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가-105화 (105/524)

황금가 (105)

서천왕부

“마왕!”

“마왕!”

“마왕!”

“이, 이게 몇 잔쨉니까?”

술잔을 들고 묻는 금장생은 곧 쓰러질 것처럼 비틀거렸다. 그는 자리를 떠나 한가운데로 나가 있는 상태였다.

“구백여든 잔입니다, 마왕!”

누군가가 소리쳤다.

“그걸 다 세고 있는 당신은 정말 독한 사람이군요.”

금장생은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마왕!”

“마왕!”

“마왕!”

금장생의 목젖이 위아래로 움직일 때마다 주변에 늘어서 있던 가솔들은 함성을 내질렀다.

술잔을 비운 금장생은 머리 위로 들어 올려 거꾸로 세웠다.

“와아!”

“와아아아!”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저는 이호봅니다. 마왕의 만수무강을 빌며 이 잔을 올립니다.”

가솔 한 명이 술병을 들고 금장생 앞으로 섰다.

“몇 잔쨉니까?”

금장생은 술잔을 앞으로 내밀며 물었다.

내공으로 주정을 배출하고 화장실로 가서 배설을 해도 취하는 건 막을 수 없었다. 금장생은 거의 인사불성 상태였다.

“구백여든두 잔쨉니다.”

“흐흐흐! 좋습니다, 한번 죽어 봅시다. 따르세요.”

금장생의 말에 사내는 술잔을 채웠다.

하지만 그는 전부 채우지 않았다. 아래쪽만 차게 따랐다.

“이 대협은 나에 대한 정이 부족한 모양입니다.”

“네?”

“그게 아니라면 술을 이렇게 코딱지만큼 줄 리가 없잖습니까.”

“그, 그게 아니라…….”

“우리 아버지 말씀이, 술자리에서는 여자는 치우고 잔은 채우라고 하였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이호보는 다시 술을 따라 잔을 가득 채웠다.

“이놈을 또 마셔야 한다 이거죠.”

금장생은 술잔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굳이 마시지 않으셔도…….”

“기다리십시오, 이 대협. 마시고 바로 드리겠습니다.”

금장생은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마왕!”

“마왕!”

“마왕!”

“마왕!”

“마왕!”

가솔들은 다시 마왕을 연호했다.

“카아! 죽인다!”

금장생의 입에서 커다란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후로도 금장생은 팔십여 잔을 더 받아 마셨다.

“더 없습니까?”

금장생은 술잔을 들고 좌우를 둘러보았다.

이제 남은 사람은 적지영과 적풍영, 적운영 삼형제와 그들의 심복뿐이었다. 그들은 자기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없는 모양이네요. 그럼 나도 이제…….”

금장생의 손에서 술잔이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금장생의 동체가 앞으로 처박혔다.

쿠웅!

“마, 마왕!”

“마왕!”

가솔들은 질겁하여 소리쳤다.

“상공!”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던 아수수가 금장생을 향해 몸을 날렸다.

“상공!”

그녀는 금장생을 돌려 안았다.

앞으로 넘어지면서 코가 깨진 듯, 그의 코 주위는 피로 범벅이었다.

“어?”

“이런!”

주위에 있던 이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나 괜찮아. 안 취했다고.”

금장생은 손을 휘휘 저으며 일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일어날 수가 없었다.

“어이, 마누라, 왜 자꾸 가는 거야. 술 취했다고 무시하냐? 그러지 말고 이쪽으로 오라고.”

금장생은 손을 내밀어 뭔가를 잡는 시늉을 했다.

“아이고, 아무리 내가 술을 조금, 아니 눈곱만큼 마셨다고 그렇게 가냐? 그래, 잘…….”

금장생의 팔이 축 늘어졌다. 이번에는 정말로 기절하고 만 것이다.

“서천전으로 가야겠어요.”

아수수는 금장생을 안고 일어났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거석이 아수수 옆으로 다가왔다.

