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108)
전설의 땅 1
지하로 내려온 금장생 앞을 가로막은 건 거대한 철문이었다. 철문의 중앙에는 철전제일문이란 글이 세로로 새겨져 있었다.
“손으로 새긴 거군요.”
금장생은 새겨진 홈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따라 써 보았다.
“제가 알기론 저렇게 새기기 위해서는 최소 십 갑자의 공력이 있어야 합니다.”
육전수가 말했다.
“제일문이라면 혹시 관문입니까?”
금장생은 고개를 돌려 육전수를 보며 물었다.
“네.”
육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관문입니까?”
“마가의 역사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계십니까?”
“방문자들과 싸웠던 여덟 가문 중 한 곳으로 알고 있습니다.”
“방문자를 아십니까?”
육전수는 놀란 얼굴로 물었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방문자를 알고 있는 이들이 거의 없다. 철전에 방문자들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 건 방문자들과의 전쟁에서 최선봉에 섰던 이들의 후예이기 때문이다.
방문자들과 맞붙어 싸웠던 철전의 선조들은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방문자들에 대해 기록을 하였고,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그런데 금장생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수수에게 들었습니다.”
“그랬군요.”
“그런데…….”
“우리 팔전은 방문자들과의 전쟁 때 최선봉에서 싸웠던 전사들의 후옙니다. 그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우린 전멸 직전까지 갔습니다. 마왕의 말을 듣고 선봉에 선 결과였지요. 하지만 내가 무인들은 희생이 거의 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승리의 과실은 전부 그들이 가져갔습니다. 결국 우리 선조들은 마가를 떠날 결심을 합니다. 그러자 마왕은 우리 선조들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어떻게 해도 좋으니 마가를 떠나지만 말아 달라고요.”
“강한 힘을 보유해야 많은 전리품을 차지하기 때문이었군요.”
“맞습니다. 마왕이 우리 선조 앞에 무릎을 꿇은 건, 우리가 떠나 버리면 마가의 전력이 약해지고 전력이 약한 가문은 도태될 수밖에 없는 중원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선조도 그걸 모르지 않았고요.”
“그걸 알면서 왜 남은 겁니까?”
“선조들 또한 여기 아니면 갈 곳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함께하되 과거처럼 무조건적인 희생은 하지 않을 거라고 했겠군요.”
“맞습니다. 선조들은 총 여덟 개의 관문을 설치하고, 그 관문을 전부 통과한 자만 마왕으로 인정하겠다고 했던 겁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흐른 거군요.”
“그렇습니다. 내가는 굳이 우리의 지원이 필요 없게 되었고, 우리 또한 내가에 기댈 이유가 없었죠. 다만 양쪽 모두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팔전에선 물건을 만들고, 내가, 즉 왕부에서는 팔아 준 거군요.”
“그렇습니다.”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직 유효합니까?”
“어떤 거 말입니까?”
“여덟 관문을 전부 통과하면 여러분의 생사여탈권을 갖는다는 맹세 말입니다.”
“도전하고 싶으십니까?”
“오랜만에 돌아왔더니 중간에서 구경을 하고 있던 자들이 전부 저쪽으로 가 버렸지 뭡니까? 이리저리 계산을 때려 봐도 길이 보이지 않거든요.”
“어젯밤 술잔을 돌리는 걸로 반전을 꾀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원래 술이라는 게 취하면 뭐든 다 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하지만 깨고 나면 ‘내가 왜 그랬을까?’ 하고 후회하는 사람들이 많죠.”
“그래서 오늘 낮에 서천왕부를 한 바퀴 도신 거 아닙니까?”
“하는 데까지 해 보자 뭐 그런 거죠. 하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팔전을 발견했다는 말입니까?”
“저는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아마 수수가 팔전에 끌어들일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전에도 마왕께서는 저기로 자주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전에 제가 여길 자주 온 이유가 바로 관문 때문이었군요.”
