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107)
마차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서천왕부 북쪽에 있는 북천장이었다.
북천장 가솔들은 금장생을 열렬하게 환영해 주었다.
“이거 한번 드셔 보십시오.”
노인 한 명이 국물 한 사발을 들고 나왔다.
“뭡니까?”
금장생은 물었다.
“어제 그 독한 술을 만 잔이나 마셨다고 들었습니다.”
“만 잔요?”
금장생은 뜨악한 얼굴로 노인을 보았다.
“평생 동안 말술을 마셔 온 제가 숙취를 해소하기 위해 마시는 국물입니다.”
“감사합니다.”
금장생은 국물을 받아 들고 후후 불어 가며 마셨다.
아닌 게 아니라 국물을 마시자 속이 확 풀렸다.
그는 인사를 하고 마차에 올랐다.
“만 잔이라고 소문이 났나 보네요.”
아수수가 웃으며 말했다.
“원래 소문이라는 건 과장되기 마련이잖습니까.”
금장생은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속은 괜찮아요?”
아수수는 금장생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지금까지 물 외에 아무것도 먹지 못한 건 먹는 족족 토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괜찮아 보였다.
“이건 거북하지 않습니다.”
“다행이네요.”
아수수는 빙긋 웃었다.
마차는 다시 출발해 다른 건물로 향했다.
가는 곳마다 많은 이들이 숙취를 푸는 데 최고라며 갖가지 음식을 내왔다.
금장생은 그것들을 넙죽넙죽 받아먹었다. 그리고 그들과 모여 앉아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렇게 다섯 곳의 천장을 다 돌고 나자 어느새 저녁때가 되었다.
“들어가시겠습니까?”
마차를 물던 유공이 물었다.
“마을을 들러보고 싶습니다.”
“마을요?”
“기억이 제대로 나는 건 아니지만 거기도 서천왕부의 일부라고 하더군요.”
“그렇긴 한데 너무 늦은 시간이라…….”
“구경만 하는 건데 시간이 무슨 상관입니까? 일단 가 봅시다.”
“알겠습니다.”
유공은 마차를 몰았다.
금장생을 태운 마차가 서천왕부 밖 마을로 향했다는 소식은 바로 적지영에게 보고되었다.
“정말 마을로 갔어?”
“네.”
“그 계집이……!”
적지영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밖을 향해 소리쳤다.
“당장 남천장을 불러와!”
“알겠습니다.”
한 식경 후 적운영이 적지영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적운영은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놈이 서천왕부 밖으로 나갔다는 보고, 받았어?”
“아뇨.”
“방금 나갔대.”
“그런데 그게 왜…….”
“놈은 어제 서천왕부로 들어왔어. 그리고 간밤엔 술로 가솔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었고, 오늘 낮에는 각 천장을 돌며 자신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렸어. 그리고 지금은 마을로 향하고 있어. 아니, 상황으로 보건대 놈이 가는 곳은 팔전八殿일 가능성이 아주 높아.”
“지금 팔전이라고 하였습니까?”
적운영의 눈이 커졌다.
팔전.
마가 수뇌들에게만 전해 내려오는 아주 오래된 전설이었다.
오래전 마가는 내가內家와 외가外家로 구분돼 있었다. 내가는 왕부에 살았으며 외가는 왕부 밖 마을에 기거했다.
마가 가주를 나타내는 마왕이란 칭호는 내가와 외가의 지지를 얻었을 때만 받을 수 있었다.
내가의 지지를 얻는 건 혈통만으로도 가능했지만 외가의 지지를 얻는 건 쉽지 않았다.
그건 바로 여덟 개의 관문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 여덟 개의 관문이 설치된 곳이 바로 팔전이다.
초창기에는 많은 가주들이 관문에 도전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모르게 관문 도전을 꺼렸다.
관문의 쉽고 어려움을 떠나, 외가의 지지가 없더라도 마왕 직책을 수행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을 뿐 아니라 혹여 관문에 도전했다가 실패라도 하게 되면 마왕에 대한 불신이 생겨나고 그 불신은 반란으로 이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즉, 관문 도전은 득보다 실이 더 많았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면서 팔전은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팔전에 설치된 관문은 마가의 가장 막강한 전설이고, 만일 통과한다면 엄청난 파급력을 가질 게 분명하다.
“응.”
적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짜 그놈이 팔전의 전설을 알고 있는 건 아닐 테고, 아수수의 농간이군요.”
