 나타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들어가세요.”
결국 돌려보내고 말았다.
마신이 돌아가자 금장생은 몸을 돌려 마신행을 펼쳐 달려왔던 곳을 바라보았다.
“허!”
그는 황당했다.
출구에 있던 문이 안에 구축되었던 진을 해체하는 매개체였던 모양이다. 진식에 가려져 있던 지하가 민낯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데 출발했던 장소가 바로 보였다.
정확하게 재 보진 않았지만 수백 장은 족히 달려온 것 같다. 그런데 오십 장이 채 되지 않는 거리였다. 바닥 또한 평범한 땅이었다.
“마신이 허공에 숨는 것보다 더하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돌아갔다.
석군왕을 비롯한 다섯 명의 무기를 챙기기 위해서였다.
잠시 후 그는 석군왕 일행의 시체 앞에 섰다. 시체는 각각의 무기를 지니고 있었다.
금장생은 먼저 석군왕의 무기를 꺼냈다.
푸스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석군왕의 시신이 가루로 변했다.
석군왕이 남긴 건 톱니바퀴 모양으로 만들어진 륜輪 두 개였다. 불그스름한 색에 손바닥 크기였지만 상당히 무거웠다.
각각의 륜에는 폭暴과 풍風이 적혀 있었다. 폭륜과 풍륜으로, 두 개를 합쳐 폭풍륜이라 불렀다.
금장생이 두 번째로 꺼낸 무기는 사예린의 검인 사류死流였다. 사예린 역시 무기를 꺼내기 위해 만지자 가루로 흩어졌다.
사류는 검 면은 청색이고 손잡이 끝에 뱀 머리가 조각된 연검으로, 길이는 반 장이었다.
금장생은 사류를 횡으로 가볍게 던졌다. 그러자 사류가 그의 허리를 감아 돌았다.
세 번째로 꺼낸 무기는 검군자 마백의 검이었다. 검의 이름은 뇌성雷聲이고, 푸른색 뇌전 문양이 검 면에 새겨져 있었다.
네 번째 무기는 천붕도마 광유의 역린逆鱗이었다. 역린은 이름처럼 도면에 물고기 문양이 거꾸로 새겨져 있었다.
금장생이 취한 마지막 무기인 육잔능의 혈월마검血月魔劍은 검 면이 붉은색이었는데 한가운데 달이 새겨져 있었다.
“나무 관세음보살!”
무기를 다 취한 후 가루로 변한 이들을 향해 합장을 했다. 그리고 장풍을 쏘았다.
수북이 쌓여 있던 다섯 무인의 흔적은 장풍에 사방으로 흩어졌다.
사방으로 내려앉는 가루를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잠시 후 출구 쪽에 당도했다.
조금 전 가루로 만든 문 외에도 또 다른 문 하나가 더 있었다. 관문 통과를 인정하는 문인 모양이었다.
그는 심호흡을 하고 문을 밀었다.
천천히 문이 열렸다.
밖은 깜깜했다. 아직 밤이 다 지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기분은 며칠 지난 것 같은…… 응?”
금장생은 깜짝 놀랐다.
바로 앞 계단에 아수수가 웅크린 채 잠을 자고 있었다. 거석 일행은 보이지 않았다.
“쯧!”
그는 혀를 차면서 아수수 앞으로 다가갔다.
“저기…….”
아수수를 깨우려다가 그만두었다. 곤히 잠든 상태라 깨우기가 미안했다.
그는 아수수가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안고 계단을 올라갔다.
밖에는 촌장 육전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성공하셨군요.”
무려 천사백 년 만에 첫 관문 통과자가 나왔는데도 육전수의 얼굴은 담담했다.
“놀란 얼굴이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너무나 태연해 보이는 육전수 얼굴에 금장생은 약간 실망했다.
“제가 놀라지 않아서 실망하셨습니까?”
“조금은 놀라야 안에서 고생한 보람이 있지 않겠습니까.”
“어젯밤에 충분히 놀라서 이젠 놀란 표정을 짓고 싶어도 힘이 없습니다.”
“어젯밤이라면, 제가 저 안에서 하루를 머문 겁니까?”
“네.”
육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지난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깊이 잠들었군요.”
금장생은 아수수를 보았다.
비록 강기로 외부 소리를 차단하고 있다지만 몸이 흔들거리면 일어날 법도 한데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자지도 먹지도 않고 자리를 지켰습니다. 잠이 드신 줄은 몰랐습니다.”
“그랬군요. 그런데 저들은…….”
금장생은 육전수 뒤편으로 시선을 주었다. 노인 백여 명이 줄지어 서 있었다.
“과거엔 철전사鐵戰士라고 불렸습니다. 전성기 때는 천 명에 달했고요.”
“저들이 제 부하가 됐다는 겁니까?”
“네.”
육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다른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제가 알기론 팔전에 설치된 여덟 관문 중 가장 어려운 곳이 철전제일문입니다. 철전제일문을 통과하면 다른 관문은 어렵지 않게 통과할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관문은 원래 갈수록 강하게 만들어 놓는 거 아닌가요?”
“그거야 능력 있는 사람을 뽑아야 할 경우에 그렇지요.”
“그럼 팔전에 설치된 관문은…….”
