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101)
금장생은 무인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정말…….”
감정이 북받치는 듯 금장생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토해 내듯 말했다.
“오랜만이오.”
금장생은 나직하게 말했다.
목소리는 작았지만 내공이 실려 있어 그곳에 있는 모든 가솔들이 전부 들을 수 있었다.
―네 생각은 어떠냐?
여자가 바로 옆 뚱뚱한 사내에게 전음을 보냈다.
차가운 인상의 이 여자는 적천영의 누나이자 사형제들 중 맏이인 검미후劍美后 적지영이고, 그녀가 전음을 보낸 뚱뚱한 사내는 장남 적풍영이었다. 적풍영의 별호는 묵수墨手였다.
―모르겠습니다.
적풍영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보기엔 더 강해진 것 같다.
―누님이 그렇다면 맞겠지요.
“고개를 드시오.”
그때 금장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행은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금장생은 먼저 오른편으로 갔다. 그곳에는 도끼 두 자루를 등에 멘 중년인이 서 있었다.
그는 동천장인 붕천묵부崩天墨斧 항우각이었다.
“당신이 마가의 중추인 동천장의 천장이라고 하던데 맞습니까?”
금장생은 물었다.
“제 직위는 동천장이고 이름은 항우각 맞습니다, 마왕.”
항우각은 큰 소리로 대답했다.
“그런데 왜 내 눈에는 산적처럼 보이는지 모르겠습니다.”
“사, 산적이라고요?”
항우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킥!”
“큭!”
“풋!”
뒤편에서 나직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산적이라는 게 아니고, 느낌이 그렇다는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애들 보는 데서…….”
“앞으로 산적 천장이라고 부르겠습니다.”
“험! 전 항우각이라는 이름이…….”
“잘 부탁드립니다, 산적 천장.”
금장생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마, 마왕!”
금장생이 고개를 숙이자 항우각은 질겁했다. 그러고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금장생이 거의 구십 도로 허리를 꺾은 바람에 항우각의 머리는 바닥에 닿을 지경이 되었다.
항우각의 머리가 아래로 내려가자 금장생은 머리를 더욱 숙였다. 곧 두 사람의 머리가 땅에 닿았다.
“그만 고개를 드십시오, 마왕.”
항우각은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오랜만에 땅에 머리를 대 보니까 어떻소?”
“네?”
“전에는 내가 어땠는지 모르지만 앞으로는 자주 머리를 대고 살려고 합니다. 많이 도와주십시오.”
금장생은 머리를 바닥에 댄 채 말했다.
“아, 알겠습니다, 마왕.”
“땅에 머리를 대면 또 좋은 일이 있는데 그게 뭔지 아십니까?”
“그, 그건…….”
“이렇게 대박을 친다는 겁니다.”
“대박요?”
“이거 보십시오.”
금장생은 바닥에 떨어져 있던 구리 돈 일 문을 들어 항우각에게 보여 주었다.
“그, 그렇군요.”
“허리도 아픈 것 같은데 그만 일어나시죠.”
금장생은 허리를 세웠다. 그러자 항우각도 허리를 들었다.
금장생은 자리를 옮겼다.
그가 멈춰 선 곳은 서천장 검미후 적지영 앞이었다.
“제 누님이라고 들었습니다.”
금장생은 적지영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어서 오너라. 그런데 기억만 버린 게 아니라 기억과 함께 마가의 명예도 함께 내다 버린 모양이구나. 그래 가지고 마왕 노릇을 할 수 있겠느냐?”
적지영의 말은 신랄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말이 너무 심하신 거 아닙니까?”
금장생은 적지영의 얼굴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으며 물었다.
“일 년 넘게 왕가를 비워 놓고 그런 말이 나오느냐? 내가 너였다면 창피해서 돌아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예 이참에 짐을 싸서 네 계집을 데리고 마가를 떠나는 건 어떠냐?”
‘쯧!’
금장생은 내심 혀를 찼다.
여덟 가문의 수장인 팔왕이 될 정도로 뛰어난 자였지만 집안을 다스리는 덴 엉망이었던 모양이다.
그게 아니라면 아무리 누나라고 해도 저렇게 나올 수가 없을 것이다.
―전에도 저랬습니까?
금장생은 아수수에게 전음을 보냈다.
―가솔들 앞에서는 저러지 않았어요.
―둘만 있을 때는 저랬다는 건가요?
―그때보다 더 심해진 것 같아요.
―죽어야 할 사람이 살아 돌아와서 기분이 더 나쁜 모양이네요.
―그런 것 같아요.
―일단은 정리를 하고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정리요?
―네.
―어떻게 한다는 거죠?
―두고 보십시오.
“혹시 율장律場도 왔습니까?”
금장생은 적지영 뒤편으로 시선을 주며 말했다.
“네, 마왕!”
그러자 오십 대 중반 사내가 앞으로 나왔다.
중년인에게서는 한눈에 보아도 많은 지식을 지닌 자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지적인 냄새가 풍겼다. 이 사람은 마가의 율법을 담당하는 율장의 장주 잔학殘學 채윤이었다.
“이름이 채윤이라고 하던데 맞습니까?”
