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95)
두 개의 던전
“난 그냥 갔으면 하는데 막으시겠습니까?”
“우리 물건만 내놓으면 가지 말라고 해도 가겠다.”
동영 무인 중 한 명이 말했다.
“일단 어떤 물건인지 들어 봅시다.”
“관이다.”
“관?”
금장생의 눈이 살짝 커졌다.
은밀하게 장상문으로 들어왔던 관들의 진짜 주인을 이제야 만난 것이다.
“보았으면 살고 보지 못했으면 죽는다.”
‘혈가 무인들인 모양이네.’
동영 무인들의 정체가 짐작이 갔다.
“당신들…….”
금장생은 곤도를 오른편 어깨 앞에서 수직으로 세웠다.
“응?”
동영 무인들의 눈이 커졌다.
금장생이 취한 자세는 동영 무공의 기수식이었던 것이다.
“동영에서 무공을 배웠더냐?”
동영 무인 중 한 명이 물었다.
“내 왼손 손가락을 보시오.”
금장생은 천지황이 보이도록 했다.
“그, 그건…….”
동영 무인 수뇌의 눈이 커졌다.
“타하!”
그 순간 금장생이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동영 무인들 앞에 선 그는 곤도를 휘둘렀다.
“맙소사, 저 무공은?”
동영 무인 수뇌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허공을 수십 번 난도질한 저 무공은 동영에서 가장 강한 무공 중 하나인 뇌섬류였다.
뚝! 뚝! 뚝!
동영 무인들의 몸에서 피가 한 방울 두 방을 떨어졌다.
츄악!
그리고 곧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큭!”
“윽!”
“억!”
“악!”
동영 무인들이 짧게 비명을 내질렀다. 그리고 통나무처럼 무너졌다.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단 일 초에 동영 무인 스무 명이 모두 죽임을 당하고 수뇌 한 명만 살아남은 것이다.
“뇌, 뇌섬류냐?”
수뇌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가 아는 한 뇌섬류는 전설상의 도법이었다. 그런데 그 뇌섬류가 나타난 것이다.
“그렇습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이 천지황의 주인이기도 합니다. 물론 당신네들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처, 천지황은 과거의 유물일 뿐이다! 그리고 나는 동영보다는 중원에서 더 오래 생활했다!”
동영 무인 수뇌는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그렇게 말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오세요.”
금장생은 다시 곤도를 어깨 앞에 세워 들었다.
“오냐.”
동영 무인 수뇌는 왜도를 사선으로 늘어뜨렸다. 그리고 도 손잡이로 왼손을 가져가 두 손으로 쥐었다.
“타하!”
먼저 기합을 내지른 자는 동영 무인 수뇌였다.
“차앗!”
이어 금장생이 기합을 내질렀다.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쏘아져 갔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급격하게 가까워졌다.
동영 무인 수뇌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도를 휘둘러 상대를 없앨 수 있는 거리는 반 장.
반 장을 남겨 두면 두 사람은 동시에 도를 휘두를 것이다.
자신은 걷어 올리고 뇌섬류의 전수자는 내리그을 것이다. 그리고 둘 중 더 빨리 휘두른 자만이 살아남게 될 것이다.
상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압력에 온몸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지금이다!’
동영 무인 수뇌는 전력을 다해 검을 걷어 올렸다.
번쩍!
번쩍!
백색 광채와 푸른색 광채가 두 사람 사이에서 폭발했다.
숨 막히던 압력이 사라지고 정적이 찾아왔다. 동영 무인 수뇌의 도는 금장생 발 앞에 멈춘 채고 금장생의 곤도 끝은 땅속으로 파고들어 가 있었다.
“가공하군.”
쩍!
입을 열자마자 동영 무인 수뇌의 몸이 절반으로 잘렸다.
턱! 턱!
두 조각으로 나뉜 동영 무인 수뇌의 몸통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강해져서 나도 놀라는 중이오.”
금장생은 자세를 풀었다.
그리고 대결 때 잠시 풀었던 천리비적공을 다시 펼쳤다.
갖가지 냄새를 다 제거하고 삼호 냄새만 남겼다. 그리고 냄새를 쫓아 걸음을 옮겼다.
걸음을 옮기는 중에도 천객들은 계속 공격을 해 왔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곤도의 제물이 돼야 했다.
천천히 나아간 금장생은 반 시진 후 불에 타지 않는 건물 앞에 도착했다.
“일흔두 명.”