적천영이 대장간 일을 배운 이유를 비로소 알 것 같았다.
대장간 일을 배운다는 건 핑계고, 그가 정말로 얻고 싶어 했던 건 팔전의 힘이었다. 하지만 성공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랬습니다.”
“저 안으로 들어가고 난 후 제가 성공했다는 건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관문이 없어질 거라고 들었습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아까 질문에 아직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마왕께서 관문을 통과하시면 제 맹세와 절을 받게 될 겁니다.”
“그렇군요. 그럼 시작해 볼까요?”
“저걸 오른편으로 젖히면 됩니다.”
육전수는 문 왼편에 튀어나와 있는 작은 막대를 가리켰다.
금장생은 그 막대를 오른편으로 밀었다.
철컥!
그르릉!
자물쇠 풀리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철문이 열렸다.
“행운을 빌어 주십시오.”
금장생은 안으로 들어갔다.
“기억을 잃었다고 해도 변하지 않는 게 있습니다. 그건 바로 망치질입니다. 그런데 당신의 망치질은 내가 아는 그와 달랐습니다. 당신의 무공이 과거 그에 미치지 못한다면 안에서 죽게 될 겁니다. 거긴 선조들이 자신들을 버린 마왕에게 복수하기 위해 만든 장소니까요.”
육전수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게 무슨 소리죠?”
아수수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육전수는 몸을 돌렸다.
아수수가 계단 위에서 이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잔뜩 굳은 채였다.
“들으셨습니까?”
“네.”
아수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나는 두 가지를 선택할 수 있어요. 하나는 철노의 입을 막아 비밀을 지키는 거고 두 번째는 철노 앞에 무릎을 꿇고 비밀을 지켜 달라고 비는 거예요.”
아수수는 아래로 내려왔다.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육전수는 아수수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내 선택은 후자예요.”
아수수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그분은…….”
“돌아가셨어요.”
“그럼 안으로 들어간 그분을 선택한 건?”
“제 결정이었어요.”
“복수를 하기 위해 섭니까?”
“맞아요. 복수 때문이에요. 하지만 복수만을 원한 건 아니에요. 복수 외에 또 원한 건, 남을 불행에 빠트린 자가 떵떵거리고 잘 살아서는 안 된다는 제 신념 때문이에요.”
“복수가 끝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모릅니다.”
“저 안으로 들어가신 분은?”
“자기 길로 갈 거예요.”
“떠나신단 말씀이군요.”
“맞아요.”
“지키겠습니다.”
육전수는 아수수 앞에 앉더니 손을 잡고 일어났다.
“혼자만 알고 계셔야 합니다.”
“마마님과 저 말고 알고 있는 사람이 또 있습니까?”
“없어요.”
“그럼 저도 지키겠습니다.”
“고마워요.”
아수수는 일어났다.
“용케도 비슷한 분을 찾았군요.”
“비슷한 분이 아니라 남편입니다.”
“그렇지요.”
육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에 안에서 죽게 될 거라고 했는데, 그건 무슨 말인지요?”
“저 안의 관문은 오직 한 사람, 마왕을 겨냥하고 만들어졌습니다.”
“겨냥하고 만들어졌다는 건?”
“마왕이 아니면 허락되지 않는 공간이란 뜻입니다.”
“마왕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건 뭐죠?”
“군림천하봅니다.”
“군림천하보로 어떻게 해 두었다는 건가요?”
“저도 자세한 건 모릅니다. 하지만 철전제일문은 군림천하보를 완성하지 못한 사람은 시도조차 해 보지 못한다고 들었습니다. 자격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도전한 대가는 죽음이고요.”
“지금까지 저 관문에서 죽은 사람이 있나요?”
“전부 다섯 명이 죽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정확한 신분은 모르지만 마왕의 꿈을 꾸었던 마가의 이인자들이었을 겁니다. 그 정도 신분이 아니면 팔전의 전설에 대해 알지 못할 테니까요.”
