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92)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화르르!
탁탁! 타다닥! 탁!
선착장 주변 하늘은 붉게 변했다.
불길이 어느 집에서 솟구쳤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디선가 솟구친 불길은 바람을 타고 옮겨 다니면서 각 집을 태웠다.
안에 있던 이들은 밖으로 뛰쳐나와 발만 동동 굴렀다.
처음엔 불을 끄기 위해 물을 퍼 나르기도 했다. 하지만 불길은 너무 거셌다. 몇 동이의 물로 끌 수가 없었다.
결국 그들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 있으면 타 죽는다! 전부 피해라!”
누군가 고함을 내지르자 건물 주변에 있던 이들은 전부 선착장 쪽으로 이동했다.
외침이 있고 한 식경 정도가 지나자 거리는 텅 비었다.
하지만 사람들 모두가 다 불길을 피해 자리를 뜬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무인들이었다.
“컥!”
“윽!”
불길 속에서 나직한 비명이 연속해서 들려왔다.
이어 모습을 드러낸 자는 갑옷으로 전신을 감싼 금장생이었다.
그의 양팔은 천객 두 명의 목을 그러쥐고 있었다. 한 명은 숨이 완전히 끊어진 상태였지만 한 명은 아직 살아 있었다.
―어디 있지?
금장생은 사내의 눈을 보며 전음으로 물었다.
“이, 일호?”
―어디 있냐고 물었다.
“저 뒤에 있는 화루花樓……”
사내는 뒤편을 가리켰다.
―아직 살아 있느냐?
“그건…… 죄송…….”
우두둑!
사내의 목에서 뼈 부러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내의 몸은 부르르 떨더니 곧 잠잠해졌다.
사내를 내려놓은 금장생은 왼편으로 시선을 주었다.
폭이 반 장이 채 되지 않는 좁은 골목길이다. 그런데 그 골목길은 온통 불길에 휩싸여 길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태극선의를 가져올 걸 그랬나?”
그는 불길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방에서 불길이 무섭게 달려들었지만 그를 어쩌지 못했다. 그가 익힌 양극신공과 빙극천월강 때문이었다.
잠시 후 금장생이 멈춰 선 곳은 화루 앞이었다. 대문이 활짝 열린 화루는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금장생은 오른손으로 곤도의 손잡이를 잡고 왼편으로 밀었다. 그러자 곤도가 도갑을 벗어났다.
곤도 날을 잠시 바라보던 그는 사선으로 내렸다.
“누군가 나타났습니다.”
천객 대원 한 명이 대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가 보고한 자는 오호였다.
두 사람은 불길이 미치지 않는 사각지대에서 숨어서 대문을 주시하고 있었다.
“나도 보고 있다.”
오호의 시선이 금장생에게 머물렀다.
‘무기를 바꾼다는 건 쉬운 게 아닌데…….’
오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특이한 갑옷을 입고 있는 자가 일호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그가 아는 일호는 절대 저런 무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일호가 사용하는 무기는 대부분 한 자 이하의 작은 무기들이다.
그랬던 자가 무려 여섯 자에 달하는 거대한 병기를 사용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저 무기는 정체를 숨기기 위해 가지고 온 거겠죠?”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바로 그때 대문 좌우측에서 천객 대원 네 명이 몸을 날려 가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차앗!”
“타하!”
“하아!”
그들은 기합과 함께 금장생을 공격했다.
동시에 몸을 날린 것 같지만 약간씩 차이가 있었다.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 온 결과였다.
시간의 차이를 두는 건 연환 공격과 같은 효과를 나타내게 되고, 공격당하는 쪽은 막기가 그만큼 힘들어진다.
“차아!”
네 명이 일 장 앞으로 다가왔을 때 금장생의 입에서 기합이 터져 나왔다.
사선으로 늘어뜨리고 있던 곤도가 먼저 왼편 공간으로 파고들었다. 순간 시뻘건 광채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시뻘건 광채는 광포한 기세를 머금고 천객 대원을 향해 쏘아져 갔다.
금장생은 결과를 확인하지도 않고 전방으로 몸을 굴렸다. 그가 몸을 구른 건 딱 한 바퀴였다.
“크악!”
“아악!”
천객들의 몸통이 네 조각으로 잘렸다.