금장생은 망설임 없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일흔둘. 이곳까지 오면서 그가 없앤 천객의 수였다.
휙!
오른편에서 미약한 소리가 들렸다. 금장생은 곧바로 곤도를 찔러 넣었다.
푹!
곤도가 파고드는 소리만 들려올 뿐 비명은 없었다.
“묵객黙客까지 온 모양이군.”
금장생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묵객은 혀를 잘라 버려 죽을 때도 비명을 지르지 않는 자객을 말한다. 그들 또한 화객만큼 비밀이 많은 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있다는 건 여기가 최후의 장소라는 뜻이겠지.”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휙!
순간 금장생의 신형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일 장 정도를 날아간 그는 내려섬과 동시에 곤도를 바닥으로 찔러 넣었다.
바닥에서 피가 솟아 나왔다. 이번에도 역시 비명은 없었다.
그 후로도 금장생은 계속해서 곤도를 찔러 넣거나 휘둘렀다.
그가 곤도로 공격한 곳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곤도를 뽑는 순간 검붉은 액체가 흘러나왔다.
금장생이 걸음을 멈춘 건 자객 열다섯 명을 없앤 후였다.
그의 시선은 일 장 앞에 있는 공간에 머물러 있었다. 그곳은 지하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쳐다보는 것도 잠시,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금장생은 지하로 들어섰다.
지하에는 삼호가 발가벗겨진 채로 누워 있었다.
천장을 보고 다리까지 벌린 상태라 삼호의 모든 게 한눈에 들어왔다.
금장생은 잠시 망설였다.
사실 그는 삼호의 몸매가 저렇게 엄청날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지 못했다.
물론 몇 번 업어 준 적이 있어 보통 여자보다 더 성숙한 몸매를 지녔단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저건 상상 이상이었다.
‘아무튼!’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삼호 앞으로 갔다.
그리고 먼저 아혈을 풀어 주었다.
“흑! 흑흑!”
혈도가 풀리자 삼호는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
사내 앞에 알몸을 고스란히 내놓고 만 수치스러움과 이제 목숨을 구했다는 안도감이 교차하는 그런 울음이었다.
금장생은 그녀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
삼호의 울음은 조금씩 잦아들었다.
“혼잔가요?”
금장생은 물었다.
이번 일의 주동자라고 할 수 있는 이호가 보이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천리지청술을 펼쳐 확인했지만 어디에서도 인기척은 감지되지 않았다.
“이호가 이곳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도 몰라요.”
“방금 확인했는데 이 안에는 없습니다.”
“그놈은 절대 도망칠 리가 없어요. 분명 이곳 어딘가에서 일호를 노리고 있을 거예요.”
삼호는 지하를 살폈다.
하지만 내공을 끌어 올릴 수 없는 상태에서 그녀가 발견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이호는 금장생 뒤편 반 장 거리에 은신해 있었다.
엄청난 무공을 지닌 금장생이 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한 건 이호가 더 강해서가 아니라 특이한 은신술 때문이었다.
이호는 삼신회를 떠나기 전에 초인삼황 중 좌천심황 좌무백을 만나 한 가지 비술을 전수받았다.
그건 무공보다는 술법에 더 가까웠다. 그 술법을 펼치면 굳이 내공을 끌어 올리지 않아도 숨는 게 가능했다.
문제는 몸에서 흘리는 기운이었다.
몸을 숨기는 건 가능하지만 기운과 숨소리 그리고 심장박동 소리 같은 건 숨기지 못했다.
그 문제를 해결해 준 게 진법이었다.
진법은 들어가는 건 힘들어도 나가는 건 아주 쉬웠다. 걸어 나가거나 몸을 날려서 나가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먼저 진법을 구축하고 그 안으로 들어간 다음 일명 투명비술이라고 부르는 비법을 펼치면 존재가 완벽하게 지워진다.
‘나는 여기서 기다릴 것이다, 일호.’
이호는 금장생을 노려보며 주먹을 천천히 그러쥐었다.
“그보다 해혈부터 합시다. 어디를 점혈당한 거요?”
바로 뒤에 이호가 숨어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 금장생은 삼호를 보며 물었다.
자꾸만 가슴과 하체로 시선이 향해 미안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마혈 세 군데예요. 위치는…….”
삼호는 자신이 점혈당한 혈도에 대해 말했다.
“잘못 누르면 바로 죽음으로 이어지는 곳이군요.”
“가능하겠어요?”
