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102)
줄을 서시오, 줄을
적지영은 셋째 적운영에게도 전음을 보냈다.
―정말입니까?
적운영 역시 적풍영과 같은 반응을 보였다.
적지영은 자신이 과거 적천영과 주고받았던 이야기를 그대로 들려주었다.
―그래서 기억을 잃은 걸로 한 거였군요.
―맞다. 저 계집은 가짜를 내세우면서, 과거 때문에 들킬까 봐 기억을 잃은 걸로 한 거다.
―하지만 지금 당장 가짜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왜?
―증거가 너무 약합니다.
―그것보다 더 정확한 증거가 어디 있다고 그러느냐?
―마왕의 발 크기가 한 자 한 치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누님 말고 또 누가 있습니까?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는 알고 있을 테고, 내가 먼저 발 이야기를 꺼내면 그 또한 나올 거다.
―만일 아무도 나오지 않으면요?
―그땐…….
―늘 최악의 경우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누님. 설사 마왕의 발 크기를 알고 있는 자가 나온다고 해도 증거능력으로는 너무 약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는 웃음거리로 전락하게 될 겁니다.
―믿지 않을 거란 말이냐?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그럼 저 계집이 가짜를 내세워 마가를 좌지우지하는 걸 지켜보라는 거냐?
―발 크기 말고 더 확실한 증거를 찾아야 합니다. 연놈이 꼼짝하지 못할 그런 증거 말입니다.
―그런 증거가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몰랐다면 모르지만 우린 저놈이 가짜라는 걸 알았습니다. 우리 셋이 힘을 합치면 증거를 찾아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겁니다.
―일단은 자중해야 한다는 말이구나.
―그래야 합니다.
―알았다.
적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금장생은 북천장을 만나고 있었다.
북천장은 철창鐵槍 북궁우문으로, 전형적인 무인 상이었다.
“반갑습니다, 북천장.”
“저는 마가를 떠나신 줄 알았습니다.”
“이런 어여쁜 부인을 두고 왜 떠난단 말입니까. 내가 없는 동안에 마가를 지키느라 수고했습니다.”
“마가를 지키는 건 천장의 의뭅니다, 마왕.”
“다른 분들도 다들 북천장과 같은 마음이면 좋으련만…….”
금장생은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적지영, 적운영, 적풍영 세 형제는 전음을 나누느라 금장생이 물러난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세 분 천장은 여전히 바쁜 모양입니다.”
금장생은 세 사람을 보았다.
―천장!
서천장 부관 청천수가 전음으로 적지영을 불렀다.
‘응?’
적지영은 재빨리 고개를 들었다.
“서천마부가 보이지 않는 것 같은데…….”
시선이 마주치자 금장생은 물었다.
“그이는 임무를 나갔다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적지영은 나직하게 말했다.
사실 그녀는 남편 주윤보가 죽었다는 연락을 이미 받았다. 하지만 비밀에 부쳤다.
마부에서 서천장의 이인자가 된 남편은 서천왕부 하위 직급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때로 그 영향력은 상당한 고급 정보를 가져다주곤 했다.
서천장 소속 무인들도 마찬가지다.
현재 서천장은 원소속 오백 명과 별동대라고 할 수 있는 마부대 삼백 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양측 중 무공은 마부대가 더 강하다.
만일 그들이 주윤보의 죽음을 알면 떠나 버릴 수도 있다.
마부대 대원들을 잡아 두기 위해서는 주윤보의 죽음을 비밀로 할 필요가 있었다.
“내가 아직 보고받지 못한 임무인가 보군요.”
“그렇습니다.”
“그런 것들은 차차 보고받기로 하지요.”
금장생은 동천장 항우각을 보았다.
“마차를 대령하라!”
항우각은 뒤편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화려한 사두마차 한 대가 앞으로 나왔다.
“오르십시오, 마왕.”
항우각이 마차 문을 열어 주었다.
금장생과 아수수는 마차에 올랐다.
외부와 마찬가지로 내부도 화려했다. 가운데 간이 탁자가 있고 좌우측 벽에 기다란 의자가 붙어 있었다. 그리고 뒤편에는 침대가 놓여 있었다.
―조마조마했어요.
아수수는 마차를 타며 전음을 보냈다.
―저들 셋과 제가 같은 배에서 나온 형제 맞습니까?
문득 든 생각이었다.
적지영, 적풍영, 적운영 사이에는 끈끈한 뭔가가 있는 것 같았다. 왠지 상당한 괴리감이 느껴졌다.
―형제는 맞는데 같은 배에서 나온 건 아니에요.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저들과 저는 이복형제란 말이군요.
―그래요. 그리고 넷 중 가장 뛰어났고요.
―그랬군요.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하겠습니다, 마왕.”
항우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하세요.”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차 창문을 전부 열었다.
마차는 곧 출발했다.
“안 가십니까?”
서천장 부관 청천수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는 적지영을 보며 말했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적풍영, 적운영 형제도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 있다가 따라갈 테니까 먼저 가라.”
“알겠습니다.”
“풍영이 너도 가고.”
“누님!”
“우리 셋이 전부 남아 있으면 의심할 수도 있어. 그러니까 따라가.”
“알겠습니다.”
적풍영은 곧바로 일행을 쫓아 달렸다.
마차가 저만치 멀어지자 적지영은 금장생이 남긴 발자국 앞으로 갔다.
“재 봐.”
그리고 동생 적운영에게 말했다.
적운영은 금장생이 남긴 발자국의 크기를 재 보았다.
“한 자에서 반 치(1.5센티미터)가 부족합니다, 누님.”