스악! 사악!
그 순간 조금 전 금장생이 있던 자리를 강한 기운이 휩쓸고 지나갔다. 오른편에서 금장생을 향해 몸을 날렸던 두 명의 공격이었다.
한 번의 공격을 마친 두 명은 금장생이 있던 자리로 내려섰다. 두 사람은 무기를 앞으로 맨 채였다.
금장생을 놓쳤다는 걸 알아차린 두 사람은 곧바로 방향을 틀었다.
두 사람이 바라보는 곳은 건물 쪽이었다. 넘실대는 불길을 뚫고 십여 명이 이편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슉!
그리고 그보다 더 빨리 진득한 살기를 머금은 도가 배를 노리고 쏘아져 왔다.
두 명은 얼른 무기를 들어 올렸다.
푸악!
그 순간 기다란 도刀 끝에서 도강이 폭발했다.
퍽! 퍽!
도강은 두 명을 휩쓸었다.
“크아악!”
“아아악!”
도강에 노출된 두 명은 온몸이 난자돼 죽었다.
척!
금장생은 일어섬과 동시에 곤도를 양손으로 쥐었다. 그리고 바닥을 찼다.
스악!
그의 신형이 오른편으로 폭사되었다.
“차앗!”
기합이 터져 나오고 붉은 광채가 허공을 갈랐다. 혈랑도법 이 초인 혈랑폭이었다.
수십 마리의 혈랑이 입을 쩍 벌린 채 달려갔다. 그리고 금장생을 향해 달려오던 자들의 머리를 덥석 물었다.
“아악!”
“으아악!”
“크아악!”
처절한 비명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파악! 파악! 파악! 파악!
머리가 부서지고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죽어라!”
“죽엇!”
왼편에서 달려오던 자들이 금장생을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
창!
금장생은 도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려 상대의 무기를 막았다. 그리고 왼편으로 돌아갔다.
슉!
가늘고 긴 무기가 방금 금장생이 서 있던 공간을 뚫었다.
그 순간 자리를 이동하면서 아래로 내렸던 곤도를 사정없이 걷어 올렸다.
스아악!
곤도는 금장생과 무기를 섞었던 자와 가늘고 긴 무기를 든 자를 동시에 잘라 냈다.
“아악!”
“으아악!”
두 사내의 몸통이 사선으로 잘려 나가며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그 피는 고스란히 금장생의 전신으로 떨어졌지만 피할 여유가 없었다.
그는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스악! 스악!
그러자 검 두 자루가 그의 투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금장생은 곤도를 횡으로 휘두르며 몸을 돌렸다.
서걱! 서걱!
다리 네 개가 거의 동시에 잘려 나갔다.
“크악!”
“아악!”
두 명은 비명을 내지르며 풀썩 쓰러졌다.
휙!
금장생은 곧바로 몸을 굴려 자리를 떴다.
반 장가량을 이동한 그는 일어남과 동시에 혈랑도법 삼 초 혈랑멸을 펼쳤다.
순간 붉은 강기가 파도처럼 넘실대며 전방으로 날아갔다. 마치 수백 마리의 혈랑이 먹잇감을 향해 달려가는 듯한 모습이었다.
퍽! 퍽퍽퍽! 퍽퍽! 퍽퍽!
“크악!”
“아악!”
“으아악!”
“아악!”
처절한 비명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천객들은 금장생의 혈랑도법을 막아 내지 못했다.
금장생의 무공에 가장 놀란 자는 바로 천객 오호였다.
“저, 저 도법은…….”
그의 눈이 커졌다.
금장생이 펼치는 도법은 그가 너무나 잘 아는 무공이었다. 그건 바로 그의 조부의 무공인 혈랑도법이었던 것이다.
모든 것이 비밀에 싸여 있는 조직에 대해 오호가 비교적 많이 알고 있는 건 야수각주를 조부로 둔 덕분이었다.
일천 명으로 구성된 천객들 중 자신이 속한 조직에 대해 알고 있는 이는 열 손가락으로 꼽는다.
특히 삼신회三神會 하부 조직인 구천각九天閣에 대해서는 아는 자가 거의 없다. 조부가 야수각의 각주가 아니었다면 자신 또한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일호가 조금 전 펼친 무공은 조부님의 혈랑도법이 분명했다.
