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109)
수염이 가슴까지 늘어진 노인 두 명이 바둑을 두고 있었다.
한 명은 온화한 인상이며 키가 작고, 다른 한 사람은 키가 크고 인상이 강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두는 바둑판은 특이했다. 가로세로 줄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개의치 않는 듯 바둑을 두었다.
바둑을 두는 두 노인의 눈빛은 아주 맑았다.
딱!
“거, 거긴?”
강한 인상을 지닌 노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한 수로 대마를 잡은 것 같은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온화한 인상의 노인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번 수는 물리세.”
“시작할 때 물러 달라고 하는 사람은 개아들이라고 한 것 같은데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설사 그렇게 말했다고 해도 자네나 나나 딱 한 번은 물러 줘야 하네.”
“내가 왜 그래야 하는가?”
“딱 한 번의 기회가 있었더라면 다섯 분은 평생 연금 생활을 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대답은 왼편에서 들려왔다.
두 노인은 소리가 들려온 쪽을 보았다.
두 노인의 눈에 들어온 건 커다란 바위였다.
“뉘시오!”
강한 인상의 노인이 소리쳤다.
“납니다.”
바위 뒤에서 나온 자는 적운영이었다.
“우린 자네를 처음 보네만.”
강한 인상의 노인이 말했다.
“적사천님의 손자 적운영입니다.”
“적사천 그 친구는 손자를 네 명 둔 걸로 알고 있네.”
“저는 셋쨉니다.”
“사천 그 친구는 대단한 손자를 두었구먼.”
적운영을 가만히 쳐다보던 강인한 인상의 노인이 말했다. 그의 얼굴엔 감탄한 기색이 역력했다.
“제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한들 암흑오마 다섯 분만 하겠습니까?”
놀라운 말이었다.
암흑오마暗黑五魔.
그들이 활동한 시기는 단 이 년에 불과했다.
처음에 등장했을 때는 암흑오마라는 별호도 없었다. 삼십 대 후반으로 비교적 늦은 나이에 출두한 신진에 불과했다.
그랬던 그들이 별호를 얻는 데 걸린 시간은 일 년이었다.
암흑일마 역거성, 혈해이마 마일청, 거왕삼마 우문순, 철검사마 고적일, 천광오마 남천.
강호무림은 그들 다섯 명을 합쳐 암흑오마라고 불렀다. 그만큼 다섯 명의 무공 실력은 출중했다.
그랬던 그들의 마가의 금역이라 불리는 이곳에서 바둑을 두며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바둑을 둔 두 사람 중 강인한 인상의 노인은 암흑일마 역거성이고 온화한 인상의 노인은 혈해이마 마일청이었다.
“입에 발린 소리라는 걸 아는데도 기분이 좋아지는 걸 보면 내가 늙긴 늙은 모양이구먼.”
역거성은 피식 웃었다.
“그런데 그 친구의 손자가 여긴 웬일인가?”
마일청이 물었다.
“이걸 가지고 왔습니다.”
적운영은 품속에서 둥근 패 하나를 꺼냈다.
“그, 그건…….”
역거성과 마일청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 당시 자신들은 대장간에서 패를 만들고 금禁이란 글자를 새겨 연금패란 이름을 지었다.
연금패를 적사천에게 건네면서 이 패를 보내 주지 않으면 금원禁園에서 나오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다. 그리고 정확하게 사십 년 동안 그 약속을 지켰다.
그런데 그 연금패가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나는 다섯 분과 조부님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모릅니다. 내가 아는 건, 이 패로 다섯 분께 한 가지 부탁을 하면 거절하지 않을 거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부려 먹기 위해 연금패를 가지고 왔다는 건가?”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세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 명은 덩치가 컸고, 중간에 있는 자는 광야에 홀로 서 있는 늑대 같은 기운을 풍겼으며, 맨 오른편 노인의 눈에서는 눈빛인지 광기인지 알 수 없는 강한 광채가 흘러나왔다.
이들은 거왕삼마 우문순, 철검사마 고적일, 천광오마 남천으로 암흑오마의 나머지 세 명이었다.
“딱 한 번입니다. 그리고 그 일이 끝나면 다섯 분은 자유의 몸이 됩니다.”
“우리가 밖으로 나가지 못해서 이곳에 머물고 있었는 줄 아는가?”
암흑일마 역거성이 물었다.
“조부님과 한 약속 때문인 걸로 압니다.”
“아니네.”
역거성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우리가 나가지 않은 건 우리에게 한 약속 때문이었네. 우리 암흑오마의 명예 말이네.”
“그랬군요.”
적운영은 급격하게 자신감이 사라졌다.
금원에 발을 들여놓을 때만 해도 연금패를 보이면 앞뒤도 살피지 않고 수락할 줄 알았다. 그런데 암흑오마는 쉽게 상대할 자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곳까지 온 이상 포기할 수는 없었다.
“명예는 흥정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걸 아는가?”
역거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헉!’
적운영의 입에서 헛바람이 새어 나왔다.
마치 바닥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 끝에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역거성은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강한 자였다.
문득 사인루 자객이 나서기도 전에 일이 끝날지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물론 저들이 요구를 들어주었을 때 가능한 이야기다.
“나는 흥정이 아니고 부탁을 하러 온 겁니다.”
“부탁이라…….”
역거성은 연금패와 적운영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떤 부탁인지 한번 들어나 보세, 일마.”
거왕삼마 우문순이 말했다.
“나가고 싶은가?”
역거성은 우문순을 보았다.
“굳이 나가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제약에 의해 나가지 못하는 게 왠지 빚 같아서 말이네.”
