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104)
서천왕부에는 호수가 여러 개 있다.
모든 호수는 서하의 물을 끌어들여 만든 인공 호수였다. 그 호수들 중 가장 큰 건 서천왕부와 남천장 사이에 있는 대연호다.
대연호의 원래 이름은 청명호였다.
그랬던 이름을 바꾸게 된 건 이백 년 전 이곳을 방문한 황제 때문이었다. 청명호의 아름다움에 취한 황제는 손수 이름을 지어 주었는데 그 이름이 대연호였다.
대연호 북쪽, 즉 서천왕부 쪽에는 커다란 건물이 한 채 서 있는데, 수용 인원이 천 명가량 되는 그 건물은 연회 때 주로 사용되는 대연각이었다.
지금 대연각은 수많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여 다녔다. 그들의 손에 들린 건 술과 음식이었다.
“어떻게 배치할까요?”
적풍영은 적지영을 보며 물었다.
자리 배정에 대한 질문이다.
“이 층 문이 두 개잖아?”
“네.”
“오른편 문만 개방해서 양탄자를 깔아.”
“알겠습니다.”
적풍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떴다.
“누가 주인인지 알게 해 주마, 놈.”
적지영은 서천왕부 쪽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충!”
서천전 대문을 나서자 무인 이백여 명이 일제히 허리를 꺾으며 소리쳤다. 그들은 마가대와 마마호위대 대원들이었다.
마가대 대원과 마마호위대 대원의 복장은 갑옷이었다. 상체와 머리만 가린 특이한 갑옷이었는데, 가슴에는 마가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들의 앞에는 마가대 대주 거석과 마마호위대 대장 사마영, 총관 나박, 군사 유공이 서 있었다.
“모시겠습니다, 마왕!”
거석은 마차 문을 열며 소리쳤다.
“그럽시다.”
금장생과 아수수는 마차에 올랐다.
“출발한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는 걸 확인한 거석은 마차 문을 닫고 소리쳤다.
곧 마차와 호위대 대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연회가 열리는 곳이 멉니까?”
금장생은 아수수에게 물었다.
“참석 인원이 많을 때에는 대연호 옆에 있는 대연각에서 열어요. 거리는 마차로 한 식경은 가야 하고요.”
“참석 인원이 얼마나 되는데요?”
“최소 천 명은 될 거예요.”
“목에 힘 좀 준다는 이들은 전부 오나 보군요.”
“실종됐던 마왕이 돌아왔는데 참석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요.”
“그러네요.”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는 계속해서 달려 한 식경 후 대연각에 도착했다.
대연각 앞에는 무인 수백 명이 도열해 있었다. 그들은 대연각 안으로 들어간 이들을 수행해 온 자들이었다.
“마왕 드십니다!”
일행보다 먼저 대연각 문 앞으로 간 거석이 고함을 내질렀다.
―온 모양이구나.
적지영은 적풍영에게 전음을 보냈다.
―네.
적풍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이들은 벌써 일어나 출입문 쪽으로 향해 돌아서 있었다.
적지영이 돌아서는 순간 문이 열렸다.
끼이익!
금장생은 전면을 보았다.
문 앞에서부터 서역산 양탄자가 길게 깔려 있었다. 양탄자 좌우로 서천왕부 가솔들이 도열해 있었다.
그리고 양탄자 끝에는 고급스러운 탁자가 놓여 있었는데, 길이는 일 장 정도였다.
금장생과 아수수는 안으로 들어섰다.
“귀환을 감축합니다, 마왕!”
우렁찬 외침과 함께 좌우측에 있던 이들이 일제히 상체를 숙였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금장생은 싱긋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먼저 그가 들어가고 이어 아수수가 그리고 왕부삼웅과 사마영이 그 뒤를 따랐다. 마가대와 마마호위대는 밖에 남았다.
금장생은 양탄자 끝에 놓여 있는 탁자 앞까지 갔다.
탁자가 놓인 위치는 다른 탁자보다 한 단 높았다. 단의 높이는 한 자 정도였다.
