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97)
부활체
삼호의 등을 쓰다듬던 금장생도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금장생과 삼호의 코에서 고른 숨소리가 흘러나오자 한 사람이 천천히 일어났다. 그는 삼호의 손에 죽임을 당한 이호였다.
이호는 금장생과 삼호를 노려보았다. 당장 출수해서 두 사람을 죽여 버리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언젠가 들었던 좌천심황 좌무백의 말이 떠오른 탓이었다.
너무 오래돼 그동안 잊고 있었다.
“그러지 않길 바라지만 적의 공격을 피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상황이 오면 반드시 심장을 내줘라. 목을 내주면 절대 안 된다. 심장이라야만 한다.”
“왜 그렇습니까.”
“그래야 다시 살아날 수 있기 때문이다.”
“부활한단 말입니까?”
“그렇다.”
“그게…….”
“지금은 믿지 않아도 상관없다. 하지만 심장을 내줘야 한다는 것 한 가지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우리 천객들이 모두 여벌의 목숨을 가지고 있는 겁니까?”
“아니다.”
“그럼?”
“부활체는 일백 명뿐이다. 그리고 네가 부활체라는 사실은 비밀로 해야 한다.”
“부활체라고 부르는 모양이군요.”
“의식이 끝나기 전까지 부르는 호칭이다.”
“의식이 끝나면 어떻게 됩니까?”
“절대자로 다시 태어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일호가 되지 못한 거였군.”
이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방면에서 더 뛰어나고 더 먼저 천객에 발탁됐음에도 불구하고 일호가 되지 못했던 건 바로 부활전사의 운명 때문이었다고 이호는 생각했다.
“부활체가 됐다면 열두 시진(24시간) 안에 돌아와야 한다. 네 심장은 열두 시진이 지나면 다시 구멍이 난 상태로 돌아가고 만다. 그리고 신법 이외의 힘은 절대 사용해서는 안 된다. 힘을 사용하는 순간 부활체는 깨지고 만다. 명심해라.”
이호가 무방비 상태로 있는 금장생과 삼호를 공격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부활체가 깨지는 걸 바라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계단을 올라갔다.
잠시 후 이호의 모습은 사라졌다. 실내에는 잠을 자는 두 남녀의 고른 숨소리만 남았다.
먼저 잠에서 깬 사람은 삼호였다.
삼호는 고개를 들었다.
“어?”
그녀의 눈이 커졌다.
마치 효과가 탁월한 내상약을 복용하고 난 후처럼 몸 상태가 좋았다. 게다가 기분까지 상쾌했다.
‘어떻게 된 거지?’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은 탈진해서 기절했다. 그리고 깨어났다. 그런데 몸이 전보다 더 좋아져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았다. 자신이 하지 않았으니까 남은 사람은 일호뿐이다.
하지만…….
“뭐, 좋은 거니까.”
삼호는 빙긋 웃었다.
“뭐가요?”
금장생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시선을 내렸다.
“제가 깨운 건가요?”
“왜 잠이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금장생은 상체를 일으켰다.
“어?”
그의 눈이 커졌다.
“왜 그래요?”
“없습니다.”
“없어요?”
“이호 말입니다.”
금장생의 말에 삼호는 시선을 돌렸다.
“정말이네?”
그녀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이호가 쓰러져 있던 곳으로 걸어갔다.
“끙!”
금장생은 얼굴을 찌푸렸다.
삼호에게서 평범한 건 웃지 않고 있을 때의 얼굴뿐이었다. 얼굴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쳐다보기만 해도 숨이 막힐 정도로 뇌쇄적이다.
뒷모습도 다르지 않았다. 마치 물결처럼 흐르는 굴곡진 상체와 만월을 연상케 하는 엉덩이 그리고 대리석으로 다듬은 것 같은 매끈한 다리는 우물尤物이라는 말이 왜 생겨났는지 확실하게 알게 해 주었다.
금장생의 혈류가 다시 빨라졌다.
“이럴 수가…….”
“왜 그래요?”
그는 삼호 옆으로 갔다.
“없어요.”
“없다는 건…….”
“여기에는 이호의 심장에서 흐른 피가 흥건하게 고여 있었어요.”
삼호는 바닥을 가리켰다.
피가 고여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이라고 하듯 그녀가 가리킨 곳은 다른 곳에 비해 젖어 있었다.