“짐을 내리고 싶다는 건가?”
“그러네.”
“자네들 생각은 어떤가?”
역거성은 다른 이들을 보았다.
“사십 년이면 되었지 싶네.”
철검사마 고적일이 말했다.
“다들 짐을 내려놓고 싶다는 말이구먼. 좋네, 일단 들어 보기나 하세.”
역거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 부탁은 가짜 마왕을 제거해 달라는 겁니다.”
“지금 마왕이라고 했는가?”
역거성은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나머지 네 명도 깜짝 놀랐다.
설마 마왕을 없애 달라는 요구를 해 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마왕이 아니라 가짜 마왕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마왕이 가짜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현 마왕을 가짜로 몰기 위해서는 확실한 증거야 있어야 하는데, 있는가?”
“그게 있었다면 굳이 여기까지 오지 않았겠지요.”
“그럼 증거도 없는데 가짜라면서 마왕을 없애겠다는 거구먼.”
“증거만 없을 뿐 가짜가 확실합니다. 그리고 마왕은 제 동생입니다.”
“동생이긴 하지만 배가 다르지. 그리고 원래 이 연금패의 주인도 그가 돼야 하고.”
“배가 다르다고 해도 동생입니다.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공개할 수는 없지만 증거도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건가?”
“다섯 분께는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놈이 제 동생이 아닌 이유는 바로 발 크깁니다.”
“발 크기?”
역거성은 황당한 얼굴로 적운영을 보았다.
“그렇습니다. 제 동생의 발 크기는 한 자가 넘었습니다. 그런데 일 년 만에 돌아온 그자는 발 크기가 한 자가 안 될 뿐 아니라, 과거도 기억 못 합니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건 무슨 소린가?”
“기억을 잃었답니다.”
“그거 흥미롭구먼. 기억을 잃었다면 집을 찾아오지도 못했을 텐데…….”
“외유 갔던 마왕을 데려온 사람은 진짜 마왕의 부인 아수수였습니다. 가짜라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공론화시키지 못한 이유가 바로 아수수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자네 말은, 마왕의 부인이 자리를 보존하기 위해 가짜를 데리고 왔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공론화시켜서 없애기에는 증거가 부족하고 자칫 잘못하다간 역풍을 맞을 수도 있을 것 같아 우리에게 온 거라고 정리하면 되겠구먼.”
“그렇습니다.”
“수락하겠네.”
역거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는 마가에 감정이 없는 게 아니었다.
적사천에게 연금패를 건네면서 몇 년 안에 빼내 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적사천은 죽기 전까지 풀어 주지 않았다.
그런 적사천의 행태가 미웠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 나가지 않았던 건 자존심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 현 마왕을 없애 달라는 부탁과 함께 연금패가 돌아왔다. 때려 부숴도 시원찮을 판인데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다.
“감사합니다. 그 가짜의 초상화는 여기 있습니다.”
적운영은 둘둘 만 종이를 꺼내 놓았다.
“언제까지 없애면 되는가?”
역거성이 물었다.
“굳이 기간을 정할 필요는 없지만 올해 안에 끝냈으면 합니다. 내년에 천왕지회가 있거든요.”
“천왕지회에 새 마왕 신분으로 참여하고 싶은 모양이군.”
“그렇습니다. 그리고 다섯 분과 저 사이의 거래는…….”
“비밀이란 건가?”
“네.”
“그건 걱정 말게.”
“그럼 가 보겠습니다.”
적운영은 암흑오마를 향해 포권을 취했다. 그리고 몸을 돌렸다.
“마가의 운명도 다한 모양이구먼.”
역거성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검은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권력 다툼이라고 보는가?”
혈해이마 마일청이 물었다.
“그게 아니라면 마왕을 없애 달라고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역거성이 대답했다.
“할 텐가?”
“사실 죽어서 사천 그 친구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네. 그런데 이 이야기를 해 주면 좋겠다 싶은 생각이 드네.”
“쿡! 안 그런 척하면서 우리 중 뒤끝이 가장 센 사람은 자네야.”
마일청이 피식 웃었다.
“자넨 나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걸.”
역거성은 마일청을 빤히 바라보았다.
“킬킬킬!”
마일청의 입에서 살기가 잔뜩 어린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웃음소리가 머무른 곳에서는 금세라도 피가 뚝뚝 떨어질 것처럼 살기는 강했다.
사실 얼굴은 온화하게 생겼지만 암흑오마 다섯 명 중 가장 잔인한 심성의 소유자가 바로 혈해이마 마일청이다.
그의 손 속엔 인정이라는 게 없었다. 그와 싸운 자는 반드시 죽었다. 그래서 혈해血海라는 별호를 얻었다.
바둑을 전혀 몰랐던 그가 바둑을 배운 건 인내를 얻기 위해서였다.
“누군가 그러더구먼. 앞에 물이 있으면 갈증은 더 심해진다고.”
“주게.”
마일청은 역거성 앞으로 오른손을 내밀었다.
“이거 말인가?”
역거성은 연금패를 들어 올렸다.
“그러네.”
마일청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거성은 연금패를 마일청의 손바닥 위에 놓았다.
마일청은 연금패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주먹을 그러쥐었다.
손가락이 완전하게 오므려지는 순간 내공을 끌어 올렸다.
푸스스!
잠시 후 검은 가루가 아래로 떨어졌다.
마지막으로 그는 바람을 불어 손바닥에 남은 가루를 날렸다.
“떠날 준비 하세.”
그리고 손을 탈탈 털고는 일행을 보며 말했다.
“그러지.”
역거성 일행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