“맞습니다, 마왕.”
채윤은 고개를 숙였다.
“마가에서 마왕의 직위에 대해 말해 보세요.”
“마왕은 마가의 지존이다. 마가에 속한 가솔들은 마왕이 행차하시면 고개를 숙여야 하며, 묻는 말에는 최대한 공손하게 대답해야 한다.”
“말투에 대한 규율도 있습니까?”
“네.”
“말해 보십시오.”
“‘모든 가솔은 마왕에게 대존칭을 사용해야 한다. 설사 가족이라고 해도 예외는 없다.’라고 돼 있습니다.”
“그 규율을 어기면 어떤 죄목에 해당됩니까.”
“하극상입니다.”
“하극상에 대한 처벌은?”
“반란에 준하는 하극상은 사형이고, 정도가 약한 하극상에 대해서는 직위를 박탈하고 내공을 회수한 후 추방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금장생의 시선이 적지영에게로 향했다.
“그, 그건…….”
적지영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가 신랄하게 말한 건 의도적이었다.
기억을 잃은 자는 마가의 생존과 관련이 있는 사안에 대한 의사 결정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부각시켜 업무에 제한을 둘 참이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못 할 거라고 생각했던 동생이 마가의 율법을 들고 나와 반격을 가한 것이다.
사실 마가 율법은 거의 유명무실한 상태고 율법을 적용하여 가솔을 벌 준 적도 최근에는 없다.
모든 일은 상식선에서 처리되었다. 즉, 관습을 율법보다 우선 적용해 왔던 것이다.
그렇다고 엄연히 법전으로 존재하는 율법을 무시할 수도 없다.
“조금 전에 서천장께서는 마가의 명예 운운하셨습니다. 그렇게 마가의 명예를 중히 여기는 사람이 마왕에게 반말을 하고 마왕의 부인을 계집이라고 칭하십니까?”
“…….”
적지영은 아무 말도 못 했다.
“오랜만에 돌아왔고, 서천장의 얼굴을 본 것도 오랜만이라 오늘은 그냥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금장생은 말을 끊었다. 그리고 한 자 한 자 끊어서 또박또박 말했다.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서천장의 직위가 주는 압박감이 너무 심해서 그런 걸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명심하세요, 서천장.”
금장생의 발이 바닥을 뚫고 들어갔다.
“으음!”
“음!”
여기저기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발이 땅바닥을 뚫고 들어갔다는 건 마왕이 화가 많이 났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
이번에도 역시 적지영은 말이 없었다.
조금 전에는 할 말이 없어 못 했지만 이번에는 고까워서 일부러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자존심이었다.
“혹시 압박이 너무 심해, 마왕의 질문에 대답하는 데도 문제가 있을 정돕니까?”
“며, 명심하겠습니다, 마왕.”
적지영은 고개를 숙였다.
바닥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은 수치심으로 인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지금 내가 밟고 선 땅을 잘 보세요, 서천장. 내 자리가 탐이 나면 승천비무에서 나를 꺾으세요. 승천비무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날 내치려고 시도하면 이 땅처럼 될 겁니다.”
금장생은 바닥으로 파고들어 간 발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옆으로 이동했다.
‘오냐, 놈. 지금은 참겠다.’
조금 전 금장생이 파 놓은 발자국을 바라보며 적지영은 내심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응?’
갑자기 그녀의 눈이 커졌다.
그녀의 시선은 금장생이 파 놓은 발자국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문득 아주 오래전 동생과 나눴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게 괴물 발이지 사람 발이니?”
“제 발은 다른 사람보다 약간 클 뿐입니다.”
“발 크기가 한 자 한 치(33센티미터)나 되는 걸 너는 약간 크다고 하는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은 괴물 발이라고 할걸.”
“그래도 전 제 발이 좋습니다.”
동생의 발 크기는 분명 한 자 한 치였다. 그런데 방금 찍힌 발자국의 크기는 한 자보다 작다.
차이는 그리 커 보이지 않지만 한 자가 되지 않는 건 분명했다.
‘가짜였구나.’
그녀의 시선이 금장생의 발자국을 좇았다.
다른 건 철저하게 준비하면 속일 수 있지만 발만큼은 어쩔 수가 없다. 아니, 발이나 손은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너도 그랬겠지.’
적지영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너는 끝났다, 놈. 그리고 너도.’
적지영은 금장생과 아수수의 발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주먹을 지그시 말아 쥐었다.
그러고는 동생 적풍영에게 전음을 보았다.
그때 적풍영은 금장생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누나인 적지영이 호되게 당한 걸 본 후인지 그는 고분고분하게 대하고 있었다.
―놈의 발을 잘 봐 둬라.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내가 아는 적천영의 발 크기는 한 자 한 치다. 하지만 그자는 한 자가 안 된다.
―지금 이자가 가짜란 말입니까?
―그렇다.
―한 자 한 치가 확실합니까?
―어릴 때 발이 크다고 놀려 먹기까지 했으니까 맞다.
―그래서 기억을 잃었다고 한 거였군요.
―맞다. 저놈은 가짜다.
적지영은 단언하듯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