“맞아. 그 계집은 자신들의 열세를 극복할 방법으로 팔전을 택한 것 같아.”
적지영이 처음에 ‘그 계집이……!’라고 했던 이유가 바로 팔전의 전설 때문이었다.
“어떻게 할까요?”
“풍영은 언제 떠났지?”
“여기서 나간 건 아침이지만 전장에서 돈을 찾아야 하니까 사인루로 출발한 시간은 점심때 후로 봐야 할 겁니다.”
“그럼 사인루 자객은 아무리 빨라도 열흘 후에나 오겠구나.”
“그럴 겁니다.”
“흠!”
“일단 먼저 시험해 보는 건 어떻습니까?”
“뭘 시험하자는 건데?”
“놈의 실력 말입니다.”
“우리 사람으로 암습을 하자고?”
“엄밀하게 따지면 우리 사람이 아니라 조부님 사람이죠.”
“조부님 사람이라면…… 설마 그들을 이용하자는 거야?”
적지영은 깜짝 놀라 물었다.
“네.”
“그들이 우리 요구를 들어줄 거라고 생각해?”
“가짜를 죽인 대가가 자유라면 얼마든지 해 줄 겁니다.”
“그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는데?”
“그들은 단 한 번도 무공을 드러낸 적이 없습니다.”
“모른다는 말이구나.”
“하지만 조부께서 그자들을 연금한 걸로 봤을 때, 결코 약하진 않을 겁니다.”
“만일 실패하면 경계심만 키워 주는 꼴이 돼.”
“아수수가 그놈을 데리고 왔다는 건 적천영이 이미 죽었다는 뜻입니다. 경계는 이미 하고 있을 겁니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 좋다, 해 보자.”
적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다녀오겠습니다.”
적운영은 일어섰다.
“비밀 엄수가 첫째라는 걸 명심해.”
“물론입니다, 누님.”
적운영은 싱긋 웃고는 밖으로 나갔다.
* * *
“마을에 대해 알려 주세요.”
마차가 다리를 건너자 금장생은 아수수를 보며 말했다.
“왕부 주위에는 총 예순 개의 마을이 있어요. 그중 대표적인 건 여덟 개예요.”
“우리가 가는 곳도 여덟 개 중 하난가요?”
“네.”
“여덟 개 마을은 어떤 곳인데요?”
“철촌鐵村, 옹촌甕村, 의촌衣村, 금촌禽村, 도촌屠村, 공촌工村, 목촌木村, 북촌北村이에요.”
“이름만 들어도 뭐 하는 곳인지 대충 알겠네요.”
“맞아요. 철촌은 농기구 등을 만드는 대장간 마을이고, 옹촌은 도기를 만든 마을, 의촌은 옷을 만드는 마을, 금촌은 가금류를 기르는 마을, 도촌은 금촌에서 기른 짐승을 도살하는 마을, 공촌은 건물이나 다리 등을 만드는 목수 마을, 목촌은 나무꾼과 사냥꾼 마을, 북촌은 장례 업무를 도맡아 하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에요.”
“그들이 마을 공동체 대표라고 할 수 있나요?”
“네.”
“일단 거기부터 가 보죠.”
“당신이 가장 자주 방문했던 곳은 철촌이에요.”
적천영이 철을 잘 다룰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철촌을 제집처럼 들락거렸기 때문이다.
“철촌으로 먼저 갑시다.”
금장생은 유공에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마차의 속도가 빨라졌다.
철촌은 서천왕부 동쪽에 위치해 있었다.
마을로 들어선 마차를 가장 먼저 반긴 건 후끈한 열기였다.
큰길을 중심으로 좌우측에 대장간이 늘어서 있었는데 수백 채는 되는 것 같았다. 그들 중 상당수는 아직도 작업 중이었다.
“이곳에서 사용하는 물건만 생산하는 것은 아닌가 보죠?”
“공기만 마시고 살 수는 없잖아요.”
“철촌에서 만들어지는 물건은 서천왕부의 공식적인 수입원이라는 거네요?”
대륙황가도 서천왕부 소유지만 외부에는 상관없는 걸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먹고살 뭔가가 필요하다. 대장간은 그런 업체 중 한 곳인 모양이었다.
“네.”
아수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로 일 년 예산을 맞출 수 있어요?”
“그들 말고도 사업체가 몇 개 더 있어요.”
―내가 완전 대박을 맞았네요.