“그렇군요.”
“그분이 군림천하보를 얼마나 익혔습니까?”
“몰라요.”
아수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무공을 전해 준 지는…….”
“두 달 조금 넘었어요.”
“그럼?”
“이미 들어가 버렸고, 부를 수도 없는 상황이잖아요. 그분을 믿을 수밖에요.”
“그렇다고 해도…….”
“제가 너무 태연하다는 건가요?”
“이런 경우 보통 실망한 얼굴을 하거든요.”
“그이를 데리고 온 건 제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발악입니다. 이것마저 실패한다면 하늘이 허락하지 않는 걸로 받아들이고 포기해야지요.”
“포기한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남편이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거든요.”
“그건…….”
“결과는 언제쯤 나올까요?”
“성공하면 내일 아침에 볼 수 있을 테고, 실패하면 영원히 나오지 못합니다.”
“나오는 곳은 어디죠?”
“대장간 가장 안쪽으로 들어가면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습니다. 그 계단 끝에 보면 철문이 있는데 거기가 출굽니다.”
“그쪽으로 가 있을게요.”
아수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단을 올라가는 그녀의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육전수는 따라가 부축하려다가 그만두었다. 혼자 두는 게 도와주는 거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수수는 간신히 계단을 올라갔다.
“휴우!”
육전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저분을 살리기 위해서는 살아 나와야 할 것 같습니다.”
육전수는 문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한편.
안으로 들어간 금장생은 특이한 장소 앞에 서 있었다. 운무가 짙게 끼어 앞이 보이지 않았다.
한참 동안을 바라보다가 그가 발견한 건 발자국이었다.
눈에 보이는 발자국의 개수는 오십여 개였다.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주변을 살폈지만 통과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글조차 없었다.
“저걸 알아야 지나갈 수 있다는 것 같은데…….”
금장생은 발자국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아!”
이윽고 그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저기 보이는 발자국은 군림천하보의 삼백예순다섯 발자국 중 일부였다.
“먼저 저기가 시작인지 아닌지를 알아야지.”
금장생은 군림천하보를 떠올렸다.
“서른다섯 번째.”
그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맺혔다.
서른다섯 번째 발자국부터 보이게 해 두었다는 건 서른네 번째까지는 알아서 펼쳐야 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나머지도 전부 펼쳐야 한다. 만일 삼백예순다섯 발자국 중, 순서가 틀리거나 하나라도 빼먹게 되면 죽음이 찾아올 게 분명하다.
그게 아니라면 관문을 만들 리가 없을 테니까.
“다행히 나는 군림천하보를 전부 알고 있지. 그것도 완벽하게.”
휙!
금장생의 신형이 전방으로 쏘아졌다.
뒷짐을 진 그는 머릿속에 떠오른 대로 발을 내디뎠다.
정확하게 서른다섯 번째가 됐을 때 바닥에 찍힌 발자국을 밟았다. 그 후로도 물 흐르듯 보법을 펼쳤다.
삼백예순 개의 발자국을 전부 밟고 나자, 또다시 발자국이 나타났다. 그런데 나타난 발자국이 빠르게 희미해지고 있었다.
그건 곧 발자국이 사라지기 전에 통과하지 못하면 실패한다는 걸 뜻했다.
“쉰다섯!”
금장생은 곧바로 군림천하보를 펼쳤다.
다행히 그는 발자국이 사라지기 전에 밟을 수 있었다. 또다시 나머지를 펼쳐 군림천하보를 완성했다.
“이백쉰둘!”
요령을 알고 나자 어렵지 않았다.
이 관문의 관건은 군림천하보를 얼마나 완벽하게 알고 있느냐 하는 거였다.
그 후로도 몇 번 더 반복되었지만 금장생의 발길을 붙잡지 못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더 이상 발자국이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오른편 벽면에 기대앉은 시체 다섯 구가 보였다.
“거참!”
금장생은 시체들을 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