“고마워요.”

아수수는 금장생을 거석에게 건넸다. 거석은 곧바로 밖으로 나갔다.

“여러분, 고마워요. 상공이 이렇게 즐거워하는 모습을 오랜만에 본 것 같아요. 앞으로도 오늘처럼 즐거웠으면 좋겠어요. 수고들 했어요.”

아수수는 가솔들에게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누님!

적풍영은 적지영에게 전음을 보냈다.

그의 얼굴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런 사태가 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지금 가솔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마왕의 매력에 흠뻑 빠져 있다.

처음 술을 마실 땐 몇 잔 마시고 말겠거니 했다. 그런데 일천 잔도 넘게 받아 마신 것이다.

아니, 그에게 술을 주지 않은 사람은 세 형제와 심복뿐이다. 나머지는 마치 귀신에 홀린 것처럼 술을 따라 주고 받아마셨다.

―나도 일이 이렇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적지영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엔 당혹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

방심을 했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 놈은 아무것도 아닌 걸로 가솔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버린 것이다.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이번에는 적운영의 전음이 들려왔다.

―자리를 옮기자.

적지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에 이어 적풍영과 적운영을 비롯한 심복들이 일어났다.

그들이 걸음을 옮기자 왁자지껄하던 실내가 조용해졌다. 문득 마왕과 적지영 삼형제 사이가 좋지 않다는 사실을 떠올린 것이다.

“해산해.”

적지영은 나직하게 말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로부터 한 식경 후 적지영 삼형제는 남천장의 적운영 집무실에서 마주 앉았다. 세 사람 앞에는 차가 놓여 있었다.

“내일이면 오늘 밤에 있었던 일이 서천왕부 전역으로 퍼져 나갈 테고 마왕에 대한 시선이 호의적으로 돌아설 겁니다.”

적운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세 사람은 마왕이 없는 동안 서천왕부의 민심을 바꾸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다. 그 노력 중 하나가 마왕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민심을 돌리는 데 성공했고, 중도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던 자들도 자신들 쪽으로 끌어올 수 있었다.

그랬던 노력이 술 한 잔으로 인해 물거품으로 변해 버릴 위기에 처한 것이다.

“놈이 가짜라는 걸 바로 밝히는 게 어떻습니까?”

적풍영이 말했다.

“발 크기를 증거로 내놓는 건 너무 약하다고 한 사람이 너희잖아.”

“그럼?”

“계속해서 증거를 모으는 수밖에 없어.”

“하지만 조금 전 상황으로 보면 놈은 사람을 다룰 줄 압니다. 시간을 주면 그동안 우리가 이루어 놓은 걸 모두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급하게 처리하면 오히려 역풍을 맞을 수가 있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건 아수수 그 계집이다. 그 계집이 남편이라고 우기면 우린 할 말이 없어져. 그 계집의 말을 뒤엎을 증거를 찾아야 해. 그래야 우리가 서천왕부를 차지할 수 있어. 하지만 그 전에…….”

적지영은 말을 끊었다.

그리고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놈을 시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어떤 시험을 한다는 겁니까?”

“얼마나 강한지, 어떤 무공을 익히고 있는지 알아봐야 하지 않겠느냐.”

“양극마신만마권을 익혔을 거라고 보십니까?”

이번엔 적풍영이 물었다.

“남편으로 만들 생각을 했다면 전해 주었겠지.”

“과거 적천영은 양극마신만마권과 군림천하보, 마신행, 군림파천지를 완벽하게 익혔습니다, 누님.”

“그러니까 네 말은, 무공을 펼치게 만들어서 놈이 가짜라는 걸 증명하자는 거냐?”

“설사 과거 기억은 잃었다고 해도 무공은 몸으로 체득한 거라 대부분 알고 있기 마련입니다. 그 점을 이용하면?”