“그런데 감쪽같이 사라진 거군요.”
“네.”
삼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죽은 시체도 없고 피도 없으면 어떻게 되는 거죠?”
“누군가 시체를 가져가는 건 가능하지만 피를 이렇게 깨끗하게 훑어 가는 건 불가능해요.”
“그렇다면…….”
금장생은 팔을 쓸었다.
귀신에 익숙해진 줄 알았는데 아직 아닌 모양이었다.
귀신 말고는 딱히 생각나는 단어가 없었다. 팔에 소름이 돋았다.
“살아난 걸까요?”
삼호는 금장생을 돌아보며 물었다.
“글쎄요…….”
금장생은 말끝을 흐렸다.
“만일 살아났다면 다시 죽이면 돼요.”
삼호는 주먹을 불끈 쥐고는 일어났다.
“일단 올라가죠.”
따라 일어난 금장생은 한편에 떨어져 있는 흑우와 갑옷과 속옷 그리고 곤도를 챙겼다.
속옷을 입을까 하다가 삼호가 벗고 있는 상태에서 혼자만 입으면 분위기가 이상해질 것 같아서 그대로 두었다.
휘적휘적 삼호를 따라 위로 올라갔다.
“먼저 씻어야 할 것 같아요. 제 등 괜찮아요?”
삼호는 금장생에게 등을 들이밀었다.
“피가 많이 묻어 있습니다.”
“그건 일호도 그래요. 먼저 제 등부터 씻어 주세요.”
내부를 둘러보던 삼호는 욕실을 찾아 들어갔다.
욕실에는 커다란 욕조가 있었다.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이용하는 곳인 모양이었다.
“물도 채워져 있네요.”
삼호는 곧바로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일호도 들어오세요.”
“네.”
금장생은 욕조 안으로 들어가 삼호 건너편으로 앉았다. 물은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차가웠다.
금장생은 재빨리 이화태양강을 펼쳤다, 따뜻한 기운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더니 곧 적당하니 따뜻해졌다.
“좋네요.”
삼호는 빙긋 웃었다. 그러고는 몸에 묻은 피를 씻어 냈다.
피가 씻겨 나가면서 가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금장생이 바로 앞에 있는데도 별로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앞을 다 씻고 난 그녀는 금장생 앞으로 가 등을 댔다. 금장생은 그녀의 등에 묻은 피를 씻겨 내렸다.
“좋아요?”
삼호는 물었다.
“뭐가요?”
“장의사로 살아가는 거요.”
“전보다는 좋습니다.”
“돌아올 생각은…… 없겠죠?”
“그럴 거면 나오지 않았겠지요. 다 씻었습니다.”
“그렇군요. 돌아앉으세요.”
금장생은 돌아앉았다. 삼호는 금장생의 등에 묻은 피를 씻어 냈다.
“됐어요.”
삼호는 금장생의 등을 가볍게 툭툭 치고 원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조두를 찾아 머리를 감고 다시 몸을 씻고 헹군 다음 욕실에서 나왔다.
“먼저 옷부터 찾아야겠죠?”
“이 층으로 가 보죠.”
두 사람은 곧바로 위로 올라갔다.
몇 군데 방을 뒤지자 침대와 옷장이 있는 방이 나왔다. 부부가 머물던 방인 듯, 남자와 여자 옷이 다 있었다.
두 사람은 수건을 찾아 몸을 닦았다. 그리고 옷장을 뒤졌다.
삼호는 옷 한 벌을 꺼내 입었다.
그녀가 걸친 건 겉옷뿐이었다.
금장생은 삼호를 보았다.
“남의 겉옷을 입는 것도 찝찝한데 속옷까지는…….”
“그렇군요.”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의 속옷을 입고 사내 옷 한 벌을 꺼내 입었다.
“먹을 것 좀 찾아올게요.”
삼호는 방에서 나갔다.
그녀가 돌아온 건 반 시진 후였다. 음식이 가득 담긴 쟁반을 들고 있었다.
쟁반 위에 놓여 있는 건 돼지고기 수육과 술 한 병 그리고 잔 두 개였다. 돼지고기 수육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삶은 건가요?”
“그럴 정성까지는 없고 삼매진화로 그냥.”
삼호는 슬쩍 웃었었다.
“맛있겠네요.”
금장생은 입맛을 다셨다.
그러고 보니 망루를 떠난 후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았다.