―하지만 한시적인 거죠.
―일 년을 십 년처럼 살면 됩니다.
―어떻게 살면 일 년을 십 년처럼 살 수 있죠?
―남들이 십 년 동안 빼먹을 걸 일 년 안에 빼먹으면 된다는 말입니다.
“호호호!”
금장생의 말이 너무 웃겨 아수수는 웃음을 터트렸다.
―두고 보십시오. 제가 떠나고 나면 서천왕부는 껍데기만 남게 될 겁니다.
―석보산 단주를 안다면 그런 말 못 할걸요.
―단주면 대륙황가 상단주?
―네.
―깐깐한 사람인가 보죠?
―삼대상단 상단주 중 최고의 사업 수완을 지녔다고 하더군요.
―지금은 감각이 많이 무뎌졌나 보군요.
―왜요?
―그게 아니라면 서역으로 오백 대의 마차를 보낼 리가 없잖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죠?
아수수의 눈이 커졌다.
오백 대의 마차를 보냈다는 말은 처음 들었다.
―몰라요?
―저도 돌아온 지 이틀째잖아요.
―철가에 도착한 것 같으니까 그 부분은 나중에 이야기하도록 하죠.
마차가 멈춰 서고 문이 열렸다.
금장생과 아수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렸다.
“어서 오십시오, 마왕.”
육십 후반의 노인이 금장생과 아수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노인은 철촌의 촌장 육전수였다.
“나는 노인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기억을 잃었다는 건 들었습니다. 저는 철촌의 촌장 육전숩니다.”
“듣고 보니 아는 이름 같기도 합니다.”
“들어오십시오.”
육전수는 금장생과 아수수를 안으로 안내했다.
그의 대장간은 주변 대장간 몇 개를 합친 것만큼 컸다. 입구에는 철전이란 글이 새겨진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너무 오래돼 글자는 알아보기도 힘들었다.
“수수 말에 의하면 전에 제가 자주 왔다고 하던데요.”
“그랬습니다. 오셔서 망치도 잡고 지하실에 가서 놀기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망치질을 익숙하게 했나 보군요.”
“이분을 발견한 곳이 대장간이었어요.”
아수수가 부연 설명을 했다.
“그랬군요. 한번 잡아 보시겠습니까?”
육전수는 망치를 내밀었다.
“그럴까요?”
금장생은 망치를 들었다.
망치는 팔이 휘청할 정도로 무거웠다.
“무겁군요.”
“제 망치가 좀 그렇습니다. 어떤 걸 만들어 보시겠습니까?”
“낫이나 한번 만들어 볼까요?”
금장생은 망치를 내려놓고 옷을 벗었다. 그가 입고 있는 옷은 태극선의였다.
상의를 완전히 탈의한 후 내려놓았던 망치를 들었다. 그사이 육전수는 집게로 벌겋게 달궈진 쇳덩어리 하나를 가져왔다.
금장생은 왼팔로 집게를 잡고 망치질을 시작했다.
캉! 캉캉캉! 캉캉! 캉캉!
그가 망치질을 할 때마다 쇠가 쭉쭉 늘어났다.
망치질을 하다가 식으면 불로 가져가 달군 후 다시 망치를 휘둘렀다.
금장생의 등줄기를 타고 땀이 흐를 무렵 낫 한 자루가 완성되었다.
“전보다 솜씨가 더 늘었는데…… 농기구가 아니라 무기를 만드셨군요.”
금장생이 만든 낫을 보고 육전수가 말했다.
날을 세우기 전인데도 날카로운 기세를 풍겼다.
“그런가요.”
금장생은 어깨를 으쓱했다.
“마음속에 화가 많으신 모양입니다.”
“그런 거 별로 없는데…….”
금장생은 머리를 긁적였다.
“살기가 강한 걸 빼면 아주 잘 만드셨습니다.”
육전수는 금장생이 만든 낫을 노 안으로 던져 넣었다.
노 안에는 쇳물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낫은 붉게 변하더니 천천히 녹아 쇳물과 합쳐졌다.
“아무튼 지금처럼 일이 잘 안 풀릴 때 과거 마왕께서는 지하실로 들어가셨습니다.”
“지하실요?”
금장생은 의아한 얼굴로 육전수를 보았다.
“가 보시겠습니까?”
“그러지요.”
“지하실은 마왕만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거라도 있는 모양이군요.”
“전설의 땅입니다.”
육전수는 나직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