“어떻게 저 도법을…….”
오호는 넋을 잃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크아악!”
“아악!”
“으아악!”
또다시 십여 명이 죽임을 당했다.
이번에도 역시 천객들을 없앤 무공은 혈랑도법이었다.
“전부 당했습니다, 오호!”
천객 한 명이 오호를 보며 소리쳤다.
“그럼 우리가 나서야지.”
오호는 허리에 차고 있던 요대를 잡았다. 그리고 힘차게 뽑았다.
순간 다섯 자 길이의 연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연검에 내기를 주입했다. 그러자 힘없이 늘어져 있던 연검이 빳빳하게 섰다.
“가자.”
오호는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그는 대원 한 명과 함께 건물 앞마당으로 내려섰다.
불길은 일 장 건너편까지 다가와 넘실대고 있었다.
저벅! 저벅! 저벅!
불길 건너편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오호와 대원 한 명은 긴장한 얼굴로 전면을 주시했다.
이윽고 발자국의 주인이 나타났다. 전신 갑옷을 걸치고 장도를 든 자였다.
“일호요?”
오호는 물었다.
“막으면 죽는다.”
금장생은 나직하게 말했다.
“오랜만에 목소리를 들으니까 좋소, 일호. 하지만 나는 물러날 수 없소. 왜냐면 나는 삼신회 소속이기 때문이오.”
오호는 연검에 주입하던 내기의 양을 늘렸다. 그러자 검강이 쭉 튀어나왔다.
“그럼 죽이는 수밖에.”
“싸우기 전에 한 가지 묻고 싶소.”
“말해라.”
“혈랑도법은 그분께 전수받은 거요?”
“혈랑도법? 그분?”
금장생의 눈이 커졌다.
이건 또 무슨 소린지?
그가 혈랑도법을 익힌 장소는 분명 역천영면마진 안이다. 그런데 오호가 그 도법을 언급한 것이다. 더구나 그분께 배웠느냐고까지 했다.
그건 곧 혈랑도법을 익힌 자가 있고, 오호는 그 사람을 알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분이 가르쳐 준 게 아니란 말이오?”
오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조부의 무공 중 가장 배우고 싶었던 무공이 혈랑도법이었다. 하지만 조부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며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런데 그 무공을 일호가 익히고 있었다.
“그분이 누구냐?”
금장생은 물었다.
문득 마맹이 완전히 멸망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역천영면마진도 귀마존이 우연히 발견한 게 아니라 원래부터 알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정말 그분을 모르오?”
오호는 물었다.
“내가 혈랑도법을 익힌 곳은 역천영면마진 안이다. 혈랑도법은 그 안에 있었다.”
금장생은 오호가 역천영면마진을 알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에 슬쩍 떠보았다.
“굳이 그런 식으로 날 위로할 필요 없소. 조부가 날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조부?’
누군가로부터 들은 말이 아니고 조부의 무공이라면 거짓말이 아닐 터였다.
‘어쩌면 마맹이 역천영면마진 안에서 무인을 양성한 게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거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책에 남겨진 글을 보면 역천영면마진을 발견한 자가 귀마존이라고 하였다. 그건 곧 그 일을 추진했던 주체가 귀마존이란 뜻이 되고, 마맹 맹주를 살해한 것도 귀마존의 뜻인지도 모른다.
“귀마존이란 자도 있어?”
금장생은 슬쩍 떠보았다.
“귀마존은 없고 귀마는 있소.”
“그럼 야수마존은?”
“내 조부의 별호는 야수마존이 아니고 야수마요.”
“그럼 태양마도 있겠네?”
이번엔 태양마존에서 존 자를 뺐다.
“삼신회의 조직은 극비 사항인데…….”
오호는 금장생을 빤히 바라보았다.
“삼신회는 삼백 년 전 마맹의 후예냐?”
“마맹?”
“방금 내가 언급한 그들은 마맹의 주축이었다.”
“마맹 따위는 삼신회의 발끝에도 따라오지 못하오. 그들은 꼭두각시였을 뿐이오.”
“그러니까 마맹 맹주를 살해한 건 구마의 의지가 아니라 누군가의 지시였다는 말이네?”
“그걸 어떻게…….”
오호의 눈이 커졌다.