“저는 배가 등에 달라붙었어요.”
삼호는 쟁반을 두 사람 사이에 놓고 앉았다. 그리고 정신없이 음식을 먹었다. 술도 각자 따라 마셨다.
음식이 떨어져 갈 무렵 비로소 속도가 느려졌다.
“거기 생활은 어때요?”
“뭔가 조금씩 변화가 있는 것 같기는 한데, 그게 뭔지 알 수가 없어요. 할아버지도 말을 안 해 주시고요.”
“할아버지가 있어요?”
“몰랐어요?”
삼호는 되물었다.
“천객은 모두 고아로 구성됐다고 들었거든요.”
“구 할은 그래요.”
“나머지는 가족이 있다는 거네요?”
“저도 그중 한 사람이에요.”
“가족은 보통 어떤 사람들이죠?”
“삼신회에 소속된 이들의 후손이 대부분이에요.”
“그런데 왜 내게…….”
“일호 자리를 주었냐고요?”
“자신들의 자식들에게 줘야 하는 거 아닌가 해서요.”
“저도 그게 이상해서 할아버지께 물었어요. 그런데 할아버지 말이, 누군가의 가족에게 천객을 맡기면 힘의 균형이 깨진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일호가 다른 대원들에 비해 강하기도 했고요.”
“그랬군요.”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금장생은 삼호를 보았다.
“삼신회가 어떤 곳인지 궁금한 눈치네요?”
“마맹을 창설한 자들의 후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어?”
삼호의 눈이 커졌다.
방금 금장생이 한 말은 구천각의 각주나 돼야 알 정도로 극비 사항이었다.
“우연히 알게 됐습니다.”
“혹시 그런 것 때문에……?”
“날 없애려는 이유가 그 때문은 아닙니다. 마맹에 대한 건 거기를 나오고 난 후에 알았으니까요.”
“그럼…….”
“이런저런 일 때문이겠지요. 자존심도 한몫했을 테고요.”
“마음대로 떠나면 어떻게 된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한 것도 있을 테고요.”
“그럴 겁니다.”
“일호가 숨어 있는 곳이 밝혀지고 말았는데 이제 어떻게 할 거죠?”
“망루에 나로 변장한 사람을 세워 두었는데 그걸로는 안 되겠죠?”
“당연히 안 되죠. 또 찾아올 거예요.”
“떠나야죠.”
“그들의 눈은 중원 전역에 뻗어 있어요.”
“잘 숨어 봐야지요.”
“함께했으면 좋겠는데 안타깝네요.”
“어쩌다 발을 들여놓긴 했지만 거긴 원래 내 길이 아니었습니다.”
“거기라면…….”
“무림 말입니다.”
“그렇군요.”
삼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술잔을 비웠다.
제법 술을 마신 듯, 그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술이 부족한 것 같아요. 제가 가서…….”
삼호는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금장생은 삼호를 부축했다.
“쉬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이 정도 가지고 뭘 그래요. 더 마실 수 있어요.”
삼호는 금장생의 팔을 뿌리치려고 했다.
하지만 금장생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리고 침대로 데리고 가 눕혔다.
“제 옆에 누워 주면 안 돼요?”
삼호는 금장생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건 그다지…….”
“안아 달라고는 하지 않을게요. 옆에만 있어 주면 돼요.
“……알았습니다.”
금장생은 삼호 옆으로 누웠다.
“제가 일호를 좋아했다는 거 아세요?”
“아뇨.”
금장생은 고개를 저었다.
“일호만 빼고 모두 알고 있었어요. 이호가 저를 미끼로 이용한 게 그 때문이기도 했고요.”
“그랬군요.”
“그런데 날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왜 구하러 온 거죠?”
“나 때문에 누군가가 고통을 받는 게 싫거든요.”
“마음이 하해와 같이 넓네요. 하긴 내가 그런 점 때문에 좋아한 거니까.”
삼호는 피식 웃었다.
“정말 전혀 몰랐습니다.”
“제가 아는 일호는 술도, 여자도, 도박도 좋아하지 않았고, 무인이라면 눈에 불을 켜는 신검이나 신도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어요. 도대체 일호가 좋아하는 건 뭐죠?”
“그게 누군가에게 말할 만한 게 아니라서요.”
“극비 사항인가요? 아니면 그걸 알려면 목숨을 걸어야 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그럼 뭔데요?”
“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