“그럼 놈은 천영 그놈보다 한 치 반이나 작은 셈이구나.”
“그렇습니다.”
“확인했으니까 가자.”
“네.”
두 사람은 곧바로 몸을 날렸다.
마차 행렬이 서천왕부로 들어선 건 저녁 무렵이었다.
가장 먼저 금장생의 시선을 잡아끈 건 물이 넘실대는 강이었다. 강폭은 이십 장 정도로, 호수라고 해도 될 것 같았다.
“강인가요?”
금장생은 물었다.
“네.”
“그럼 서천왕부는 섬에 있는 셈이네요?”
“전설에 의하면 폭 이십 장(60미터)에 달하는 해자라고 하는데 증거자료는 없어요. 그래서 우린 아무렇게나 불러요.”
“아무렇게?”
“서천왕부를 흐르는 강이라고 해서 서하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고, 호수라고 하여 서호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어요.”
“편할 대로 부르면 된다는 거네요?”
“맞아요.”
“여기서부터는 걸어가는 게 낫겠네요.”
“왜요?”
“고향 집을 보면 기억이 돌아올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알았어요.”
아수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부에게 말했다.
곧 마차가 멈췄다. 금장생과 아수수는 마차에서 내렸다.
바로 앞에 고색창연한 다리가 서 있었다. 나무와 석재를 섞어 만든 다리였는데, 세월의 냄새가 잔뜩 묻어났다.
금장생은 다리 위로 올라섰다.
바닥은 돌이고 난간의 재료는 나무였다. 길이가 이십 장이 넘는데도 거의 흔들리지 않는 걸 보면 상당히 튼튼하게 만들어진 듯하다.
그는 다리를 건너갔다.
다리를 건너자 바로 대문이 나왔다.
출입문의 명칭은 정문正門이었다.
“단순하네.”
금장생은 정문이란 글이 새겨진 현판을 보며 중얼거렸다.
“처음 이 건물을 설계했던 분의 성격이 단순했나 봐요. 주 출입구는 정문, 동쪽 문은 동문, 서쪽 문은 서문, 북쪽 문은 북문이라고 했더라고요.”
“확실하네요.”
금장생은 안으로 들어갔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건 삼 장 폭의 직선 도로였다. 벽돌을 깐 널따란 길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이어져 있었다.
‘대단하네.’
금장생은 혀를 내둘렀다.
‘아니, 우리 집도 저렇게 할 수는 있었지. 아버지만 아니었더라면.’
아버지는 ‘신발이 젖으면 말리고 흙이 묻으면 씻으면 되지 그게 싫어서 돈을 들여 벽돌을 깔아? 그건 돈 낭비를 넘어 미친 짓이야.’라고 말했을 게 분명하다.
“계속 가면 돼요.”
아수수가 말했다.
“알았습니다.”
금장생은 걸음을 옮겼다.
얼마 후 그 앞에는 거대한 연무장이 나타났다.
연무장은 최소 오천 명 정도는 수용이 가능할 것 같았다.
연무장을 지나 계속 직진하자 남천장이란 현판이 달려 있는 건물이 나왔다.
“각 천장은 서천왕부를 중심으로 동서남북과 중앙 다섯 곳에 위치해 있어요. 천장은 다시 다섯 개의 건물로 둘러싸여 있고요.”
아수수가 서천왕부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서하라고 부르는 강 안쪽에서 생활하는 이들은 사천 명 정도였다.
“이천오백 명은 무인이고 일천 명은 가족 그리고 나머지 오백 명은 잡일을 하는 이들과 하인들이에요.”
“밖에서 사는 이들도 많은가 보죠?”
무인들의 가족이 너무 적은 것 같아서 묻는 말이었다.
“네.”
“그들은 강 안쪽을 폐쇄적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죠?”
“상관과 함께 지내는 건 낮 시간이면 충분하잖아요. 밤에까지 얼굴을 맞대고 있을 필요는 없죠.”
“그렇긴 하겠네요.”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저건 뭐죠?”
문득 뭔가를 발견하고 물었다.
그가 발견한 건 폭이 삼 장가량 되는 강이었다.
“수로예요.”
“수로?”
“서천왕부 전역은 배로 이동할 수 있도록 수로가 만들어져 있어요.”
“대단하네요.”
그저 감탄사를 내뱉을밖에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서천왕부 안에 있는 건 수로뿐만이 아니었다. 곳곳에 인공 호수가 있고, 울창한 수림이 뒤덮인 산도 있었다. 가장 높은 산의 높이가 백 장 정도로, 대부분 낮았다.
남천장에도 연무장이 있었다. 규모는 대연무장의 오분의 일 정도였다.
그곳을 지나 반 시진 정도를 걷자 담으로 둘러싸인 장소가 나타났다. 담의 높이는 일 장 정도였다.
길을 따라가자 담과 같은 높이의 대문이 나왔다.
대문 위에는 검은색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그곳에는 서천왕부西天王府라는 글이 금색으로 새겨져 있었다.
끼이이익!
일행이 문 앞에 도착하자 대문이 열렸다.
“어서 오십시오, 마왕!”
그리고 우렁찬 외침이 울려 퍼졌다.
“들어가시지요, 마왕.”
아수수가 말했다.
금장생은 안으로 발을 들였다.
삼백 명 정도가 건물 좌우측에 늘어서 있었다. 이백 명은 무인들이고 나머지는 일꾼들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마왕.”
거대한 덩치를 가진 무인 한 명이 금장생 앞으로 나와 고개를 숙였다.
“누구…….”
금장생은 사내를 보았다.
사람이 아니라 거대한 장군석을 보는 것 같았다. 그만큼 덩치가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