“해 봐야지요.”
금장생은 삼호 앞에 가부좌를 했다. 그리고 맥문을 쥐고 내부를 살폈다.
점혈은 보통 두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제압을 위한 점혈과, 포로로 잡아 두기 위한 점혈이 그것이다.
제압을 위한 점혈은 다음에 바로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 때문에 굳이 복잡하게 할 필요가 없다. 혈도에 강한 충격을 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오랜 시간 동안 잡아 두기 위해서는 쉽게 풀지 못하게 해야 한다.
즉, 사혈과 이어지는 혈도를 특수한 기운이나 혹은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제압하여 다른 사람이 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만일 무리해서 풀려고 시도하면 사혈에 충격을 주어 죽음에 이르고 만다.
삼호가 당한 방식은 후자였다.
금장생은 삼호의 맥문을 통해 혈도의 상태를 확인했다.
혈도는 단단한 막으로 둘러싸인 달걀과 같은 상태였다. 막을 뚫다가 달걀을 깨트리면 치명적인 상황으로 치닫게 되고, 심하면 삼호는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자, 변태인가 봅니다.”
“왜요?”
“소저의 가슴을 쥐지 않고는 해혈을 할 수 없게 해 놓았어요.”
“그래요?”
“네.”
“풀어 주세요.”
삼호는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먼저 오른편부터 풀겠습니다.”
금장생은 삼호의 왼편 가슴을 쥐었다.
삼호의 가슴은 워낙 풍만해 큼직한 손임에도 불구하고 절반도 감쌀 수가 없었다.
오른손으로 가슴을 그러쥐면서 맥문을 쥐고 있던 왼손을 뗐다. 그리고 갑옷에 꽂아 두었던 단검 세 자루 중 흑우를 뽑아 삼호의 오른손에 쥐여 주었다.
‘왜?’
삼호는 금장생을 보았다.
―만일에 대한 대빕니다.
‘알았어요.’
삼호는 눈을 깜빡여 대답했다.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금장생은 다시 맥문을 쥐고 내기를 주입했다. 그리고 가슴을 감싼 오른손에 힘을 주었다.
퍽!
삼호의 내부에서 둔탁한 소성이 들렸다.
하지만 첫 번째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다. 혈도를 감싼 막은 깨지지 않았다.
금장생은 조금 전보다 일 푼을 더 끌어 올렸다. 그리고 강하게 그러쥐면서 진력을 발출했다.
이번에도 역시 막은 끄떡없었다.
금장생은 조금씩 힘을 늘려 진력을 늘려 갔다.
어느덧 그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그 땀은 투구 사이로 흘러나와 삼호의 가슴 위로 떨어졌다.
삼호는 그런 금장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는 사이 가슴에서 통증이 밀려왔다, 금장생이 가슴을 그러쥔 것이었다.
퍽!
스악!
막이 깨지고 혈도가 정상이 되면서 막혔던 진기가 흘러갔다.
“됐어요.”
삼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반대편을 하겠습니다.”
금장생은 오른 가슴을 감쌌다. 그리고 조금과 같은 방식으로 해혈을 했다.
이번에는 두 개의 혈도가 함께 맞물려 있어 더욱 어려웠다. 하지만 한 식경이 지나자 결국엔 그 혈도도 해혈할 수 있었다.
“이제…….”
금장생은 일어나려고 했다.
“한 곳 더 있어요.”
“세 곳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그건 마혈이고요. 그자가 한 곳을 더 점혈했어요. 거기를 풀지 못하면 내기를 끌어 올리지 못해요.”
“어딥니까?”
“회음혈이에요.”
“개자식!”
금장생의 입에서 욕설이 비어져 나왔다.
“부탁할게요.”
“알았습니다.”
금장생은 삼호의 다리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회음혈을 살폈다.
“외혈이 아니라 내혈이에요.”
“그 자식은 지옥으로 떨어질 겁니다.”
금장생은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회음혈을 건드리는 순간 뒤편 공간에서 검은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그는 바로 지금까지 숨어서 기회를 살피던 이호였다.
워낙 은밀하게 움직여, 등을 돌리고 있던 금장생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만일 회음혈에 집중하지 않은 상태라면 알아차릴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럴 경황이 없었다.
먼저 해혈한 세 곳의 혈도처럼 회음혈 또한 사혈과 연계시켜 놓았다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맹수처럼 금장생을 덮치는 이호를 발견한 건 삼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