그 뒤편 아래쪽에도 기다란 탁자가 놓여 있었다. 수행원들의 자리인 모양이었다.
금장생은 탁자를 오른편으로 돌아 의자 앞으로 갔다. 의자는 앉으면 뒤에서 머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등이 높았다.
그 바로 옆 의자 앞으로 아수수가 섰다.
그리고 금장생과 아수수 뒤편 탁자에는 왕부삼웅과 사마영이 자리를 잡았다.
금장생은 좌우를 보았다.
적지영을 비롯한 삼형제는 그가 보는 방향에서 오른편에 서 있고 왼편에는 항우각과 북궁일우가 서 있었다.
‘응?’
금장생의 눈이 살짝 커졌다.
실내는 양탄자를 기점으로 좌우로 분리돼 있다. 그런데 적지영 일행이 있는 공간이 두 배 정도 컸다.
금장생은 시선을 들었다.
오른편에도 출입문이 하나 있었다. 왼편의 출입문만 열어 한쪽 공간을 넓게 쓸 수 있도록 한 모양이었다.
―왜 그러세요?
금장생의 속내를 읽은 듯 아수수가 물었다.
―적지영 일행 뒤편에 서 있는 자들이 두 배 이상 많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저도 보고 있어요.
―전에도 저랬습니까?
―아니에요. 전에는 비슷했어요. 마왕이나 적지영 일파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던 중도파가 있었거든요.
―그럼 마왕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적지영 일행이 끌어들인 거군요.
―그런 것 같아요.
금장생의 시선이 적지영을 향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적지영의 입가에 조소가 맺혔다.
‘네 주제를 알아야 한다.’
적지영은 내심 중얼거렸다.
―한마디 하세요.
―알겠습니다.
“내 계산이 맞는다면 나는 정확하게 삼백구십삼 일 동안 마가를 떠나 있었습니다. 물론 기억을 잃은 탓도 있지만 뭔가 아련하게 떠오르는 게 있었는데 그게 뭔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에서야 그걸 알았습니다. 그런 바로 마가에서 먹었던 이 음식이었습니다. 이 음식냄새가 바로 마가 냄새였던 겁니다. 모든 일은 밥을 먹고 난 후로 미루는 걸로 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금장생은 자리에 앉았다.
가솔들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보았다.
이곳에 있는 이들 대부분은 마왕이 외유 나간 게 아니라 실종됐다는 걸 알고 있다. 실종됐던 사람이 돌아왔으면 감개가 무량하다, 아니면 다시 보니 반갑다 하는 소리를 건네는 게 맞다.
그런데 먼저 밥을 먹자고 하니 황당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총관!”
금장생은 나박을 불렀다.
“아, 알겠습니다.”
나박은 벌떡 일어나 측면으로 달려갔다.
잠시 후 식사가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금장생과 아수수 탁자 앞에 음식이 놓였다. 이어 각 가솔들 탁자에도 음식이 놓였다.
금장생은 음식이 다 놓일 때까지 기다리다가 술잔에 술을 따랐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건배를 하자는 표현이었다.
그러자 가솔들도 서둘러 술을 따라 들어 올렸다.
“일어나지 마세요.”
금장생을 따라 몇몇이 일어나자 왼손으로 앉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일어났던 자들은 바로 앉았다.
“내가 앉으라고 한 건 여러분을 배려해서 그런 게 아니라 나 혼자만 서 있고 싶어서 그런 겁니다. 다들 앉아 있고 나 혼자만 서 있으면 내려다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요. 아무튼…….”
금장생은 말을 끊었다. 그리고 가솔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다시 만나니까 정말 좋습니다.”
금장생의 목소리가 약간 떨려 나왔다.
“장난말이나 거짓말이 아닙니다. 여러분을 다시 보니까 정말로 좋습니다. 날아갈 것 같습니다.”
이번 말투에는 울먹임까지 포함돼 있었다.
순간 실내는 침묵에 휩싸였다.
술잔을 들어 올렸던 이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것처럼 금장생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 이건…….’
적지영은 당황했다.