“그 주장 역시 발 크기를 가짜의 증거로 내미는 것처럼 약하다. 일부만 기억난다고 하면 우린 할 말이 없어져.”

“하면 어떻게 하자는 겁니까?”

“무공을 시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암습이다.”

“그게 좋긴 하지만 발각되면 오히려 역풍을 맞습니다.”

적풍영은 고개를 저었다.

암습에 성공하면 그걸로 끝나겠지만 만일 실패하거나 하면 시체나 혹은 사로잡힌 자로 인해 자신들이 드러날 수도 있다.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굳이 우리가 나설 필요가 없지.”

“우리 말고 시킬 자라도 있습니까?”

“사인루에 청부를 하는 거다.”

“사인루요?”

적풍영의 눈이 커졌다.

사인루는 중원 최강의 자객 단체다. 하지만 그들의 존재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난무한다.

어떤 단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건물이 있어야 하는데 중원 어디에도 사인루란 현판을 건 건물이 없다. 아울러 어떻게 청부를 하는지도 알려져 있지 않다.

단지 사인루에 의뢰하면 절대 실패하지 않는다는 소문만 돌 뿐이다.

그런데 적지영이 그 사인루를 언급한 것이다.

“응.”

적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인루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적운영이 물었다.

“알고 있으니까 거기다 청부하자는 거 아니겠느냐?”

“어디 있습니까?”

“생사교라고 들어 봤어?”

“만불산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만불산은 귀주와 사천 호남의 경계에 위치한 산 이름으로, 산 어딘가에 만불상이 있다고 하여 그리 불리게 되었다.

“그 만불산이 바로 사인루 본거지야. 그리고 사인루의 실질적인 주인은 혈가고.”

“네?”

“정말입니까?”

적풍영과 적운영의 눈이 커졌다.

혈가가 사인루의 주인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맞아.”

“그럼 만일 암살이 실패하고 혹여 자객들이 생포된다고 해도 우리가 책임질 일은 없겠군요.”

적풍영이 물었다.

“맞아. 혈가에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면 돼.”

적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승천비무 전에 가능할까요?”

가급적이면 바뀐 마왕이 승천비무를 주관했으면 해서 하는 말이었다.

“서두르면 가능할지도 모르지.”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적풍영이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네게 부탁할 참이었다. 금액은 신경 쓰지 말고 한 달 안에 처리해 달라고 해라.”

“얼마나 달라고 할까요?”

“백만 냥이다.”

“가격까지 알아본 겁니까?”

“외부에서 없애는 게 실패했을 때를 대비해서 알아보았다.”

“엄청난 금액이군요.”

적풍영은 신음을 내뱉었다.

백만 냥이면 서천왕부 일 년 예산에 해당하는 거금이었다.

“마왕이 될 수 있다면 백만 냥이 무슨 대수이겠느냐.”

“계약금은 얼마나 줘야 합니까?”

적풍영이 물었다.

“그들은 따로 계약금을 받지 않는다. 전부 줘야 하고, 실패했을 경우 두 배로 배상한다.”

“언제 갈까요?”

적풍영이 물었다.

“내일 바로 다녀와라.”

적지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갔다.

―접니다.

그녀의 귓전으로 전음이 들려왔다.

―어떻게 하고 있느냐?

―인사불성으로 취했습니다.

―정말로 취했단 말이냐?

적지영은 금장생이 취한 척 연기를 한다고 생각했다.

―네.

―그럼 말이 안 되는데.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취했다면 내공을 끌어 올리지 못할 테고 그럼 변용술이 풀려 본래 얼굴이 드러나게 된다. 그렇다면 지금 보고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 말도 없다는 건 얼굴이 바뀌지 않았다는 걸 뜻한다.

‘설마 진짜? 아냐 그럴 리가 없어. 진짜는 죽었어. 그놈은 가짜야.’

적지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진짜건 가짜건 이번엔 반드시 죽일 거야. 반드시.’

적지영은 주먹을 불끈 그러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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