“마왕을 우스갯거리로 만들기 위해 만들어진 관문이잖습니까? 그리고 관문을 통과하면 그 전은 바로 머리를 숙여야 한다는 조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첫 번째 관문을 가장 힘들게 만든 겁니다. 물론 이건 제 생각이 아니고 선조들 이야깁니다.”
“그랬군요.”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런데 안쪽은 어땠습니까?”
“일단 해산하라고 하세요. 그리고 수수를 좀 눕혀야겠어요.”
“알겠습니다.”
육전수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뒤편 노인들에게 눈짓으로 지시를 내렸다. 노인들은 소리 없이 물러갔다.
금장생은 대장간 방에 아수수를 눕히고 난 후 밖으로 나와 육전수와 마주 앉았다.
“안쪽은 전설의 땅이었습니다.”
금장생은 철전제일문에 대해 자세히 말해 주었다.
천 년 넘게 지켜 온 가문의 육전수는 알 권리가 있었다.
“정말로 마신이 있었습니까?”
육전수는 놀란 얼굴로 물었다.
“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육전수는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아주 얇은 석판 십여 개를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금장생 앞에 놓았다.
그것은 돌로 만든 책이었다.
금장생은 첫 번째 석판을 보았다. 그곳에는 마신의 그림이 그려져 있고 옆에 글이 씌어 있었다.
처음엔 버려진 마신을 어떻게 할지 고민이 많았다. 그러다가 가지고 가기로 결정했다. 전리품이란 의미보다 연구 목적이 우선이었다.
석판에는 마신에 대한 이야기들이 적혀 있었다.
글은 고대에 쓰였던 갑골문자와 방문자들의 글이 뒤섞여 있었다.
게다가 석판은 순서대로 놓여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용이 뒤섞여, 읽고 나서 이야기를 맞춰야 했다.
“그 글을 읽을 수 있습니까?”
금장생이 마지막 석판을 내려놓자 육전수가 물었다.
“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전쟁터에 버려졌던 녀석이랍니다. 처음엔 연구 목적으로 가져왔는데 비밀을 밝히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왕을 시험하는 관문으로 사용하게 된 거고요.”
석판의 이야기를 축약한 내용이었다.
“마신은 어떤 능력을 보유하고 있습니까?”
“그건 나도 모릅니다.”
“그럼 어디 있습니까?”
“이 근처 어딘가에 있을 겁니다.”
“이 근처에요?”
육전수는 급히 천리지청술을 펼쳤다. 하지만 그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마신!”
금장생은 마신을 불렀다. 곧 대기가 왜곡되면서 마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세상에!”
육전수의 눈은 더할 나위 없이 커졌다.
저렇게 엄청난 것이 전설의 땅에 숨겨져 있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퍽! 퍽!
갑자기 마신의 다리가 쑥 꺼졌다.
“어?”
육전수의 눈이 커졌다.
마신을 받치고 있던 건 한 자 두께의 청석이었다. 그런데 그 돌이 마신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박살이 난 것이다.
“좀 무거운 녀석이라서요.”
“혹시 의사소통도 하십니까?”
“귀신 같은 게 빙의해 있어서 간단한 의사 전달을 합니다.”
마신의 자아에 대해 금장생이 내린 결론이었다.
“그렇군요.”
“그만 들어가세요.”
금장생은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마신이 바로 모습을 감췄다.
“거참!”
육전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신이 눈앞에서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믿기지가 않았다.
“저도 모르니까 마신에 대한 건 더 이상 묻지 마십시오.”
“알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제이문은 어딥니까?”
“바로 가시겠습니까?”
“놀면 뭐하겠습니까? 그런데 거석 그 친구들은…….”
“마마께서 돌려보냈습니다.”
“나는 두 번째 관문이 있는 곳을 모르는데…….”
금장생은 육전수를 빤히 바라보았다.
“마차가 있으니까 제가 모시겠습니다.”
“나, 나오셨군요.”
바로 그때 아수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금장생은 고개를 돌렸다. 아수수가 곧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문 앞에 서 있었다.
“네. 부인 덕분에 무사히 나온 것 같습니다.”
금장생은 미소를 지으며 아수수 앞으로 갔다.
“감사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아수수는 금장생의 품에 안겨 눈물을 흘렸다.
사실 그녀는 금장생을 관문에 집어넣고 나서 후회를 많이 했다.
공연한 짓을 해서 미래가 창창한 청년 한 명을 사지로 밀어 넣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런 생각은 점점 커져, 금장생이 나오지 못하면 자신도 이곳에서 삶을 정리할 수밖에 없다는 극단적인 생각에까지 이르렀다.
물론 사랑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금장생은 유일한 희망이고, 그 희망이 스러지면 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절망과 죄책감에 몸부림치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그런데 깨어나 보니 금장생이 돌아와 있는 것이다.
“살아왔는데 왜 울고 그러십니까. 이왕 시작한 거 다음 관문으로 가 보지요.”
“계속 도전을 하겠단 말씀입니까?”
아수수는 눈물을 훔치며 물었다.
“여기서 도전을 멈추면 팔푼이 바보 취급당하기 때문에 반드시 해야 합니다.”
“그게 무슨…….”
“그 이유는 두 번째 관문으로 가면서 말해 드리겠습니다. 가시죠.”
금장생은 싱긋 웃으며 문을 가리켰다.
“마차는 제가 몰겠습니다.”
육전수가 벌떡 일어나 먼저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