그녀는 금장생이 밥을 먹자고 했을 때만 해도 비웃었다. 마왕이면 마왕답게 좀 더 그럴싸한 말로 가솔들을 감동시켜야 하는데 그런 게 없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아닌 걸로 시작해서 실내에 있는 모든 가솔들의 마음을 휘어잡아 버린 것이다.
밥 먹기 전 목을 축이기 위해 마시는 술 한 잔으로.
그러한 심정은 적풍영이나 적운영도 다르지 않았다.
“위, 위하여!”
당황한 얼굴로 금장생을 보고 있던 적풍영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마왕에게로 향하는 흐름을 끊기 위해서였다.
“위하여!”
그러자 나머지 가솔들도 일제히 소리쳤다.
그들의 목소리는 천장이 뜯겨 나갈 정도로 컸다.
“반갑소.”
금장생은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그러자 가솔들도 거의 동시에 술잔을 비웠다.
“이제 먹어 봅시다.”
술잔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은 금장생은 본격적으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가 음식을 먹는 모습은 마치 몇 년을 굶은 사람처럼 보였다.
가솔들은 음식을 먹으면서 금장생을 흘끔거렸다.
처음에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자들이 많았다. 자기에게서 떠나간 가솔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연극을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랬던 그들의 눈빛이 점차 온화해져 갔다.
금장생이 음식을 먹는 모습에서 진실된 감정을 읽어 냈던 것이다.
그들은 말없이 식사를 했다.
그때 느닷없이 가솔 한 명이 벌떡 일어나 금장생 앞으로 갔다.
그가 일어선 자리는 적지영 일행 뒤편이었다. 사내는 내공을 끌어 올리면 몸이 붉게 변한다고 하여 적신赤身이란 별호를 지닌 마광추였다.
지금은 적지영 일행 아래로 들어갔지만 과거 마광추는 중도파를 이끌던 팔대수장 중 한 명이었다.
식사를 하던 이들은 긴장한 얼굴로 마광추를 보았다.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어 들던 항우각과 북궁일우, 거석, 사마영이 벌떡 일어났다. 그들은 일제히 자신들의 무기 손잡이를 잡았다.
금장생은 왼팔을 들어 자중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신 마광추, 마왕께 술 한 잔 올리고 싶습니다!”
마광추는 큰 소리로 말했다.
북궁일우 일행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고맙습니다.”
금장생은 자리에서 일어나 술병을 사내에게 건네고 나서 술잔을 내밀었다.
술병을 받아 든 마광추는 금장생의 술잔에 술을 채웠다.
금장생은 단숨에 술을 비웠다.
“기다리세요.”
그리고 돌아가려는 마광추를 세웠다.
“…….”
마광추는 의아한 얼굴로 금장생을 보았다.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어야지요.”
금장생은 술잔을 내밀었다.
“저는…….”
“내 손을 부끄럽게 해서 모욕을 줄 참이면 받지 않아도 됩니다.”
“아, 아닙니다.”
마광추는 얼른 술잔을 받았다.
“남기면 큰일 나는 거 아시죠?”
금장생은 술을 따라 주며 말했다.
“이 귀중한 걸 왜 남기겠습니까?”
마광추는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감사합니다, 마왕!”
마광추는 허리를 구십 도로 꺾어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마광추가 앉자마자 다른 가솔이 벌떡 일어났다.
그 가솔이 신호탄이었다. 이곳저곳에서 수백 명이 벌떡벌떡 일어나 앞으로 나왔다.
“너무 많소. 이럴 게 아니라 한꺼번에 건배를 하는 게 어떻소!”
너무 많은 이들이 앞으로 나오자 항우각이 소리쳤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산적 천장.”
“네?”
항우각은 의아한 얼굴로 금장생을 보았다.
“사내라면 모름지기 천 잔은 마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천 잔을 받아 마시면 죽습니다, 마왕!”
“한번 죽어 보지요.”
금장생은 활짝 웃었다.
그리고 앞으로 나온 가솔들을 향해 소리쳤다.
“줄을 서시오! 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